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돌산(古突山)진
가. 고돌산만호진성(突山萬戶鎭城)
고돌산만호진성의 축성은 성종 16년(1485)에 시작하여 성종 21년(1490) 6월에 완성 되었다. 성의 규모는 「성종실록」에“고돌산진성은 남향에 그 주위가 1313척, 높이가 13척, 성안에 井泉이 3개소가 있다.”그리고「古突山鎭鎭誌及事例(1611)」에 “성첩의 둘레가 포척으로 787보, 여첩이 760좌, 좌총혈이 695처, 泉井 5처, 민호가 성안에 82호, 성밖에 62호, 동헌 4간, 내아사 8간, 군기고 4간, 저치고(儲置庫) 5간, 화약고 1간, 선창집 물고 4간, 복파정 5간, 군관청 8간, 진휼청 9간, 통인청 5간, 사령청 8간”이라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성은 배후에 있는 수복등을 의지하여 산위에서부터 바닷가의 완만한 경사진 곳을 이용하여 성곽을 둘러 서, 북문, 수구문을 냈는데, 북쪽 고외 마을로 통하는 길목에 북문을 내고, 남문과 수구문밖이 바로 바다가 되어 거기에 굴강이 구축되게한 석축 성곽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성이 허물어져 옛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남문터는 용주리 161 盧正煥(노정환)씨댁과 용주리 權昌順씨(권창순.현식이 아버지)댁 사이의 길목에 있었다. 북으로 용주리 664-621번지에 걸쳐 고목 그늘에 박혀있는 큰돌들이 성터의 성돌 그대로이고, 용주리 고내와 고외의 경계를 따라 동으로 방향을 돌려 고외 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건너, 용주리 659번지 朴敬順씨(고 박경순,상현이 아버지)댁에 이르는데, 이 댁 북쪽(우측) 담벽이 옛 성벽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있어 이 마을을 찾는 이에게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용주리 648번지 막사가 있는 밭(구 서당터)과 용주리 728번지 밭 사이의 고외 마을쪽으로 넘어가는 산길의 목이 북문터였다고 한다.
북문에서 산허리를 따라 올라가 용주리 735번지의 큰 밭을 정점으로 밭두둑 길을 따라 서쪽으로 둥그렇게 용주리 539-540-542번지의 산길을 따라 오다가 길 건너 서쪽 용주리 550-551번지를 거쳐 용주리 552번지 큰 밭에 이르는데, 이 밭이 호두로 가는 큰길가가 된다. 이 곳에서 마을 앞 바다 쪽으로 방향을 돌려 용주리 561-699-697번지 金三岩(김삼암,공식이 아저씨 아버님)댁에 이르는데, 수구문은 그 옆 朴龍根댁(박용근,상인이 아버지)(용주리690)사이의 큰 길목이라고 하는데 그 옆에 崔斗千(최두천,경숙이 오빠)씨댁(용주리689)사이에는 지금도 큰 돌로 된 수구에서 동네 물이 흐르고 있다.
수구문에서 연안을 따라 용주리 688-685번지를 거쳐 남문터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굴강은 이남문과 수구문 사이 바다쪽 연안인 용주리 596-602-605-609-611번지 일대에 둥그렇게 굴강을 이루어, 옛 모습을 현장과 지적도에서도 볼 수 있지만, 4丈이나 되었었다는 수심도 낮아지고 그 당시의 연안이 큰 도로, 또는 논과 밭으로 잠식되었다고 한다. 선창집 물고 터에는 용주리 사무소(659)가 세워졌으며, 성안의 동헌(東軒)은 용주리 663-665-1번지 일대인데 헐어서 구 화양면 사무소를 지었다가 지금은 그 목재가 이웃 용문사 법당의 재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내아(內衙)다는 용주리 659번지 터에 남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장청(將廳)은 용주리 665-2 번지에, 화약고는 용주리 665 665-5에, 군기고는 용주리 667 번지에, 사령청(使令廳)은 용주리 668번지에 있었다고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나. 돌산이란 땅이름
화양면 용주리를 조선 성종때까지 정확히 돌산(突山)이라 표기하고 있고 그렇게 부르다가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때 내례를 내례포로 돌산을 돌산포라고 하라는 명을 받은 후부터 돌산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돌산과의 땅이름은 앞으로 자세히 연구가 되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기록에 의하면 화양면 용주리를 돌산 또는 돌산포라고 하였고, 현재 돌산읍은 돌산도 또는 방답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백제시대에 있었던 돌산현의 위치도 지금까지 알고있는 돌산읍이 아니라 화양면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 중 지명을 보면 섬에 설치되어 있는 현(縣)은 섬이라고 표기를 하고(예 : 珍島縣 海島也) 있다. 그러나 돌산현은 그냥 돌산현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돌산현을 섬이 아니라 육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근거는 소라면 관기리의 관기(官基)라는 지명이다. 관기는 우리말로 관 터 즉 “관청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며, 관기 마을 앞 옛날 바닷가였던 곳에 사또방죽이라고 불리우는 둑이 있다. 여수의 현청의 치소가 현재 석창이었다면, 돌산현 치소의 위치는 관기와 사또방죽이라는 지명을 보아 관기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돌산현의 위치는 화양반도와 돌산도를 포함한 주변의 섬들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본다.
아울러 고진(古鎭)이란 땅이름은 돌산포만호진의 폐진 후 광해군 때 옛날 돌산포만호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古돌산진을 다시 설진한 후 고돌산진이라 불리던 것이 돌산이 탈락되어 고진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고돌산진의 성안을 고내라 하고 성밖을 고외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첫댓글 고진 살면서 이렇게 유서깊고 전통이 있는곳인줄 몇명이나 알까? 그래서 고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고진 사람들은 역사적인 곳을 가꾸러 하지않으니....허허!조상이 땅을 치겠네!..
굴강이라고 거북선을 대피시킨곳을 메우고 그곳에다 주차장 및 족구장이나 만들고 있고 쓰발! 거기서족구나 하고 있는 봉을 비롯 박사장 그리고 인자됐다! 반성 좀 하자꾸나! 실제 구랑뚱(실제는 굴강)이라고 했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수박등의 실제 어원은 수복등(壽福登)이 진짜 어원이라고 생각하면 됨 이곳 수박등이 예전엔 풍수지리학상으로 명당이어서 이 곳에 묘를 쓸려고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마을에 어떻게 묘지를 쓸수 있다고 거칠게 항의하자 동네 유지분들 몇 명을 포섭 야간에 묘를 써서 현재까지 이르렀고 아마 이 묘지의 실제 주인들은 가문의 영광에 나오는 김씨(여수 한영고, 한영대학.진성여중,고)의 이사장의 조상묘임
가문에영광나오는 김씨 망했단다...! 얘전에 제사지내면 떡좀 얻어먹곤했는데...!
넘좋은글이네요 딱 들어오네 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