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았던 2014년 초에 썼던 글을, 현재의 시선으로 고쳐 써서 ‘다시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제목의 연작 시리즈 4편으로 올립니다. 1편은 조지 베일런트 박사의 저서 ‘Well Aging’이 소재고, 2편은 정신의학자 로버트 웰딩거 박사의 ‘The Good Life’가 소재였으며, 어제와 오늘은 행복을 이민과 연결해 본 글로, 다소 장황하고 긴 글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이민자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 ‘재미있는 지옥, 재미없는 천국’이다.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쳤을 정도로 크게 공감했던 반어법(反語法)의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런 반어법에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엘 고어’가 자신의 강연을 위주로 만든 영화다. 크게 공감한 그 말을 빗대어 정의하자면, 이민자들은 재미없는 천국을 찾아 재미있는 지옥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찾는 ‘천국(天國)’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천국을 과연 찾았을까?
“청룡부대로 월남전에 파견되어, 보급품을 담당하는 행정병으로 복무했어요. 그때 미군의 엄청난 규모의 물자에 정말 놀랐어요. 청구서만 작성하면 달라는 대로 물건을 다 내주는 거예요. 전쟁과는 무관한 재봉틀이나 냉장고도 그냥 내줘요. 그걸 보고 무슨 수를 쓰든지 미국에 가서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2012년 초에 미주중앙일보에 실린 내 기사를 보고, 시애틀에서 나를 만나러 제주에 왔던 L 선생에게 들었다. 그분이 본 천국은 ‘풍요’였다. 1960년대나 70년대, 혹은 80년대까지 이민자들이 생각한 천국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있었다. L 선생은 그 풍요를 좇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행 비행기에 주저 없이 몸을 실었다. 명분은 유학이었지만, 공부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의 전언에 따르면, 사기와 실패를 경험하기는 했어도 종국에는 시애틀 고급 주택가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선배, 희망 없는 한국에서 고달프게 살 바에는 이민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윗사람들 눈치나 보느라고 제시간에 퇴근도 못 하고, 부서 간 이권 다툼에 끼어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나 하고 말이야, 출퇴근 시간 교통지옥에, 날마다 매연과 공해에 시달리며 사느니, 차라리 이민해서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며 오붓하게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
40여 년 전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회사의 정원을 거닐며, 후배이자 동료인 K 군과 나눴던 대화다. 대학 3년 후배이자 똑똑하고 일 잘하기로 명성이 자자하던 K 과장은, 당시 붐을 이뤘던 뉴질랜드 이민을 내게 소개하며 동의를 구했다. 구시대적 사고방식으로, 직급이나 연배 같은 권위만 내세워 ‘까라면 까’라는 군대식으로 일을 지시하던 올드 타이머들 틈에서 우리 신세대(?)들의 합리적 사고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88 올림픽 이후부터 90년대 IMF 이전까지의 이민은 ‘풍요’보다는, 공해 없는 환경이나 교통지옥 없는 세상으로 ‘더 나은 삶’을 쫓아 이민을 떠났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떠난 6~70년대 이민자들과는 달리, 출장으로 해외에 나가볼 수 있는 괜찮은 직업도 있어서 미국이나 캐나다가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었고, 재산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자연환경과 같은 정서적 가치를 더 중요시했다.
배경과 목적이 달랐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같았다. 처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더 나은 삶 - ‘Better Life’를 찾아서 변화를 구했다는 점이다. 학교에 다녔던 6~70년대를 돌이켜보자. 당시 신문의 해외토픽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이혼’이나 ‘자살’ 같은 ‘도저히 이해 불가한 사건’들이 자주 오르내렸다.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이 하는 할리우드 배우들을 ‘금수만도 못한 것(?)들’로 치부했고, 먹을 것이 부족하지도 않은 잘 사는 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행위에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행복한 세상이었다. 이혼이나 자살 같은 단어는 사전에만 있는 줄 알았으며, 금성이나 화성같이 도달할 수 없는 먼 나라의 괴상망측한 일로만 여겼다. 부족한 것은 물질뿐이었기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세상에서 가장 크고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착각했다.
거지가 문밖에서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기꺼이 밥그릇을 들고 나가서 덜어주었고, 옆집에서 쌀이 떨어져 쌀을 꾸러 오면 주저 없이 쌀독을 열어주었다. 집에는 항상 엄마라고 부르는 신(神)이 있었고,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서 항상 먹을 것을 준비했다. 쌀이 없으면, 감자나 고구마라도 쪘고, 그것마저 없으면 밀기울로 만든 빵이나, 쑥으로 빚은 개떡을 만들었다. 시커먼 빵이든 꺼칠한 개떡이든 배만 부르면 자식은 만족했고, 자식이 먹는 걸 보는 엄마도 행복했다. 더 좋은 음식을 해주지 못하는 게 걸렸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했다는 표현은 차라리 진부하다. 농경사회 3천 년, 산업사회 2백 년을 합친 3천2백 년보다 최근 5~60년의 변화가 더 크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게다가, 한국은 선진국이 300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와 현대화를, 불과 6~70년 만에 달성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라다.
거지는 없어졌어도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이 생겼고, 쌀을 꾸려오는 이웃은 없어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저녁이 되어야 나타나는 일하는 엄마는 집에 없는 사람이 되었고, 엄마가 만들어주던 먹거리는 편의점에서 사 먹는 주전부리로 바뀌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뛰어가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노는 대신, 학원 차를 타고 가서 ‘Cat’, ‘Horse’, ‘Cow’, ‘Giraffe’ 같은 필요하지도 않은 단어를 외우거나, 피아노와 태권도를 배우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렇게 변한 세상에서 아빠와 엄마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자살한다. 이혼율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로, 베트남이나 라오스 같은 나라의 신문 해외토픽에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그들이 부러워하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풍요로운 세상에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차 한 대보다는 두 대가 더 편해서, 아빠 혼자 벌어도 괜찮았던 세상은 더 많은 풍요를 위해 엄마까지 벌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번 돈을 아이들에게 주어, 사 먹게 하면 되고, 학원에 보내서 혼자 시간을 보내게 하면 되었다.
판사는 검사나 변호사와 결혼하고, 교사들은 동료 교사들과 가정을 꾸린다. 세대 간, 계층 간 소통과 교류는 단절되고, ‘끼리끼리’ 문화가 사회를 지배한다. 아빠만 일하던 빈곤의 시절에는 두 가정이 그럭저럭 살았지만, 풍요의 시대에는 두 개의 직업으로 한 가정이 더 풍요로워진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가정은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직업은 한쪽으로 몰리고, 비정규직, 임시직, 일용직 역시 한쪽으로 쏠린다. ‘부익부, 빈익빈’은 갈수록 심해진다.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요, 자본주의와 지식 산업화 사회의 숙명이다.
해결책이 있을까? 복지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정부가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는 이유다. 어릴 때, 노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경받았다. 농경사회였던 탓이다. 언제 파종하고, 언제 김을 매고, 어떤 거름을 어떻게 주어야 소출이 느는지 경험 많은 노인들은 모르는 게 없었다. 배탈이 나면 무얼 먹어야 낫는지도 알았고, 집안 대소사는 어른들에게서 지혜를 구했다.
요즘 노인들은 아는 게 없다. 스마트 폰은커녕 컴퓨터 사용법도 몇 번이고 알려주었는데도 또 모른다. 초등학교 손주의 눈에 할아버지는 무식한 존재일 뿐이다.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은 제주 할머니들은 녀석들에게 줄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흔이 다 된 나이에도 밭에 나가 땡볕에서 밭을 맨다. 찡그리지 않은 녀석들의 환한 얼굴은 용돈을 쥐어 줄 때뿐이다. 아이들은 예전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물어야 했던 궁금한 것들을 컴퓨터와 인터넷에서 얻는다. 한국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40%가 빈곤 상태에 있다고 한다. 최근 10년 사이에 노인 자살률이 세배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노인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
복지 외에는 해결책이 안 보인다. ‘성장’만이 지상과제인 양 몰아붙여 선진국에 들어선 정부가 책임질 일이다. 그런 정부의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나락으로 추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빈곤 속의 행복’은 개인의 몫이지만, ‘풍요 속에 불행’은 그렇게 유도한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후기>
‘Better Life’를 찾아서 떠났던 이민에서 우리가 찾았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시에는 한국이 그냥 싫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군사정권 시절 만연했던 부정부패는 기대했던 YS 문민정부에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져서 기대한 만큼이나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세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이런 썩은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 하나로 용감무쌍(?)하게 이민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터진 IMF 사태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탁월한 선택(?)에 흐뭇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곳으로 돌아와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인생 최고의 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태어난 곳을 기어이 찾아가는 연어의 회귀본능일까요, 아무리 못났어도 부인할 수 없는 내 부모처럼 지랄 같아도 내 고국이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산천이기 때문일 겁니다.
묻고 싶습니다. Better Life를 위해 떠난 이민에서 얻고 싶었던 것을 다 가지셨나요? 삶(Life)을 더 좋게(Better)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질적인 풍요일까요? 아니면 정서적인 만족일까요?
첫댓글 현대 한국 이민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연구 논문처럼 잘 쓰여졌네요.
그리고 더 나은 삶은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
.마지막 구절 "연어의 회귀본능일까요."
구구절절 공감가는 글입니다.
영화 암살 의 배신자 이정재가 독립군 전지현의 총을 맞고죽어가기전 왜 ? 동지들을 배신했냐고 묻자.
몰랐으니까 그땐 조선이 독립할줄 몰랐었다는…
고국에 돌아와 만난 모든이들이 묻는 공통질문?
왜 이민갔어요?
몰랐으니까! 고국이 이렇게 뒤집어질줄 몰랐으니까.,
라고 앵무새마냥 뇌까리며 ㅎㅎㅎㅎㅎ
'......지랄 같아도 내 고국이요......' 빵 터졌네요.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가난이 싫어 외국으로 갔더니 그 풍요로움에
안도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죠. 50여년을 그렇게 살다가 돌아왔어도 고국은 고국이더라고요.
돌아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행복의 조건......역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