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끝내준다. 전라도 사투리를 보태면 ‘허벌나게(?) 좋은 날씨’다. 애인이나 여사친이라도 있으면 무작정 불러내 밖으로 나가고 싶다. 2주 후 카페 모임 때도 이처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어제는 9시도 되기 전 초저녁에 눈이 깔깔해서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한 시간 이상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전혀 연락이 없던 고등학교 친구의 전화를 받은 탓이다. 마지막 만남이 언제였을까, 10년도 더 되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설친 잠 탓인지 일어나기 싫어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찬물과 간단한 체조로 몸을 깨운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서늘한 새벽공기의 느낌이 가라앉은 기분을 일으켜 세운다. 평소보다 30분가량 늦은 다섯 시 반. 이 시각 1,400여 가구의 아파트 단지 주인은 나 혼자다. 살아있다는 존재의 환희를 만끽하는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석가탄신일 공휴일이라는 생각에 잠깐의 망설임이 스친다.
지난 일요일처럼 차로 10분 거리인 ‘망마경기장’에 가서 육상 트랙을 뛸까, 아니면, 차를 가지고 해변 큰길까지 내려가서 해변을 뛸까? 망설이다가 그냥 해변까지 걸어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중요하다는 방송을 보고 나갔던 ‘여수시 어르신문화체육센터’ 헬스장 포기하고, 새벽에 조깅하는 옛날 방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선 공공기관이라 아침 9시에 문 여는 게 가장 싫었고, 무료라서 그런지 인근 아파트 노인들 놀이터로 전락해서 공공질서나 예절이 무시되는 상황이 짜증났다.
새벽 편한 시간에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건 조깅뿐이다. 근육운동은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팔굽혀펴기면 충분하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지, 육체미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잖은가. 지난 일요일에는 새벽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그치기를 기다려 물구덩이가 없는 경기장에 갔었다. 400미터 정규 육상 트랙 스무 바퀴 뛰고 숨은 턱에 받혔으나 만족감은 최고였다. ㎞당 6분대로 8㎞를 쉼 없이 달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문득, 5개월 전쯤 어떤 사람이 보냈던 카톡이 떠오른다. ‘장 아무개’라는 인간과 ‘역이민카페’를 망하게 하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던가. 이 카페를 망하게 하려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연락하여, 설득하고 회유해서 회원을 빼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아직 이렇게 건강한 내 인생은 어떻게 망친다는 걸까? 마피아라도 고용하겠다는 말일까?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독함과 비뚤어짐에 대한 생각이 새벽의 서늘한 공기에 한기를 더한다.
헬스를 포기하고 옛 습관으로 돌아오는 데 두 달 걸렸다.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 깨작거리다가 늦게 일어나서 늦은 아침이나 오후에도 뛰었다. 이달 중순 두 달이 되면서 깨거나 뛰려고 나가는 시간이 거의 일정해졌다. 매일 한다고 달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4㎞부터 힘들기 시작해서 6㎞를 지나면 땀도 나고 숨이 가빠져 거의 포기 수준이 된다. 그 고비만 넘기면 조금 쉬워진다. 8㎞를 넘어 10㎞까지 뛸 수도 있다. 오늘은 걷는 것 포함 9㎞를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다. 중간쯤 어떤 회사 사택의 경비실을 지나야 한다. 며칠 전인가, 경비가 꼿꼿한 자세로 거수경례하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 6시 무렵에 나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에게 목을 숙여 답례했다. 근시인 내가 안경 없이 그 사람의 표정까지 볼 수는 없으나, 나이는 많지 않아 보이고 경례 자세가 완전 FM이었다. 예비역 오대 장성(병장) 출신으로, 상병 말년에 위병소 근무까지 해서 거수경례만큼은 완벽한 나다. 거수경례는 어깨부터 팔꿈치는 수평이 되어야 하고, 팔꿈치부터 손끝까지는 일직선이 되어야 한다. 그 경비의 경례가 그랬다.
오늘은 경비가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치려는데 경비실 안에서 앉은 자세로 경례하는 그가 보였다. 민간인이 거수경례로 답할 수 없어서 머리 숙여 답례했다. 그가 보내는 거수경례는 무슨 뜻일까? 매일 새벽 비슷한 시간에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길을 오르는 머리 허연 젊은 노인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일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내 인생을 망치겠다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면 충분하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10년 이상 사귀면서 온갖 위선적 감언이설로 환심을 사놓고, 열 번을 죽었다 깨도 이해할 수 없는 x같은 글로 시비를 걸어, 모멸하고 헐뜯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생면부지의 지나가는 사람에게 거수경례로 존경을 표하는 젊은이도 있으니까 말이다.
<후기>
“야, 우리 50년 지기 아니냐?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여서 술 한잔하자는데 못 온단 말이냐?”
“그래 안 간다. 주중이면 몰라도 주말에는 기차표도 없고, 서울 갔다 오려면 시간도 그렇고 안 간다.”
“그래도 네가 빠지면 되냐? 항상 네가 중심이었잖아. 똑똑한 놈이 왜 그러냐?”
어제 고등학교 친구와의 통화입니다.
친구와 친한 정도를 1(서먹한 사이)에서 10(형제보다 가까운 사이)까지 구분한다면, 그 친구는 8이나 9에 해당합니다. 열여섯 살에 만났으니 50년 지기도 넘습니다만,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이민으로 떨어져 살면서 멀어졌고, 10인 절친과 문제가 생기면서 오래 안 만나다 보니, 친구들과의 만남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건드릴 뿐입니다.
“너는 괜찮아. 나중에 서울 가면 전화할게. 그때 만나서 이야기하자. 더 말하지 마. 야, 회상하기도 싫어. 참, 전화한 김에 부탁이나 하자. 이번에 OO 만나면 대신 부조나 해줘라. 네 계좌로 보내줄게.”
“그건 네가 직접 보내. 너도 카톡으로 부고 받았잖아. 부고에 OO 계좌번호 있어.”
정말 그랬습니다. 카톡으로 온 부고장을 클릭했더니 부조금용 계좌번호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하하. 고등학교 친구들 11명 중 둘은 이미 죽었고, 하나는 70년대 중반 남미에 이민해서 소식이 끊겼고, 둘은 미국 이민(추조 포함), 여섯 명이 한국에 삽니다. 그중 마지막으로 2주 전 부친상을 당한 친구에게 부고장을 카톡으로 받았는데, 상 당한 친구가 만든 모임에 참석하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정말 오늘 날씨는 끝내줍니다. 오호, 통재라! 이런 날에 어두컴컴한 방에서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고 있으니!!!
▼ 오늘 아침에 만난 해돋이
첫댓글 멀리서나마 추조님께 마음으로부터 거수경례를 보냅니다.
존경과 부러움을 담아...
낮에는 너무더워서 요사히 골프를 2주 동안 쉬고 오늘 수요일이라 친구들하고 골프 예약
나도 뛰고 싶다 하는 생각 하지만 어제 잠깐 뛰려고 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올해는 꼭 여수 다시 가보고 싶네요 2012년도 다녀왔으니 추조님의 사진을 보니 더욱더
Pls try.
연습만이 습관을 만듭니다.
독한말은 귀로 들은 사람보다 입으로 내뱉은 사람에게 데메지가 더 쎄다고 합니다. 강건 하신분 같은데 상채기난 마음 잘 다독이시고 계속 가시던길 잘 가시길 응원합니다!
건강챙기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것 같습니다. 디톡스님 말처럼 도둑 맞은 사람보다 도둑질 해간 사람의 마음이 더 불안하다고 들었습니다. 지나간 일들 마음에 두지 마시고 앞으로도 남들을 위해(총무님이시던가..?) 카페를 위해 봉사하시며 건강하고 평안하게 나날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며칠 있으면 이미 정이 들어버린 정읍으로 돌아갑니다.
조만간 뵙기를 희망합니다.
남의 인생과 카페를 망하게하는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정도라면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하찮은 인생인지 드러내 보인 것이니..
이제 그런 인사들은 카페에서 정리된 것으로 만족하시고 그런 저주엔 괘념치 마시길..
세상이 넓다지만 또 한편으론 모두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동네주민들..느긋이 그들의 행로를 지켜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