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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theqoo.net/square/2499403032
백제 25대왕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고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기에 큰 가치를 지님.
하지만 무령왕릉의 발굴 작업은 한국 고고학 사상 최고의 발견이자 최악의 발굴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음 (고고학 수업 들어본 덬들은 한번쯤은 다 들어봤을 것 같기도..)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에 거의 모두 발굴 (+도굴) 되었음
이미 도굴되어 보존 중이었던 백제 고분들..
1971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장마철을 앞두고 송산리 백제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고자 함
특히 6호분의 정비가 중요했는데, 6호분은 무덤방과 입구가 벽돌로 쌓아올려진 전축분이었고, 무덤방 네 면에 사신도가 있는 벽화고분이었기 때문임.
그렇게 배수로 공사를 시작하고..... 6호분 배수로를 주의해서 파다가 일하던 인부 분이 삽에 걸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됨.
김영일 (당시 공사 담당한 삼남건업 현장 소장님): 어? 이게 뭐야. 강돌*이 왜 여깄어.
강돌은 말그대로 강(물 속)에 있던 돌인데, 현장 인부분들은 강돌 = 무덤돌 = 죽은돌이라고 부르셨다고 함.
왜냐면 물가가 없는 육지에서 강돌을 쓰는 경우는 (옛날) 무덤을 지을때밖에 없었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김영일 소장님은 조심스럽게 땅을 파심.
소장님: 어? 전돌이다.
심상치않은 낌새는 사실이었음. 강돌에 이어 전돌(벽돌)을 발견하신거임.
삼남건업 김영일 소장님은 당장 가까운 사랑방다방으로 달려가 공주분관장실*에 연락을 함.
(*국립공주박물관 관장실)
"무덤.. 무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얼른 와보십쇼"
그래서 당시 공주분관장 김영배님이 오셨고, 공주분관장의 참관 아래 인부들은 땅을 파기 시작함.
그리고 이게 무덤이라는게 확실해짐. 그래서, 문화재관리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연락을 했고, 고고학자들이 속속들이 충남 공주로 내려가게 됨.
그렇게 조용히 발굴 작업을 시작하나 했는데.............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의 모 기자님이 국립중앙박물관을 돌아다니다가 관장실을 찾아감.
(항상 경복궁 안 문화공보부 본부와 문화재관리국 들른 다음에, 당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취재 거리가 있나 조사하시는 게 루틴인 분이셨음)
기자: ?? 관장님이 없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는데 관장님이 없는거임.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봄...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나도 모르는데...?'라고 했지만, 박물관의 다른 직원분께서
??: 관장님 공주에 내려가셔서 안계십니다.
라고 말을 함. 여기에서 기자의 촉이 발동한 한국일보 기자는 다시 문화재관리국장님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봄.
끈기에 지친 문화재관리국장님이 '아 송산리 고분 방수작업때문에 내려갔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고,
한국일보 기자님은 '관장이 공주까지 내려갈 정도면 공주에 무슨 큰 일이 있다...' 라고 생각하여 바로 촬영팀 한 명 대동하고 공주로 따라 내려감.
(그리고 발굴팀이랑 같은 여관에 묵음. 당시 발굴팀이 기자를 보고 엄청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음)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었던 김원룡 선생님은
첫 날 발굴 작업을 할 때에는 무덤 앞 부분만 드러내고, 나머지 발굴은 다음날하자고 상의를 하고 있었음.
이 때가 7월 7일임.
아까 기자님이 공주에 따라갔다고 하지 않았음?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는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무령왕릉 발굴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대서특필할 수 있었음.
기자님은 7월 7일 저녁에 공주에 도착했고, <무령왕릉 발견했다>라고 기사 쓴 게 7월 8일이었음.
그러면 발굴을 시작한 7월 7일 오후와 기사화된 7월 8일 아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비가 엄청 왔음. 그냥 가랑비도 아니고 완전히 폭우.
그래서 일각에서는 '왕의 릉을 파헤치려고 하니까 왕이 화난거다'라는 이야기도 돌았음.
당시 발굴팀 중에 한 분인 이호관님은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하시기도 했음.
오후~저녁에 무덤 앞부분을 파냈으니, 날씨가 맑았더라면 공사를 중지하고 다음날 계속해서 발굴작업하면 됨.
그런데 무덤 앞부분을 파냈는데, 비가 온다? 설상가상으로 배수도 안되어 있어서 전실(무덤 앞쪽)에 비가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었음.
그래서 7월 7일 밤 11시 30분까지 삼남건업 인부분들께서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배수로를 만들어서 전실에 비가 안 들어가게 작업하심.
(이 때 당시, 경찰들도 비오니까 다 집에 가고 유물팀도 여관에 가고.... 인부분들만 남아서 급하게 배수로를 팠었음)
7월 8일, 새벽 5시
발굴팀이 다시 현장에 돌아오자 날씨는 언제 비가 왔냐는듯 반짝반짝.
다시 발굴 작업을 시작하는데...
아까 무령왕릉 발견됐다는 기사가 7월 8일 아침 기사로 나왔다고 말했잖음..
7월 8일 아침에 기사가 나오려면 적어도 7월 7일 밤~7월 8일 새벽에는 기사를 보내야 한단말임?
7월 8일 새벽에 공주에서 거대한 왕릉 발굴했다는 기사가 쓰였다 -> 라는 소식을 들었으니 다른 언론사 + 지방지 기자들이 몰려 왔음.
기자들만? ㄴㄴㄴ
왕릉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도 엄청나게 몰려옴.
발굴작업을 해야되는데 기자들이 많이 오고
보고 있던 주민+인파들도 '빨리 발굴해라!'라고 소리쳤음. 이 때,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가 1만명으로 추정함.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는 반드시 위령제를 지냄.
이것이 고고학계의 관례임.
근데 이 때는 졸지에 공개 발굴이 되어버리니 위령제도 갑작스럽게, 조촐하게 지내게 됨.
(이것때문에 김원룡 선생님이 이후에도 무령왕께 죄송하다고 칼럼을 쓰기도..)
7월 8일 오후 4시, 취재진과 인파들이 빼곡히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발굴팀은 최초 20분간 무덤을 둘러봄.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이 '사마' (무령왕의 이름)라는 것을 알아내고 도굴이 하나도 안 된 찐 백제왕릉이라는 것을 알게됨.
20분간의 짧은 탐사 후
김원룡 선생님은 취재진들에게 '백제 무령왕릉입니다'라고 발표함.
그 발표에 취재진들은 흥분함. 이 때, 정말 많은 취재진과 인파들이 모였고
흥분한 취재진들이 발굴팀한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윽박을 지름
(심지어 중앙일보 문화부 모 기자는 문화재관리국장 뺨도 때림. 특종 자기한테 안 알려줬다고..)
그래서.. 한국 고고학 발굴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발굴 전 취재진들에게 사진촬영이 허용됨.
발굴 전 언론의 사진촬영? 우리나라 고고학 사상 무령왕릉이 처음이자 마지막임.
기자들은 발굴팀이 발굴하기도 전에 무덤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고, 그 과정에서 유물들이 훼손이 됨.
카메라를 서너 개씩 둘러멘 기자들은 어서 사진부터 찍게 해달라고 야단이다. 그래 입구에서 안쪽으로 한 신문사에 2분씩만 찍기로 약속했는데, 그것은 약속뿐이고 카메라를 대자 발을 뗄 줄 몰랐고, 안으로 마구 들어가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환장하여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김원룡, 「죽은 사람들과의 대화」, 『뿌리깊은 나무』, 1978, 2월호)
(다만 발굴단원 중 유일하게 이호관 선생님만이 기자들때문이 아니라 청동숟가락은 원래 부러져 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음)
하지만 무령왕릉이 최악의 발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지금이 시작임.
2시간동안 학예관들이 실측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김원룡 선생님을 필두로 한 발굴팀이 유물 발굴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로 회의를 하고 있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7월 9일 자정 무렵부터 7월 9일 아침 8시까지 졸속 발굴작업을 함.
7월 8일 오후 4시 30분 = 무령왕릉 20분 탐사 및 발표
7월 8일 오후 5시무렵 = 취재진 사진 촬영
7월 8일 저녁 8시 - 밤 10시 = 실측도 작성
7월 9일 자정 = 청자를 시작으로 유물 발굴 시작
7월 9일 아침 8시 = 발굴 완료
실측 이후로 약 12시간만에 끝난 발굴. 유물 수습 작업으로만 치면 8시간만에 끝난것임.
홀리몰리 과카몰리 ㄴㅇㄱ 지금으로서는 생각할수도 없는.... 이 때, 어떻게 발굴작업을 했냐면
큰 유물은 상자에 넣고
작은 유물은 쌀 가마니 자루에 넣어버림. 삽이랑 빗자루로 쓸어서 와르르.
철야 작업으로 내부 조사를 일단 마쳐야 했기 때문에 큰 유물만 대충 수거하고 나머지는 풀뿌리째 큰 삽으로 무덤 바닥에서부터 훑어내 자루에 쓸어 담은 것이다. 여러 달이 걸렸을 세심한 작업을 하룻밤 새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발굴단에 참여한 조유전 선생님의 말)
* 이 때, 삽은 공사장 삽이 아니고 꽃삽을 말함.
지금이라면 유물 수습 작업에만 최소 6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함.. 근데 이 작업을 8시간에 끝내버린거임...
김원룡 선생님은 이후
무령왕릉의 이름은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고, 무덤의 주위는 삽시간에 구경꾼과 경향(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신문기자들로 꽉 찼다. 우리 발굴대원들은 사람들이 더 모여들어서 수습이 곤란해지기 전에 철야 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철조망을 둘러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았어야 할 일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졸속 결론을 내린 것은 발굴 책임자로서 나의 일생 씻을 수 없는 큰 실책이었으며 대원 전부가 그리 생각하였더라도 내가 우겨서 무덤에 철망을 치고 몇 달이 걸려도 세심한 발굴조사를 해서 이 미증유의 대릉이 가지는 문화 정보를 샅샅이 얻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그렇게 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 너무 흥분하고 정신을 일어 고고학 발굴법의 ABC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1985년)
라고 말하며, 무령왕릉 발굴을 계속해서 후회하심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무령왕릉 발굴을 그렇게 해서는 안됐다고 후회하심.. 하지만 이 말에 대해서도 대체 사람이 많이 모인게 무슨 상관인가 -> 그래도 그렇게 발굴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비판은 존재함)
사실 고분 발굴 작업이라는 것이 유물만 수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장품의 매장 방법, 고분에 반영된 매장의식 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것을 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이제 무령왕릉을 통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아쉽게도 없음..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자들은 무령왕릉 발굴을 보고 '성공적인 발굴'이라고 칭찬을 했음.
대체 졸속 발굴을 보고 대체 왜..?
(당시 합동통신 문화부 기자님이었던 신찬균 기자님)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발굴같은 발굴이 없었다. 문화재 담당 기자라고 해도 제대로 된 발굴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없었고, 발굴을 그렇게 하는줄로만 알았다.
발굴다운 발굴을 본 적이 없어.. 기자들도 몰랐던 것...
하지만... 당시 발굴팀은 알고 있었고..
무령왕릉 발굴은 발굴 이후 나중에야 발굴팀을 총 지휘하신 김원룡 선생님이 참회의 칼럼을 기고한 이후에 최악의 발굴이었다는게 드러남.
무령왕릉 유물들은 유물을 서울로 반출하지 말라는 주민들의 반대 등등 그 이후로도 엄청난 논란의 중심이 되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굴 후 이듬해부터 대중들에게 개방을 했는데..
1990년대에 들어 무덤 내부에 전돌에 금이 가고, 누수가 되는 등 여러 현상들을 겪어 1997년 잠정 폐쇄했고, 이후 영구 폐쇄를 결정함.
(현재 송산리 고분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무령왕릉은 재현해놓은것)
하지만 이런 졸속 발굴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데
1. 삼국시대 고분 중 거의 유일하게, 만든 시기는 물론 매장 주인공까지 확실하게 밝혀짐
(무덤 주인공이 밝혀진 곳은 신라 흥덕왕릉, 태종무열왕릉 정도..)
2. 무령왕 사망 연대가 정확히 <삼국사기>와 일치해 <삼국사기>의 정확성이 입증됨
3. 무덤에서 외래품이 대량 출토되어 백제 대외 교류의 실상을 보여줌.
발굴 작업 속에서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정말 대단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음..
참고) 김태식, 『직설 무령왕릉』, 메디치미디어, 2016.
각종 신문기사.
문화유산채널 [무령왕릉 발굴 40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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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ㅠㅠㅠㅠㅠ 아이고 내가 다 아쉽다
한국사 배울때 진짜 거의 유일하게 이름 제대로 박혀있어서 정확하게 무덤주인 알 수 있는 무덤이라서 중요하게 배우는데 ㅠㅠㅠㅠ
존잼.....진짜 너무 아쉽다...역사적 내용들 더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ㅠㅠㅠ
열이 받네요..ㅠㅠ
어후 ㅠㅠ 엄청난 역사적가치가 있는데
너무안타깝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