최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오자를 기사에 실었다가 큰 파문에 휩싸였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이름을 잘못 표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낸 것이다.
원자바오, 우리 말로 따뜻할 ‘온(溫)’, 집 ‘가(家)’, 보배 ‘보(寶)’를 썼다.
‘온가보(溫家寶)’인데. 이 보배 ‘보(寶)’자가 간자체로 방을 뜻하는 ‘실(室)’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온가실(溫家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원자바오’가 ‘원자스’가 되는 것이다.
<인민일보>는 기사 마감 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쇄판부터는 이를 바로잡았는데. 이미 인터넷을 통해 퍼질 대로 퍼진 후였다.
이번 파장, 어마어마했다.
17명이 문책 당했다.
이 소식을 전한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중국에서는 이전에도 지도자급 인사의 이름이나 신분이 잘못 표기되는 사례가 발생했지만 이때마다 사장이나 편집국장이 해임되거나 신문의 발행이 중단되는 등 엄격한 처분을 받았다.
과거 유사한 사례로 1990년대의 일을 소개해 본다.
중국 인민일보 ‘전국인민대회’에 들어가는 클 ‘대(大)’자를 개 ‘견(犬)’자로 쓴 것이다.
사실 클 ‘대(大)’자에 오른쪽 상단에 점 하나 더 찍으면 개 ‘견(犬)’자가 되지 않나?
‘전국 인민의 개들이 모여서 회의한다’ 이런 뜻으로 오도했다고 해석했으니 피의 숙청은 불가피했다.
한자문화권인 일본 또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1980년대 요미우리신문은 메이지대제(明治大帝)가 아닌 ‘메이지견제(明治犬帝)’로 오자가 나온 사실이 있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삼남일보'라는 신문에서 '이승만 大統領'을 '이승만 犬統領(견통령)'으로 표기해 기사를 내보냈다.
이건 좀 셌다.
대통령을 개를 다스리는 지도자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래서 이 신문, 정간처분을 받았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성 오얏 ‘이(李)’자 맨 위에 작대기 하나 더 그으면 막내 ‘계(季)’자가 되는데 그래서 ‘계승만 대통령’으로 만들어 실은 신문도 있었다.
하여간 모두 무사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임금님이셨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사람 특히 권력자 이름에 오자라는 오점을 남기면 무사하지 못했던 시절, 1980년대 초반에도 이어졌다.
당시 한 인쇄 책임자는 영부인 이름 옆에 통상 붙는 ‘여사’라는 단어를 ‘여시’로 잘못 표기해 발행된 인쇄물을 뒤늦게 발견했다.
(여시는 여우의 방언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천하의 권력자 부인을 음험한 짐승으로 규정하다니.
간이 배 밖을 나와 해외 출장한 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눈 여겨 본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넘어갔다.
훗날 이 주인은 정권 끝난 다음에야 선술집에서 이 사실을 쏟아냈다.
몇 년 간의 속병은 이날 깨끗이 치유됐을 것이다.
인쇄매체 만이 아니라 방송매체에서도 비슷한 실수는 많았다.
‘육영수 여사’라는 말을 거듭 반복해서 읽던 아나운서가 말이 꼬였는지 어느 순간엔 ‘육영사 여수’라고 발언했다.
‘여수’는 ‘여우’ 또는 ‘여자 죄수’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었다.
당사자는 몇 날 몇 일을 떨어야 했다고 한다.
방송매체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5공 시절, 언론인 해직 열풍이 일 무렵의 이야기도 소개한다.
한 아나운서가 신경 써서 뉴스를 읽던 와중에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때는 가뜩이나 미국이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을 한국의 새 지도자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외교적으로 매우 미묘했던 시기.
뉴스 원고 원문에는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을 적극 지지할 것으로 보입니다”로 돼 있었는데 아나운서가 무슨 미친 마음이 들었는지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을 적극 저지할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읽은 것이다.
아나운서는 그 자리에서 정정했다.
그래서 큰 문제 없이 넘어갔던 모양이다.
그 조그만 부스 안에서 일 획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경험이었다.
일 획 때문에 큰 낭패를 본 신문 기자 이야기 하나만 더 전한다.
‘백지화’라는 단어, 흰 ‘백(白)’자에 종이 ‘지(紙)’자를 써서 ‘백지화(白紙化)’ 아닌가?
한 교열기자가 ‘주택사업 백지화’를 제목으로 달면서 ‘백지화(白紙化)’를 한자로 쓰려 했는데, 흰 ‘백(白)’자에 작대기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는 스스로 ‘자(自)’자를 쓴 것이다.
결국 결과는 아주 이상한 어감의 ‘자지화(自紙化)’가 돼 버렸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이미 대중에게 전달되는 순간, 주워 담기 힘든 상황이 된다.
하긴 오자가 정통이 돼 버린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이다.
이게 본래는 낙타 gamla가 아니라 밧줄 gamta이었다.
성경을 옮겨 적으면서 밧줄의 ‘t’를 낙타의 ‘l’로 잘못 쓴 이래로 밧줄이 아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표현의 주인이 됐다.
사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는 ‘밧줄이 바늘구멍 들어가기’가 덜 뜬금없지 않나?
전통은 이래서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