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유산
나는 꽃이야, 아무렴 꽃이고 말고. 그러나 내가 꽃이라면 왜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일까. 개망초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조바심이 났다.
개망초는 애써 웃고 있었다. 작은 얼굴 활짝 펴서 미소짓고 있었다. 날 좀 봐주세요. 누가 봐주지 않는다고 꽃이 꽃 아닐 리 없으련만, 누구의 관심도 얻을 수 없었던 초라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개망초는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자기가 꽃이란 걸 확인이라도 하듯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향기를 좀 더 넓고 멀리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길어 올려야했다. 영양분은 향기가 되어 날아가고 잎과 꽃은 늘 파리했다. 개망초는 지쳤다. 올려다 본 하늘엔 외따로이 구름 한 조각 흘러가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구나, 나는 개망초였구나! 개떡, 개꽃, 개복숭아, 개살구. 나는 개자가 붙은 개망초였구나!
개망초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았다. 게접스레 뻗어 올린 부스스한 가지마다 수없이 매달린 초라한 얼굴들. 논둑 밭둑 산기슭 풀 더미 사이에도, 무너져 내린 폐가의 빈 마당에도, 도시의 보도블록 작은 틈새, 버려진 주택가 공터에도, 누가 심지 않아도 지천으로 피는 꽃. 나는 개망초였다.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도 개망초였다. 아무도 몰래 피었다가, 속절없이 지고 마는 개망초였다.
소년은 햇빛이 두려웠다. 햇빛은 가려져 있던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밝음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햇빛 속으로 나설 날이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햇빛은 소년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직진만 하는 햇빛은 병석病席 깊은 곳까지는 들어 올 줄을 몰랐다. 햇빛은 그리우면서도 외면해야할 님이었다.
소년은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고 있었다. 세상에 대해 파겁破怯을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 할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평생 동안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다. 소년은 아버지보다 더 많이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돈이 있어 큰 병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소년은 아버지가 돈을 다 써버려 자기의 미래는 운명에 맡겨야만 했다. 생과 사와 꿈과 생시가 분간이 되지 않는 세월을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다 쓰고도 돌아가셨고, 소년은 쓸 돈이 없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남이 갖지 않은 이름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말했다. “개망초도 자세히 보니 예쁘네.” 개망초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꽃은 없었다. 소녀는 분명히 개망초라 하였다. 소녀는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한 양, 개망초의 얼굴을 살며시 손바닥에 감싸쥐고 향기를 맡았다. 소녀가 개망초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고 개망초가 소녀의 향기를 맡았다. 너무나 황홀한 향기였다. 어지러웠다. 짙은 안개가 몰려와 의식을 잡아먹었다. 한동안 아무생각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옆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 얼굴도 보았다. 노란 씨방은 태양처럼 빛나고 하얀 꽃잎은 백설처럼 눈부셨다. 작다는 것은 초라한 것이 아니었고, 많다는 것은 천한 것이 아니었다.
“개망초도 자세히 보니 예쁘네.” 소녀의 한마디는 인식의 경계선에 자리한 문이었다. 문 이쪽엔 절망과 원망과 어둠이 있었고, 문 저쪽엔 희망과 감사와 빛이 있었다. 개망초는 문을 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는 개망초도 꽃이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자기도 향기를 가진 꽃이었다. 개망초는 한갓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소년은 재산도 건강도 물려받지 못한 것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웃어주시는 모습은 기억의 갈피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근엄한 얼굴로 벌주고, 단정한 자세로 책 읽고, 핼쑥한 얼굴로 병석에 계시던 모습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아버지를 잊고 소년은 어른이 되어갔다.
소년은 늘그막에 글을 쓰게 되었다. 글 쓰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들만의 몫인 줄 알았다. 그런데도 소년은 글을 쓰고 있었다. 자기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년의 기억 속에 희미한 풍경이 아물아물 떠올랐다. 컴컴한 골방이었다. 병실보다 더 어두운 골방이었다. 심심했던 소년이 호롱불을 켜 들고 골방 문을 열었다. 그 문은 소년도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쌓아둔 골방의 물건들 대부분은 책이었다.
이야기책도 있고 역사책도 있었다. 곰팡내가 날듯 한 한문책들과 임어당이 어떻고 샤르트르가 어떻고 하는 철학책도 있었다. 크기와 두께가 각각인 수많은 책들이 안경 낀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귀기鬼氣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책들은 밑도배용이나 딱지의 재료로 쓰이고 보수동 뒷골목에서 형들의 학비가 되기도 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적도 없었고, 그 책들을 제대로 읽어 본 기억도 없었다. 다만 그 책에 대한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정체성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학문적 유전인자가 자신의 피 속에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일생을 통 털어 학교에 다닌 기간이 7년에 불과했던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음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아! 나에게도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것이 있었구나.”
소녀의 한 마디에 의해 개망초가, 골방의 기억을 통해 소년이, 비로소 찾아낸 자부심.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아닌, 정신 속으로 이어져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내게로, 나에게서 내 아들로 이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