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번 국도보다도 더 힘겹게 낙동정맥을 넘어가는 것은 기찻길이다.
산자락 사이를 다섯 번쯤 돌고 돌아야 그런 대로 직선의 철길 모양을 갖춘다.
그리고 돌고 도는 철길 끝인 흥전역에서 나한정역 구간은 열차의 앞뒤를 바꾸고서야 내려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스위치백 구간이다.
낙동정맥을 휘휘 돌며 고도를 낮추며 내려오던 철길은
흥전에 이르러 바위벼랑에 막혀 길을 낼 수 없으니 앞뒤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 스위치백이 백두대간과 동해바다를 아우르는 삼척을 풀어내는 첫번째 열쇠다.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삼척’의 두번째는 백호(白虎)서낭당이다.
당집은 앞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원덕읍 갈남마을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호랑이는 산신당(山神堂)에 모시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나라 바닷가 서낭당에서 호랑이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곳은 백호당 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당집은 상량기둥에 쓴 글자로 미루어 1895년이나 1955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나
백호당의 역사는 훨씬 오래 전이라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옛 이야기에는 호랑이가 흰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해서 백호서낭당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혹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바닷가에 웬 호랑이 ?
그 궁금증은 저 서녘을 두른 산줄기에서 풀린다.
스위치백을 말했던 낙동정맥의 남쪽 백병산 어름에서
바다로 뻗은 동쪽 산줄기를 따라 30㎞쯤 내려가면 그 끝이 바로 갈남마을이다.
그 옛날, 백두산 호랑이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한달음에 내달리던 시절이라면,
비린내나는 이 갈남마을까지 발바닥에 물 한번 적시지 않고 내려왔을 터.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심심하면 나타나는 호랑이가 얼마나 두려웠으랴.
또 어느 날 아침이면 지난밤에 누구네 집 아무개가 호환(虎患)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마을은 얼마나 흉흉했으랴.
그러니 어찌 그 두려운 호환을 막기 위해 호랑이를 모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여 이 일대 바닷가 마을엔 호랑이에 얽힌 옛 이야기가 수북하니 쌓였다.
호랑이가 이 마을을 세웠다는 둥, 바닷가에 동굴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이야기 따위가 수두룩하다.
또 해마다 설날 어름이면 꼭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백호당에 제를 올리는 마을 어른에게만 그 모습을 보였으며
제주는 호랑이를 만나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옛날 이야기다.
당집 안에는 ‘토지지신신위(土地之神神位)’라고 쓴 위패를 모신다.
이것에서도 백호당은 바다가 아닌 땅, 즉 산신을 모셨던 것.
그렇다고 갈남마을에 ‘산’만 있고 ‘바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백호당은 할아버지당이자 큰 당이다. 바닷가 마을 끝에는 ‘해당할머니’를 모시는 작은 당이 있다.
옛날엔 모르겠으나 요즘 할머니당은 당집을 짓지 않고,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있는 둔덕 아래 단만 마련해두고 있다.
제는 큰 당과 작은 당에서 함께 지내는데, 해마다 정월 보름날과 시월 첫 오일(午日)에 지낸다.
3년에 한번씩은 큰굿인 풍어제를 올렸다.
요즘은 제물로 돼지머리나 소머리를 쓰지만 옛날에는 개고기를 썼다고 전한다.
개고기 제물에 대해 마을사람들에게 물었더니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부정탈 소리하지도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호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가 개고기 아닌가.
어쩌면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 시대에 백호당의 전설은 하나둘씩 바닷물에 씻겨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호당 앞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남쪽 고개 하나를 넘으면 신남마을이다.
이곳에 백호당 보다도 더 특이한 서낭당이 있다.
처녀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다.
바다를 향해 낚시코처럼 휘어진 둔덕 끝 해신당(海神堂)에 모시는데,
처녀의 그림 옆에는 나무로 깎은 자지를 굴비 두름 엮듯 해서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500년 전의 이야기다. 먼 옛날 신남마을 처녀와 총각이 사랑을 했다.
어느 날 총각은 처녀를 데리고 앞바다 바위섬에 미역을 뜯으러 갔다.
바위섬엔 풍랑이 일어 처녀는 바다로 사라졌고, 총각은 혼자 마을로 돌아왔다.
그 뒤로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나가면 풍랑이 일었고,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원귀가 서린 바다가 노한 것이라며 처녀귀신을 시집 보내야 한다고 했다.
정성스럽게 나무를 깎아 ‘자지 두름’을 엮어 바치니 그토록 사납던 바다는 다시 잦아들었고 풍요로워졌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과 10월 첫째 말(馬)의 날에 제를 올린다.
자지를 깎는 나무는 꼭 해신당 옆에 자라는 향나무를 쓴다.
자지는 굵고 거무튀튀한 것, 하얗고 토실토실한 것, 빼빼 마르고 길쭉한 여려 모양의 것들이
열 개 미만의 홀수로 깎여져 왼새끼로 꼬은 새끼에 엮여져 바쳐진다.
▲ 풍어를 비는 해신당.
남근을 조각해서 제물로 바치는 원초적인 신앙의 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뒤 둔덕에 또 하나의 당집이 있는데, 500년 전 처음 이곳에 들어와 살았던 엄씨를 기린다고 한다.
갈남마을에서 산줄기에 들인 백호당을 더 위한다면, 섶너울에선 바닷가에 앉은 해신당을 더 섬긴다.
이렇게 맞대면시키며 엮어볼 수도 있다. 백호당이 ‘남자=산’이라면, 해신당은 ‘여자=바다’다.
두 마을은 겨우 1㎞쯤 떨어져 있다.
갈남에선 ‘호랑이=산’을 받들어 모시면서 삶을 이겨냈다면,
신남에서는 오히려 바다를 위해 ‘호랑이=남자(자지)’를 바쳤다고 거칠게 풀이할 수 있으리라.
산(남자)과 바다(여자)의 대비 또는 조화는 삼척게줄다리기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다. 삼척의 세번째 열쇠다.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데, 이 지방 사투리로 ‘기’줄다리기라고도 한다.
이 게줄다리기의 역사는
조선 현종 초기(1662년)에 제방과 저수지를 만들 때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삼척의 옛 책에 따르면, 입춘에 선농제(先農祭)를 지낼 때 오곡을 차리고 소를 잡아 제를 지낸 뒤
씨뿌리고 거두어들이는 놀이를 하고, 풍물패를 앞세워 거리로 나가 봄을 맞이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선농제가 지나면 먼저 어린이들이 북이나 꽹과리를 두드리며 게줄다리기를 했다.
이를 ‘솔닥기줄’이나 ‘속닥기줄’이라 한다.
‘솔닥’은 요즘의 ‘쏙닥거리다’나 ‘쏙달거리다’에서 어원을 찾기도 하고,
광산에서 작은 굴을 ‘솔닥굴’이라 하듯 너르지 않은 작은 줄을 뜻한다.
아무튼 쏙닥거리듯 큰 소리 내지 않고 겨루던 줄다리기놀이였던 셈이다.
이 줄이 커지는 정월 7, 8일쯤이면 청소년들이 하는 ‘줄기줄놀이’로 번진다.
이것이 끝나고 마침내 보름날에 이르면 어른들이 본격적인 게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게줄은 그 큰 줄에 매달린 작은 줄이 마치 게의 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이 지방 바닷가 사람들은 대보름날을 맞으며 게를 문에 달아놓으면 잡귀가 물러간다고 믿었다.
하여 게줄다리기는 온 마을의 잡귀를 쫓아내는 놀이였다.
더불어 줄다리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땅을 밟아줌으로써 땅속의 잡신을 눌러주고 물리치는 지신밟기도 되었다.
바다의 게로 땅의 잡신을 막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게줄다리기에서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줄다리기의 뿌리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에 있으며,
농사에서 얻은 줄의 재료였던 짚이 바다의 게로 변신한다는 것도.
삼척게줄다리기는 오십천을 가운데에 두고
서북쪽(산간지방)은 옛 지명을 따 말곡(末谷)으로 남성을,
남동쪽(해안지방)은 부내(府內)로 여성을 상징한다.
이는 산자락 사람들은 남성신인 산신을 믿고, 바닷가 사람들은 여신인 해신을 모신다는 뜻이다.
하여 말곡이 이기면 농사에 풍년이 들고, 부내가 이기면 바다에 풍어가 든다는 믿음이 강했기에
게줄다리기는 어느 쪽에도 함부로 기울 수 없는 팽팽함 그 자체였다.
삼척의 산과 바다, 그 흔적을 좇다 보면 그것은 어느 쪽에 표나게 기울어지지 않는 음양의 조화였음을 새삼 느낀다.
더불어 바닷사람들도 돌아가야 할 곳은 땅이며 삶의, 생명의 뿌리가 땅(산)이었음을 어찌 모르랴.
삼척(三陟)에 ‘세 번 오르면서’ 산과 바다가 둘이 아님을, 그렇다고 하나도 아님 것들을 다시 내려다본다.
손바닥과 손등을. 하여 바다 밑에도 가라앉은 ‘산줄기’가 있음을, 저 바닷물도 저 높은 산줄기에서 비롯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