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장,
박민주는 많은 고심을 하고 있었다.
준세 어머니의 완강한 마음을 돌리게 하기엔 역부족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쑥 혜미를 찾아 만나면 혜미가 받을 충격이 얼마나 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니 무턱대고 혜미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것이 받을 충격이 마음을 쓰이게 하는 것이다.
혜미에게 있어서는 자신은 자식을 버린 엄마였다.
혜미가 자신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니 불쑥 혜미를 찾아가 만난다는 것이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박민주는 큰오빠가 너무 원망스럽다.
이제 큰오빠는 병원에서 퇴원을 해서 다시 회사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아버지께서 큰오빠가 저당설정을 한 본사건물을 당신의 재산을 내 놓으심으로 해서 해결을 해 주셨던 것이다.
술렁거리던 사주들이 이제는 잠잠해지면서 큰오빠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서 회장으로서의 직함을 승계를 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오빠의 모습이다.
큰오빠 박건주는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두 딸들을 사장직으로 올리고 아내를 중요한 요직으로 발령을 내어 가족들간에 그룹을 이끌어 나가는 체제로 바꾸고 있었다.
이제 아들이 없는 박건주는 딸들을 믿고 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오빠를 바라보면서 민주는 큰 한숨을 내 쉰다.
이제는 세상이 가족중심의 체제를 원하고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회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회사원 모두의 것임을 오빠는 인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전문 경영인의 체계로 나간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자식들에게 승계할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박민주는 오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어 번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바쁘다는 핑게로 가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들을 잃은 깊은 슬픔에서 모든 사람들과의 어떤 만남도 회피를 하던 오빠였다.
마치 세상을 다 살아온 사람처럼 모든 것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빠가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날이 지나고 나자 다시 현실을 받아드리고 나서 오빠는 전에 없이 더욱 기승을 부리
며 회사에 대한 애착이 커져만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민주는 오빠에 대한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허나,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지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박민주는 다시 오빠를 만나고자 전화를 한다.
생각보다 우렁찬 음성의 오빠였다.
"요즘은 건강이 어떠세요?"
"왜?
내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기라도 할까봐 그러냐?"
"걱정이 되어 전화 안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너희들은 내가 아주 일어나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냐?"
"오빠!
이젠 제발 그런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아무리 미워도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건강이 허락하신다면 술이라도 대접해 드릴까 하고 연락을 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행동으로 해라!"
"네!
오늘 저녁 시간을 비우세요.
오랜만에 오빠한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 드릴게요."
박건주는 흔쾌히 민주의 제안을 받아드린다.
그들은 조용하고 비싼 한정식 집에서 만난다.
"생각보다 좋아보이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민주는 오빠의 모습이 그다지 상한 것 같지 않아 안심이 된다.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일이 닥쳐도 결코 이 박건주를 쓰러트리지 못한다."
"네!
그러셔야지요."
서너순배의 술잔이 오고간다.
"사업은 어떠냐?
이제는 아주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몸에 밴 듯하구나!"
"네!
이젠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래!
이제 지난 모든 것들을 잊고 그렇게 사업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박건주는 흐뭇한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본다.
"오빠!
내 딸만은 데려오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가 없어요."
"안 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준세씨와 다시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 배속으로 난 내 자식을 찾고 싶다는 마음 뿐이에요."
"그래서는 안 된다.
이미 그 아이는 네 자식이 아니다."
박건주는 완강하게 민주의 말을 반대한다.
"부모와 자식의 천륜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어요.
이제 남은 일은 내 자식을 찾아서 데리고 오는 길입니다.
그쪽에 사정을 해서 정 안 된다면 법적으로 재판을 하겠어요."
"재판?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라.
재판을 한다고 네가 승소를 할 수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낳은 내 자식인데 왜 안 된다는 거죠?"
"이미 지나간 모든 일들을 잊고 너도 이젠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냐?"
박건주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며 말을 한다.
"왜요?
오빠가 저를 또 다시 결혼을 시키고 싶으세요?"
"오래비가 되서 못할 것도 없지 않니?"
"아니죠!
이제는 제 인생에 끼어들게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자식을 찾아 데려오든 혼자 살아가던 일체 관섭하지 마세요."
민주는 차갑고 냉정하게 잘라서 말을 한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직도 앞길이 창창하고 아름다운 네가 혼자 살아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내가 네 오래비로서 어떻게 네 삶을 모른 척 할 수가 있냐?
그러지 않아도 어디 좋은 사람이 없나 물색중이다."
"오늘 오빠를 잘못 만난 것 같네요.
이런 말들을 하려고 오빠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오빠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동안 제가 조금은 소홀했다는 마음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어 만났는데 이런 말들이 오가면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박민주는 오빠를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 매몰차게 말을 한다.
"이젠 이 오빠도 너를 위하고 너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다.
아직도 젊고 아름다운 네가 이미 버린 자식을 찾아 뭐하겠니?"
"버리긴요?
그 아이를 제가 버렸다는 것입니까?
빼앗긴 제 아이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오빠로 인해 빼앗긴 제 딸을 찾아오겠다는 말입니다."
"강준세란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네!
알고 있고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과 그 어머니가 우리 집안이라면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누가 뭐라고 하던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끊어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박건주는 민주의 말에 더 이상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절대로 민주의 생각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 아이는 민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었다.
그들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식사를 끝내고 나선다.
그리고 제 각각의 승용차를 타고 떠난다.
박민주는 생각할 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잘 알면서도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큰오빠의 횡포에 몸서리가 처진다.
자신의 아픔만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었고 타인이나 형제간의 아픔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오빠의 그 이기심에 진저리가 난다.
무언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오빠를 만났던 자신이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다.
이제 박민주는 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결심을 하면서 딸 혜미를 만나고 싶다는 강한 집착을 가진다.
이미 먼 발치에서 딸 혜미를 두어 번 보았던 것이다.
뛰어가 안아주고 싶고 엄마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알면 혜미는 자신을 따라줄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든다.
다른 아이들이 다 있는 엄마가 없다는 것이 혜미에게 가장 큰 슬픔이었으리라.
이렇게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면 혜미는 자신의 품속으로 안겨들 것이라는 환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는
민주로서는 혜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주는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혜미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학교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교문을 향해서 나오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멀리서 혜미의 모습이 보인다.
많은 아이들 틈에서 유난히 키가 크고 돋보이는 혜미였다.
친구들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혜미의 모습이다.
그런 혜미를 바라보는 민주의 가슴을 터질 것만 같다.
자신이 낳은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민주는 차에서 내려 혜미가 있는 곳으로 간다.
"혜미야!"
민주의 음성을 들었는지 혜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민주를 본다.
"너희들 먼저 가!"
혜미는 친구들을 의식했는지 친구들을 먼저 보낸다.
친구들이 민주와 혜미를 번갈아 보면서 멀어져 간다.
"혜미야!"
다른 아이들이 멀어져 가자 민주는 다시 혜미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누군지 알지?"
"....................."
"혜미야!
엄마다."
"....................."
혜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민주를 바라본다.
"엄마야!
우리 혜미를 낳은 엄마란다."
"제겐 엄마가 없습니다.
저를 낳아주셨는지는 몰라도 전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엄마라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혜미는 몸을 획 돌려 발걸음을 옮긴다.
"혜미야!
아냐, 그것은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절대로 어느 한 순간도 너를 버린 적이 없다."
민주는 혜미의 앞을 막아선다.
혜미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민주를 바라본다.
"혜미야!
엄마 말 좀 들어봐! 응?"
"듣고 싶은 말도 들은 말도 없어요.
제겐 할머니와 아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원치 않아요.
저는 강준세의 딸로서만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 혜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어간다.
박민주는 그런 혜미의 뒤를 따라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글: 일향 이봉우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