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역법과 달력
달력이 왜 중요한가?
인간의 생활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 역사와 달력이다. 이 가운데서도 하늘의 천체의 운동을 살펴보고 예측하는 역은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법률이다. 그리고 이를 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곧 달력(almanac)이다.
전통시대의 달력과는 달리 21세기 현시대의 달력은 날짜와 요일을 알려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오늘날 달력이라고 하면 대개 1년 12개월의 날짜와 요일을 기록해 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시대 달력은 정치, 문화, 과학적으로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달력의 통일은 국가 통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다. 달력의 통일은 곧 시간과 도량형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달력을 국가 통치 질서와 관련지어 매우 중요시했다. 한국을 비롯한 전통시대 동아시아는 중국달력을 기준으로 했다. 이는 시간이 곧 치적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적 시간체제의 영향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국제적 표준시간은 서양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서양 주도의 시간 통일은 근대 이후 서양의 우위를 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의 통일은 과학적 우위와 함께 정치적 우위라는 함수 위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시간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수시력을 기반으로 한 일본의 조쿄레키(1729년). <출처: (CC BY-SA)Momotarou2012@Wikimedia>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중국적 시간체제를 형성하였으며, 한국은 중국의 시간체제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국가이다. 물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달력의 영향을 받았지만, 서양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과학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시헌력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은 시헌력 이전의 역법인 수시력을 태양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사용하였는데, 17세기에 조선이 시헌력을 수용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전통달력과 시간관념
조선 선조 12년에 인쇄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진년대통력. <문화재청>
역의 최소단위는 하루이다. 이 하루의 기점을 정하는 방법과 1일을 분할하는 방법을 시법이라고 한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그레고리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896년부터이다. 그 이전인 조선시대에 사용된 역은 대통력과 시헌력으로서 이들 역은 흔히 음력이라 불리는 태음태양력이다.
한국에서 대통력이 사용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인 1370년(공민왕 19)부터이다. 대통력은 명나라의 역에 따라 개력한 역으로서 이 역은 조선을 관통하여 1653년(효종 4)에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283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가 대통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원명 교체라는 정치적인 변수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대통력이 사용되기 전, 고려는 원나라 역인 수시력을 사용하였다. 대통력은 사실상 수시력과 거의 비슷한 역법이었으므로 대통력은 엄밀히 말해 개력이 아닌 왕조교체에 따른 역법의 개명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개력은 정치적인 이유가 개력의 가장 큰 이유였고, 때문에 날짜나 시각 변동 등 역법상의 갈등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시헌력은 상당 기간 동안 조선에서 사용된 역법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대통력에 이어서 1653년부터 사용한 시헌력은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양의 태양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조선에서 243년 동안 공식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음력으로 통칭되고 있는 시헌력은 그동안 사용되어 왔던 종래 중국역법과는 다른 서양역법을 기반으로 하는 역법이었다. 시헌력은 기존의 대통력과는 절기 계산법에서도 달랐고 날짜도 달랐으므로 대통력으로 개력할 당시와는 달리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시간질서 속에 편입되어야 하는 조선의 입장과 과학적으로 우수한 역법이라는 명분에 힘입어 공식력으로 채택되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군의 모습.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꾸는 큰 사건이었다.
공식력은 1896년에 다시 시헌력(음력)에서 태양력(양력)으로 바뀌었다. 조선은 개항을 기점으로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줄줄이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과 날짜가 다른 음력을 계속해서 사용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이 추진되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중국 중심의 시간질서에서 서양 중심의 시간 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삭망을 기준으로 한 한 달의 시간 단위
현존하는 조선시대 달력 즉 역서는 중국력과 매우 흡사하다. 조선시대는 달력을 책력 혹은 역서라고 불렀다. 오늘날과 달리 달력이 책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역서는 대통력이건 시헌력이건 1년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과 달의 위상 변화 즉 삭망을 기준으로 한 달을 정하는 것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 단위는 지구의 공전과 달의 자전을 기준으로 한 불변하는 자연의 주기이다. 숭정(崇禎) 10년 1637년 명나라에서 발간한 달력을 보면 달력의 표지가 당시 조선에서 발간한 달력과 동일하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달력은 중국 달력을 그대로 본받았다.
간지는 현재까지도 사용될 정도로 동양에서 매우 중요한 주기이다. Babelstonte@Wikimedia>
역서는 자연주기 외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대로 정해 놓은 인위적 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12개월의 구분과 60간지, 28수 등이다. 간지를 나날에 배당한 것을 일진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역서에는 날짜 아래에 간지를 배당하였으며, 간지로 1년의 날짜를 나타내었는데, 이는 중국 달력의 체제를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간체계는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것으로 특히 60간지의 생성은 목성과 토성이 같은 황경상에 거듭해서 돌아오는 주기가 60년에 가깝다는 천문학적 주기와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60년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주기가 인위적 시간 구분인 간지(干支)로 결합되어 역서에 사용되었다.
시간 인식과 달력의 제작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변화와 관찰은 매우 중요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왕의 제일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씨 뿌릴‘때’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에게는 ‘때’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고 고기를 잡을 때를 바로 아는 것이 살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지금도 흔히 우리는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흘러가는 시간이 모두 같지 않으며 어떤 일이든 가장 적절한 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간 활동에는 항상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간과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달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시간이나 날짜의 경과는 천체 운동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즉, 밤과 낮 그리고 달이 변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시간의 흐름을 손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달의 변화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계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시간의 척도로 받아들여져 왔다.
사실 태양과 달의 운행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달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달력이라 할 수 있는 천체력에는 별들의 운행까지 포함되어 있어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당시 달력의 기능이 실용적인 의미를 넘어 일식이나 월식의 예측은 물론이고 점성학적 해석까지 덧붙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사회의 천체력은 우리가 매일매일의 날짜를 알기 위해 사용하는 현대의 달력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까지도 서양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월대보름과 같은 명절은 여전히 음력을 기준으로 지낸다.
천체력이든 일반 달력이든 시간과 날짜의 기준을 정하는 데는 정치적 속성과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음력을 버리고 유럽식의 그레고리력인 양력을 사용했는데, 이는 음력이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음력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양력에 비해 훨씬 우리나라의 실정에 더 잘 맞고 정확한 달력이다. 밀려 들어오는 서양의 물결 앞에서 현실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지 결코 서양력이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서양력을 쓰기 시작하고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나 제삿날 등을 음력에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음력이 지닌 과학적인 힘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역법이란 집권자가 만든 일종의 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법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므로 권력자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또한 역법은 어떤 형태로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갖추어진 사회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역법은 정치적이고도 정서적인 측면이 모두 고려된 하나의 정책이었다.
역법에 따라 달력을 만들다
우리나라 역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의 역법이다. 중국의 ‘역법은 천체의 현상은 하늘의 뜻을 반영한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이나 달, 행성 등에 관한 천체 현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의 달력은 단순히 날짜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일종의 천문계산표였다. 따라서 역법은 실용적인 달력으로서는 물론이고,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정확해야만 했다.
천체 현상은 법칙을 가지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만히 변하는 것이므로, 역법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역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었다. 결국 천체의 변화에 따른 정확한 역법을 만들고자 하는 갈망은 역의 개정과 서양 역법의 수용으로까지 이어지게 했다.
1902년 관상소에서 펴낸 시헌역서인 대한광무육년세차임인명시력.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시헌력은 지금까지 음력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역이다. 시헌력은 역대 역법 중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하다. 시헌력이 사용되기 이전에도 중국 역법을 그대로 수용한 여러 가지 역법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주체적이고도 자주적으로 역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세종 때에 와서 칠정산내외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정치적이고도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중국력은 그대로 사용되었고, 중국이 시헌력을 사용하게 되자 우리나라도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헌력은 전통 역법과 다른 점이 많아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전통 역법에서는 24절기 간의 길이를 15.22일로 일정하게 나누었지만, 시헌력에서는 태양의 운동 속도에 맞추어 절 기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조정했다. 더욱이 시헌력은 서양이나 청나라의 오랑캐 문화의 일부라는 인상을 주어 정서적으로도 거부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시헌력의 과학성이 입증되면서 차츰 대중적인 역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헌력은 1896년 1월 1일에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 바꿔 사용할 때까지 공식적인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연호의 사용
조선시대 역서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표제명에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통력의 표제명을 검토해 보면, 임진왜란 시기인 1598년을 경계로 그 이전까지는 중국 연호가 없었고, 그 다음해부터 ‘대명만력(大明萬曆)’이라 하여 중국 연호가 사용되었다. 1598년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해로 중국 연호의 사용은 임진왜란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인시헌서. 해당 시헌력을 보면 당시 중국 청나라의 연호인 ‘광서(光緖)’가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 역서는 1598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직전까지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볼 때 1597년 이전 시기에는 역서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 대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편찬으로 조선은 처음으로 자국의 역서를 편찬할 수 있는 과학적 능력을 갖추었으며, 이후 이러한 역량은 역서 편찬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역서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은 시간체제뿐만 아니라 관념상으로도 중국적 시간체제 속에 편입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 역서에는 시간에 대한 두 개념, 즉 순환적 개념과 직선적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상서로운 시기를 택하고 싶은 소망과 계절과 해와 세대가 직선적으로 지나고 있는 자연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간지로 날짜를 헤아리는 것은 시간에 대한 순환적 개념을 강요했고 순서가 정해져 있는 육십갑자는 다른 계산법을 능가했다. 순환적 개념과 대립하는 직선적 개념에 따라 군주의 치세가 시작된 해부터 햇수를 매겼는데, 따라서 서양과 달리 동양 3국은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연호에 치세의 햇수를 사용하였다. 연호에 사용되는 해의 의미는 계속적으로 순환하고 지속하는 시간이 아닌, 특정한 순간이나 때를 의미한다. 이처럼 시간이란 정치·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글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 본다.
기획
실학박물관
출처 : http://blog.naver.com/moonhdu/220733220216
우리의 옛날 달력 이야기
전용훈 이학박사, 서울대 과학문화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용어를 엄밀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천체현상에 기초해서 계절, 날짜, 시간을 추산하는 것을 역(曆)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추산된 결과를 정리하여 묶어낸 것을 책력(冊曆)이라고 한다. 추산의 결과를 1년 단위로 나타낸 것은 연력, 한 달 단위로 나타낸 것은 달력, 하루 단위로 나타낸 것은 일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책력은 계산결과를 묶은 책이라는 뜻이니 그것을 다시 역서(曆書)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역사서에는 책력이라는 말과 함께 역서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요즘은 달력이 너무나 흔해서 그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잘 따져보지 않지만, 달력이 천체현상에 기초한 계산의 결과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당연히 달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천체현상을 계산해놓은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관청인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천문학자들이 천체현상을 계산하여 이 결과를 「역서」라는 이름의 책자로 매년 11월 중순에 발행한다. 그러면 달력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자료에 따라서 날짜와 요일을 배치하고 예쁜 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세련된 달력으로 인쇄한다.
보통의 달력에서는 양력날짜와 음력날짜, 요일, 공휴일 등 기본적인 것만 넣어서 인쇄하므로 자세한 천체현상의 정보가 필요 없지만, 천문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역서에는 태양과 달의 출몰시간, 천체들의 위치 등 정확한 천체운행의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흔한 달력 하나가 만들어지려면 엄청나게 정밀하고 방대한 과학적 데이터가 기본이 되야 하는 것이니 달력은 빙산의 일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옛날이라고 이런 이치가 달랐을 리 없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혹은 그보다 먼 옛날에도 달력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방식은 오늘날과 유사했다. 일단 천문관서에서 내년에 일어날 천체현상을 총망라하여 계산한 방대하고도 정밀한 데이터를 모은다. 그런 다음 이 방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일상에서 사용할 달력을 만든다. 달별로 날짜를 매기고 각 날짜마다 규칙에 따라 생활의 지침을 배당했다. 날짜 아래 칸에 ‘이사하기 좋은 날’, ‘집수리하기 좋은 날’과 같은 문구들을 써 넣는 것이다. 날짜를 표시할 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달별로 한 장의 종이에 모으고 일년치를 모두 묶어 책으로 만들었으므로 이를 달력, 혹은 책력이라 불렀다.
옛날에는 천문관서에서 천체운행의 정밀한 계산은 물론 이 자료에 기초해서 일상에서 쓸 달력까지도 만들었다는 점이 현재의 천문연구원의 업무와 다른 것 중의 하나이다. 현재 천문연구원이 천체현상을 계산하는 방법은 현대천문학적인 원리에 따른 것이다. 뉴턴의 중력이론과 천체역학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더욱 정밀하게 발전한 현대적인 천체역학 이론에 따라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산을 해낸다.
마찬가지로 옛날의 천문관서에서도 천체현상을 계산할 기반이론과 방법이 있었다. 다만 현대의 천체역학 이론은 만국공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일상의 달력을 만드는 자료가 되는 천체현상을 계산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론을 보통 역법(曆法)이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달력을 만드는 방법’쯤 된다. 또한 이 기반이론을 바꾸는 것을 ‘역법을 고친다는 뜻’으로 ‘개력(改曆)’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부터 명나라에서 들여온 대통력법을 적용하여 달력을 만들다가 효종 때부터는 서양천문학이론이 가미된 시헌력법을 적용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여기서 대통력법과 시헌력법은 기반이론을 가리키므로 ‘효종 때 대통력법에서 시헌력법으로 개력했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나라를 세우면 가장 정확한 달력을 백성들에게 반포해주는 것을 제왕의 임무로 여겨왔다. 국왕 자신이 하늘의 시간을 백성들에게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으니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 왕조가 들어 설 때마다 국왕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이 개발해낸 이론을 적용하여 천체운행을 계산해야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개력할 것을 주장하여 새로운 이론을 적용한 새로운 달력이 만들어지곤 했다. 심지어는 같은 왕조시대에도 새로운 이론을 자신이 개발했노라고 주장하여 새 역법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을 수입해 그 이론을 적용하여 국내에서 쓸 달력을 만들어왔다. 백제에서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서 만든 원가력법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서 만든 원가력법과 대연력법을, 발해에서는 당나라에서 만든 선명력법을, 고려에서는 당나라에서 만든 선명력법과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법을, 조선에서는 수시력과 명나라에서 만든 대통력법을,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에서 만든 시헌력법을 수입해 달력을 만들었다.
삼국시대의 기록은 너무나 소략하고 역법이 사용된 연대도 분명치 않아 정말로 역법을 사용하였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중국의 역법에 기초하여 국내에서 쓸 달력을 만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도 마찬가지로 국초부터 선명력법을 사용하여 달력을 만들다가 원나라에서 수시력법으로 개력하자 이 역법을 배워 와서 사용했다. 또한 조선에서도 고려 때 배워온 수시력과 새로이 명나라에서 수입한 대통력법을 참고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 깊은 천문학연구를 통해 수시력과 대통력에 모두 약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 역법의 장점을 취해 칠정산법을 새로 만든 것은 우리나라 역법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칠정산법이 새로운 역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달력을 만드는 기반이론을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수정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그것이 중국의 것을 대부분 모방한 것인지, 중국에서 나온 두 역법을 절충한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쓸 달력을 만들기 위한 기반이론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칠정산법에 따라 만든 달력도 대통력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것을 완전한 개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효종 때에는 오랫동안 사용해온 칠정산법을 다시 시헌력법으로 바꾸었다. 시헌력법은 서양의 예수회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전해준 서양천문학을 채용한 역법이었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이 역법을 쓰려고 할 때 서양식 역법을 쓴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역법은 천체현상의 계산에서 역대의 다른 역법보다 더 정확해 결국 채택되어 250년 정도 사용되었다. 1896년 고종 때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역법도 지금까지 써왔던 시헌력법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인조~효종 연간 시헌력의 수용 과정과 그 사상적 배경
중국 문화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 왕조에서는 일찍이 책력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사상적인 이념에 공감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농경 생활의 절기를 알리던 '관상수시(觀象授時)'는 유교를 지고의 가치로 삼는 군주국을 지향한 조선 왕조(1392-1896)에서 제왕의 임무로 특히 중시되었다.
예를 들어, 태조 연간(1392!1398)에 왕조 개창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 된 석각 천문도 ≪천상 열차 분야지도≫(1395)의 발문(發文)에는 "자고로 제왕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에는 천문과 시간의 관측만큼 우선적인 게 없다。요 임금께서 희화에게 명하시어 사시사철의 질서를 잡게 하시고, 순 임금이 선기옥형으로써 일월오성의 운행을 가지런히 하신 연유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늦출 수 없어서다(自古帝王,奉天之政,莫不以暦象授時爲先務堯命羲和而秩四時舜在磯衡而齊七政誠以敬天勤民爲不可緩也)"라는 문장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세종 연간(1418~1450)에는 천문학 연구를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조선 기준의 역법 ≪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을 구축했을 때의 이념도 '관상수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왕조의 책력은 중국 왕조의 지위 관계를 매년 확인하기 때문에 상징물이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또한 왕조의 정치·사회 사정에 따라 관계의 밀도 및 지속성은 변했지만 대체로 조선 왕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밑에서 에서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고 중국 왕조와 제도적 형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른바 책봉체제라는 이러한 국제 관계 하에서는 책봉 받은 나라가 중국 황제가 하사해주던 책력서를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았다.
조선 왕조는 1395년,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을 인정 받아 '조선국왕'이라고 새겨진 황금 옥새를 받음으로써 책봉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은 피책봉국인 조선이 매년 받아들여야 하는 책봉국의 정삭(正朔)으로 자리매김 한다.
역서는 원래 위정자가 하늘에서 받은 시간을 백성에게 수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피책봉국에서 역서를 받아 들이는 것은 군주와 신하의 책봉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조선은 공식적으로 피책봉국이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책력 제작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상유교 군주국이기 때문에 자국의 역서를 만들려고 오랫동안 시도했다. 북경과 한양은 보통 육로로 1개월 정도 걸리는 노정 때문에 전년의 동짓날 무렵에 배포되는 중국의 새해 역서를 조선의 역서뢰자관(曆書賚資官)이 가지고 돌아가면 새해에 가까워지고 만다.
이 때문에 조선이 전년의 동지 무렵에 새해 역서를 국내 배포하기 위해서는 매년 중국에서 하사해주는 역서와는 별도로 국내에서 역서를 만드는 지식과 행정 체제를 갖추어야했다. 조선은 고려 왕조(918~1392) 말기에 수입한 수시(授時) 역법과 대통 역법을 사용하여 독자적으로 국내에서 역서를 발행했다. 조선의 역서는 책봉 관계에서 받아 들여야 했던 정삭과 국내에서 스스로 제작해야 정삭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칠정산 내편≫이 완성 된 세종 시대에 거의 완전히 한양 기준의 자국 역서 발행한 바 있다. 책봉 관계에 배려해서 국내 발행한 역서에도 ≪대통력≫이라고 명명했었지만 이후 국내의 모든 역서는 ≪칠정산 내편≫ 에 따라 제작 된 것이었다. 조선은 ≪칠정산 내편≫ 이외에도 회회(回回, 아라비아) 역법 계산의 기준 거리를 고쳐 자국에 도입한 ≪칠정산 내편≫ , 일월식 계산에 뛰어난 ≪대통력≫과 ≪경오원력(庚午元曆)≫을 교식(交食) 계산의 비교 역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시헌력≫을 채택하고 나서는 ≪칠정산 내편≫, 중수한 ≪대통력≫을 교식 계산의 비교 역법으로 연용했다. ≪칠정산 내편≫은 200년 이상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제의 천상과 오차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역법 지식의 운용이나 역서 제작 발행에 한해서 말하면 조선이 ≪시헌력≫을 도입할 때까지 매우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1637년 청나라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며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었는데 청나라의 역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역서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대통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계산 수준도 조선의 그것보다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때문에 역서를 하사하는 책봉국이 바뀌었더라도 조선 국내의 역서 연용에 거의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1645년부터 서양 천문학에 기초한 ≪시헌력≫을 시행하면서부터 ≪칠정산 내편≫에 의한 조선의 역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조선의 역서는 자체적으로 제작한 정삭과 책봉국에서 하사해준 정삭이 원래 가지고 있던 양면성을 다시 표면화하게 되었다.
「병자호란」(1636~1637)에서 패배한 조선은 명나라와의 책봉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도록 강요 받았다. 이 관계를 책봉 체제라고 일컫지만, 중국 황제의 주변국 군주에게 '왕'의 작위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황제와 군주 사이에 군신 관계를 설정을 유지하며 그 관계에 다양한 의무를 부가했다. 그러나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의 피책봉국으로서의 지위를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 유교 군주국으로서 정치적, 문화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피책봉국은 책봉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중국에 완전히 종속하던 처지는 아니었고, 피책봉국이 즉시 주체성을을 잃어버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서에 관해서 말하면,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시헌력≫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칠정산 내편≫에 근거해 자국 역서를 제작·배포해 그대로 시행했다.
책봉을받은 그 해인 1637년 청나라의 역서가 도입 된 여부는 미확인이지만, 다음 해 1638년부터는 한 100부의 역서가 조선에 소개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청나라 태종은 1636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청,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고쳤다.
청나라에서 발간한 역서를 ≪인조실록≫ 등에서는 ≪시용통서(時用通書)≫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청나라의 천문관은 역법의 연용 능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서에서는 대부분의 계산이 ≪대통력≫의 방식에 따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칠정산 내편≫에 따른 조선이 제작한 역서에 비해 상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1639년 4월, 조선의 관상감(觀象監: 국립천문 기관, 서운관書雲觀라고도 부름)은 ≪시용통서≫가 조선 역서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양국 역서를 비교하여 청나라 측의 ≪대통력≫ 추산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밝혔다.
그 결과 조선은 봉외(封外)적으로는 청나라의 ≪시용통서≫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국내에서는 ≪칠정산≫에 따른 조선판 ≪대통력≫을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역서 작성 형식에는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조선은 이전부터 ≪대통력≫이라는 역서의 명칭과 간지(干支)만을 찍어서 발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1592~93)과 「정유재란」(1597~98) 당시에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낸준 뒤에는 '대명연호(大明年號)'를 병기했다. 책봉을 하는 측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부터 이전의 형식대로라면 역서에 '대청연호(大淸年號)'를 적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전쟁 전부터 높아지고 있었던 반청(反清) 의식 및 명나라에 대한 의리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이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에 볼 만한 북부 및 한양에서 가까운 지방에 배포한 역서에는 '대청연호'를 기록했는데 다른 곳에는 간지만을 기록했다.
현재 남아있는 1720년대 이후의 ≪시헌력≫을 살펴보면 거의 '대청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대청연호'를 기록하는 형식이 1710년대부터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청나라의 체제 안정과 함께 조선의 반청 의식도 엷아지면서 조-청 관계가 해빙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1645년 청나라는 천문학에 기반한 ≪시헌력≫을 채용했지만, 사실 그 역법 개혁은 명나라 말기 숭정 연간(1628~1644)부터 흠천감(欽天監)에 축적 된 ≪숭정 역법≫ 개혁의 성과에 의한 것이었다. 명나라 말기 제수이트(예수회( 선교사와 중국인의 협력에 의해 천문학이 도입되고, 이를 바탕으로 양력법의 개발을 수행하지만 여전히 양력법이 시행되지 않을 때에 명나라는 농민 기의군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청나라는 1644년 명나라의 흠천감 조직과 인력을 수용했고 그 결과 이듬해(1645) ≪시헌력≫이라는 역법 개혁으로 이어졌다.
조선에서도 숭정 연간의 역법 개혁 준비와 거기에 도입 된 천문학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이미 조선은 1631년 명나라에 파견한 사신단을 통해 숭정제의 역법 개혁 보고서라고 이를만한 ≪치력연기(治曆緣起)≫를 포함하여 ≪원경시(遠鏡諡)≫, ≪천문략(天文略)≫ 등의 한문으로 번역한 서양 천문학 서적을 입수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서양 천문학과 역법 개혁에 관심이 어느 정도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당시는 후금(청)이 조선과 명나라 인접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부터 조-명 양국 관계가 긴장 상태에 놓였었다.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의 통교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국내에서 명나라의 역법 개혁 상황에 대한 추가 정보가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법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잠시 높아지지 않았다.
조선의 역법 개혁에 관심이 본격적으로 진전된 것은 청나라에서 열린 역법 개혁의 과정과 천문학의 우수성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명나라에서 초빙한 제수이트 선교사들과 그들에 의한 역법 개혁 준비의 성과를 계승한 청나라의 역법 개혁 작업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청군에 연행되어 북경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조선의 소현세자(인조의 장남, 1612~1645)의 귀에 들어갔다. 1644년 9월부터 11월까지 약 70일 동안 제수이트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 교류하면서 소현세자는 서양 천문학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담 샬에게 ≪칠정산≫ 방식의 조선역서를 개정하고 싶다고 역법 개혁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에서 ≪칠정산≫이 무려 200여 년간 사용된 탓에 그 오차가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칠정산≫ 의 오차는 당시 조선에서 꽤 알려져 있으며, 특히 시간 기준이던 중성(中星)의 남중(南中) 시각은 조선 초기의 것에 비해 그 차이가 커진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담 샬의 서한에 따르면 소현 세자는 역법 개혁을 위해서 몇 명의 수행원들에게 아담 샬로부터 수학을 배우도록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현 세자는 역법 개혁을 완수 못한 채 1645년 1월 조선에 귀환한 직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청나라의 역법 개혁 직후 조선에서 역법 개혁의 필요성을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 한 것은 한흥일(韓興一, 1587~1651)이었다. 그는 인조의 차남 봉림 대군(효종, 1619~1659)에 수행원으로서 북경에 머무를 때 서양 천문학의 우수성과 ≪시헌력≫의 정확성을 목격했다. 그래서 북경에서 구한 역법서를 조정에 올려 역법 개혁 이론을 상주했다. 그는 원 제국 시절 곽수경(郭守敬)이 개수한 역서가 400여 년에 이르렀는데 당시 오차가 있어 이를 본 아담 샬이 역서를 알맞게 고쳤음을 알렸다. 그래서 한흥일은 ≪칠정산≫도 깊이 고찰하여 조선의 역법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인조에게 주청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관상수시'의 이념을 내세우며, 수시력(칠정산의 의미)은 오차가 증가해서 개수할 필요가 있는데, 때마침 ≪시헌력≫이 나왔으므로 역법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다고 여긴 인조는 한흥일의 상주를 받아들여 관상감에 역법 개혁을 검토하라고 명한다. 당시 관상감의 수장 인 김육(金育, 1580~1658) 역시 1645년 북경에 머므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법 개혁 과정과 시헌력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관상감의 검토 결과를 『칠정산의 차이』와 『서양식 역법의 정확성』으로 정리한 한흥일의 역법 개혁론에 찬동한다.
또한 김육은 한흥일이 베이징에서 가지고 돌아온 서적뿐만 ≪시헌력≫의 원리까지 이해하기 불가능하므로 연행(燕行)의 일원으로서 관상감을 파견하여 청나라 흠천감에서 그 원리를 학습하고 올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나중에 ≪시헌력≫은 이적(夷狄)의 역법이라는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믿는 거부감이 점차 증가하지만 적어도 역법 개혁 논의가 일어날 당초에서는 그러한 저항 의식이 표면화하지 않은 점에는 주목을 요한다. 처음 조선에 ≪시헌력≫ 역법 개혁 이론을 주장한 사람은 청나라에서 체류한 경험을 가지고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일하던 아담 샬의 활약과 ≪시헌력≫의 정확성을 충분히 인지한 후, ≪칠정산≫으로 빚어낸 오차의 문제점과 '관상수시'라는 유교적 제왕의 임무를 올려 역법 개혁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국가의 통치에서 정확한 역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새로운 역법 속에서 기묘하게 합치되는 부분이 있으니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해야 한다(新暦之中, 若有妙合處, 則當舍舊圖新)"고 말했다.
즉 ≪시헌력≫이 ≪대통력≫ 보다 정확하다면 옛 역서를 버리고 새로운 역서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선은 1646년부터 ≪시헌력≫과 연관된 도서 입수에 노력하고, 북경에 파견 된 사신단을 통해 당시 북경에 머무르던 조선인에게 돈을 주고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의 완본 구입을 도모했다. 조선이 언제 ≪서양신법역서≫의 완본을 입수했는지는 기록에 의해 확정 할 수는 없지만, ≪시헌력≫ 학습에 그 책의 입수가 불가결했기 때문에 아마 1647년에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서 입수에 노력하는 동안 청나라에서 ≪시헌력≫과 ≪칠정산≫에 따른 조선의 ≪대통력≫은 상당히 차이를 보여 마침내 1648년 양국의 역서는 절기(節氣)의 위치뿐만 아니라 윤달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아직 ≪시헌력≫ 지식을 습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의 ≪시헌력≫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법 개혁을 제기한 한흥일은 집의 제사에 ≪시헌력≫을 주로 사용했지만, 한편에서는 ≪시헌력≫의 정확성은 아직 확인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1648년 11월 역법 학습을 위해서 천문관 송인룡(宋仁龍)이 사신단 중 일원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신단에 대한 감시가 엄격했기 때문에 아담 샬에게 직접 배울 수 없었으며, 대신 산술서나 성도(星圖) 등의 자료를 입수했다. 그 후 1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천문관들이 얻은 내용은 태양의 행도(行道)를 계산하는 방법에 관련되는 정도의 지식이었다.
이어서 1649년 11월에 만들어진 1650년 ≪시헌력≫은 조선 역서와 심각한 차이가 있어 이것이 ≪시헌력≫ 학습을 1달간 앞당겼다.
두 역서에서는 절기 날짜가 다를뿐 아니라 조선 역서는 윤달이 윤 11월로 되어 있던 것이, 청나라 역서에는 윤달 자체가 없다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처럼 1645년부터 1650년까지 6년간 계속해서 청나라 ≪시헌력≫과 조선의 ≪대통력≫에 서로 차이점이 나타났다 때문에 ≪시헌력≫을 통한 역법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김육이 다시 역법 개혁을 건의하자 효종도 ≪시헌력≫에 관련된 심층 검토를 다시 관상감에 명령했다. 그리하여 관상감은 우수한 인재를 선발, 그에게 매일 목표를 부과하고 공부시킨 뒤 북경에 파견하는 계획을 입안했다. 그 계획을 따라서 김상범(金尙範)을 선정해 북경에 파견시켜 ≪시헌력≫에 대한 지식을 얻어왔다. 귀국 후 그는 자신의 지식을 다른 천문관들에게 전수하면서 1652년 3월에 마침내 ≪시헌력≫을 본뜬 다음해의 역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최초의 시헌 역서이다. 그러나 이 역서가 당시 청나라 역서와 일치하는지 여부를 비교·검토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653년의 국내 역서는 ≪대통력≫에서 시행했다가 이듬해의 1654년부터 정식으로 ≪시헌력≫을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에서는 1654년(효종 5)에 달력을 ≪시헌력≫으로 고쳐 전국에 배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제작한 ≪시헌력≫는 역법 지식의 총체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쓰이던 역서의 발간과 일식·월식의 예보(豫報)는 역법의 연용 수준을 보여주는 면이지만, 특히 일월 교식에는 달력 계산보다 더 복잡한 천문학적이고 수학적인 고안과 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역법 연용에 상당 수준을 요한다. 상용(常用) 역서와 거기에 수록된 정보에 의해 일과(日課) 역서와 칠정 역서 두 종류로 나뉜다. 일과 역서에는 달의 크기, 년·월·일의 간지, 절기 날짜와 시간 등의 계산 결과를 싣는 데 비해서 칠정 역서에는 다섯 행성의 위치 계산도 필요하기 때문에 역법 지식의 측면에서 보면 일과 역서보다 칠정역서가 더 고등한 산물이다.
조선에서는 1654년 당시 만들어진 역서를을 '단력(單暦)'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과 역서 중에서도 특히 단순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선 최초의 시헌 역서를 제작했다.
조선의 새로운 역서 제작에 성공한 김이범(金爾范)은 1653년에 오성계산법(五星計算法)의 습득을 위해 북경에 파견되었지만, 도중에 사망하고 말아서 그 계산법은 잠시 조선에 전해져지 않았다. 역법 개혁 당초 조선에서는 일식·월식 계산은 물론 다섯 행성의 연동도 ≪시헌력≫ 식으로 계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그 계산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역법 개혁에서 50~60년 뒤인 1700년대 초 무렵이었다.
1654년부터 조선에서 ≪시헌력≫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시헌력≫ 지식의 본령이라 할 ≪서양신법역서≫에 담긴 천문학은 이전의 역법 지식과는 전혀 달라서 단기간에 습득 할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다. 따라서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천문관들이 지닌 ≪시헌력≫ 지식은 짧은 기간으로 매년 역서를 만드는데 불과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에만 제한된 사항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자전 근거한 서양 우주론은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ios, 120~170),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한 행성 연동 이론 구면 삼각법(球面三角法)을 포함한 서양 수학 등은 조선의 천문학자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학자에게도 난해한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명·청 두 왕조에서도 역법 계산은 주로 제수이트 선교사가 담당하고 역법 계산 지식도 그들에게 전수 받고 있었다. 특히 조선은 피책봉국이었기 때문에 ≪시헌력≫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학습이 청나라에게 금지되었고, 청나라 흠천감의 제수이트 선교사 또는 중국인 천문학자의 지도 역시 공식적으로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역법 개혁 이후에 일어난 다양한 일어난 일 때문에 ≪시헌력≫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지지 않았고,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현종 연간(1660~1674)에 청나라에서 일어난 「강희역옥(康煕暦獄)」(1664~1665)의 경과, ≪시헌력≫ 폐지(1666)와 ≪대통력≫으로의 회귀(1667), ≪시헌력≫ 재시행(1670)의 흐름과 연동하여 조선도 같은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시헌력≫에 대한 신뢰감은 상당히 낮아졌다. 또한 조선에서는 ≪시헌력≫ 곁에 ≪칠정산≫에 따른 ≪시헌력≫를 제작, 이를 ≪시헌력≫과 함께하고 제사날과 길흉을 예측하는데 사용했다.
1663년부터는 경비(經費) 절약을 위해서 ≪대통력≫은 매년 단지 2부 밖에 제작되지 않았지만, 대통력≫은 여전히 비교적 역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시헌력≫의 시행에서 약 20년을 경과했지만, 거기에 근접하는 신뢰나 지식 습득의 의욕도 높아질 수는 없었다. 또한 1661년부터 1669년까지 총 3회나 상주 된 ≪시헌력≫ 폐지 건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시헌력≫에 대해서 저항 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또한 현종 연간에 명나라와의 의리나 중국 고대 제도 및 문물을 소중히 여는 '탈주론(奪周論)'이 대두하면서 ≪대통력≫을 중요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1684년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최명길의 손자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대통력≫을 ≪시헌력≫으로 고쳐 천문을 헤아리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역시 ≪시헌력≫에 대해서 지식 부족을 개탄하며 ≪시헌력≫의 연용 능력을 채택한 후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 대부분은 향상 시킬 수 없었다.
사정이 바뀐 것은 1700년대에 들어서였다. 1701년 관상감이 칠정 연동에 관련된 계산법을 습득하기 위해 천문관을 북경에 파견을 재차 건의하면서부터 비로소 역법 지식을 추구하는 시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중요한 계기는 ≪시헌력≫을 믿는 조선의 불완전한 지식으로 인해 1705년의 조선 역서의 11~12월의 대·소가 청나라의 그것과 다른 것이다.
관상감이 청나라로부터 입수한 『일전표(日躔表)』 등을 필사해 그것을 국내의 역서 제작에 이용하고 있었다. 필사시에는 책 여백에 '연근(年根, 연말)' 수식을 추가 기입했지만, 1705년에 '연근' 수식 작성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역서와 어긋남이 발생했다. '연근'은 계산하는 연도의 천정(天正) 동지 다음날 자정(子正) 최초 적에 태양이 동지로부터 떨어진 졸균(卒均) 행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은 태양의 졸균 위치를 기준으로 일대(日代) 치수를 1일 단위로 잘라 데 필요한 수식이었다.
'연근'의 차이를 원인으로 하는 양국 역서가 오류를 발견한 것은 6월의 일이었다. 때문에 조선 조정은 크고 작은 달을 청의 역서를 따라 시행하여 다시 만들라고 전국에 지시했다. 이 사건은 관상감이 중벌을 받을 정도의 비상 사태였지만, 이로 인해 조선 국내에서 더 깊은 역법 지식을 습득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직후 허원(許遠)이 북경에 파견되어 관상감원 하군석(何君錫)으로부터 지식을 학습한 후에도 하군석과의 서한 왕래를 통해 교식(交食)과 행성의 위치 계산 방법을 완전히 습득했다.
허원은 1710년 자신의 습득한 지식을 ≪현상신법세초류휘≫(玄象新法細草類彙, 이하 세초류휘)라는 한국 최초의 ≪시헌력≫ 계산의 설명서를 정리했다. 이러한 허원의 노력으로 조선에서는 하루 월식과 오성 연동의 계산을 실시 할 수 있게 되어, 1708년부터 시헌·칠정 역서가 본격적으로 발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허원은 1708년의 겨울에 역법 개혁의 먹(墨)을 고치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했으니 60년 생애에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당시의 역법 지식의 습득 성과를 말했다. 또한 그는 예전 200년 동안 역일교식(曆日交食)의 주석 오류가 가리워졌다가 순식간에 천행으로 들어맞게 되었다라며 ≪시헌력≫ 계산이 거의 전부가 된 것을 자부했다.
허원이 ≪세초류휘≫를 발간(1710)한 이후에는 습득하는 역법 지식도 계산 지식보다 천문관측 지식이 변해 있었다. 청나라는 강희 연간 이후, 변경 지역의 측량과 지도 제작 사업을 대규모로 실시했지만, 그 일환으로 1713년 조선의 위도(한양의 북극 출지도)를 측정하는 임무에서 흠천감 관원 하국주(河國柱)를 조선에 파견했다. 허원은 이 때 하국주로부터 천문관측 장비 및 관련 수학을 습득하고, 또한 조정도 『영대의상지(靈臺儀象志)』와 『황적정구(黃赤正求)』 등 관측 관련 서적을 인쇄하며 관측 기구를 제작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영대의상지』는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523~1588)의 저서에서 6종류의 관측 기구 제작과 그 구조, 기능, 사용법 등을 발혔고, 권말(卷末)에는항성(恆星) 출몰표 및 위치표도 수록한 책이다.
『황적정구』는 요하네스 테렌츠(Joannes Terrenz, 1576~1630)의 『황적거도표(黃赤距度表)』와 『정구승도표(正球升度表, 1630)』를 이 한권에 맞춘 책으로서, 황적도의 상호 좌표 애환(愛換) 수식을 싣고 있었다. 한편, 허원은 당시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삼각법거요(三角法擧要)』도 필사한 모양이다. 이러한 동향에서 보자면 조선에서는 ≪세초류휘≫의 출간 이후 역서 제작과 일월식 계산에 필요한 계산 지식 외에도 천체관측과 시간법 운용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주관적이지만 당시 조선에 도입 된 지식 내용의 변화를 보면, 조선의 역법 지식 운용의 단계적인 패턴을 간파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매년 역서를 작성하는 조력(造曆) 지식을 운용하는 단계로 거기에는 날짜, 절기, 달의 대소 등을 계산하는 지식이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1654년에 ≪시헌력≫을 채용함으로써 첫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월식과 오혹성운동의 계산보다 복잡한 계산법을 운용하는 단계이다. 1708년 칠정력의발간 이후 ≪세초류휘≫의 성립(1710)으로 조선은 시헌력 지식 운용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본지시간법의 운용 단계로서 여기에 관측 기구 제작을 시작으로 현지 시간 기준인 남중성의 관측, 그리고 관측에 따른 시간법의 시행이 포함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끝나면 이른바 양력법의 완전한 정착이 이뤄질 수 있다. 이러한 단계는 새 역법과 관련된 천문학을 이해하는 수준의 향상 과정으로 이 때 조선에서는 각각 순조롭게 진행된 것으로 사료된다.
≪세초류휘≫의 성립을 분기점으로 조선은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하자 곧이어 세 번째 단계의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언급했듯이 1713년 한양을 방문한 하국주로부터 관측 관련 지식을 전수 받은 허원은 1714년 겨울 다시 묵경으로 간다. 거기서 하국주로부터 역법 이론서와 함께 중간 별(中星) 관측에 관계된 중성의간평의(中星儀簡平儀) 등 기계를 구해왔다.
이어서 1718년 조선에서는 세 번째 단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동년 6월 중 성의(星儀)와 간평의(簡平儀)가 새롭게 제작되어 중간 별 관측도 이루어졌다.
참고로 중간 별 관측은 정확한 현지 시간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시헌력≫ 도입으로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었다고 해도, 시간법이 이전의 역법 그대로라면 예보 시간의 적중은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지방시 기준이 되는 계절별 남중 별을 새로 측정하고 시간도 ≪시헌력≫의 기준으로 통일 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시헌력≫으로 역법을 개혁한 이후에도 시간은 아직 ≪대통력≫을 기준으로 사용했다.
허원은 중국에서 배워 온 중간 별 관측법을 동료 천문관들에게 전수하면서 동시에 관측도 하고 ≪시헌력≫ 기준 시간법을 연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 드디어 1718년 6월부터 시간을 ≪시헌력≫시헌력 기준으로 맞춰 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718년 중간 별 관측과 시헌력 시각법의 성립은 조선이 달력의 계산과 역서의 제작에서 교식 예보와 칠정력 제작, 항성 관측과 시간법 운용에 이르기까지 ≪시헌력≫에 관련된 지식 전반을 연용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1654년 ≪시헌력≫ 채택에서 무려 약 60년 이상의 긴 노정을 걸었던 셈이다.
출처 : https://blog.naver.com/battlcar/221487743062
[연구논문] 숙종 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 을유년(1705) 역서 사건과 그에 대한 관상감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슬기 (서울대학교, friends1133@naver.com)
1. 서론
숙종 30년(1704) 12월 11일, 관상감(觀象監)은 이듬해 반포될 조선의 역서가 청력과 월의 대소 및 절기 날짜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 당시에는 계산 과정에 실수가 없다는 관상감의 해명으로 이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 후, 관상감이 숙종 31년(乙酉年, 1705)의 역서를 잘못 계산했음을 시인하자 그들의 역법 운용 실력에 대한 조정 관료들의 비판이 비등했다. 그에 따르면, 왕에게 올린 역서를 수정해야 하는 미증유의 일을 저지른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애초부터 형편없이 역법을 운용했고, 역서의 중차대함을 간과한 무책임한 사람들이었다.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산법에 능숙한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함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실력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천문학자 허원(許遠, 1662-?)이 숙종 31년(1705) 동지사행 편으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사실 효종 4년(1653) 개력 이래로 관상감의 역법 운용 실력은 불안정했는데, 이런 상황은 숙종 30년(1704) 12월에 발생한 ‘을유년 역서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해결되었다. 허원의 북경 파견 이후 시헌력에 대한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이해도가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시헌일과력(時憲日課曆)을 계산했고, 칠정력(七政曆) 또한 시헌력 체제에 따라 편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월식과 혼효중성(昏曉中星)의 계산도 시헌력을 토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천문학 운용을 뒷받침할 제도의 개선도 이루어졌다. 효종 연간 활동했던 김상범(金尙範, ?-1654)의 사망 이후 반세기 동안 없었던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이 재개되었고, 관상감의 역법 학습에 대한 국왕의 적극적인 지원도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 천문학에 대한 이제까지 연구에서 ‘을유년 역서 사건’은 천문학자 허원의 북경 파견을 통해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시헌력을 보다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로 언급되었다.[2] 전용훈과 임종태는 이 시기에 관상감 시헌력 운영 능력의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배경을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에서 찾았다.[3]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이전에 비해 우호적인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어려웠던 시헌력 지식 습득이 용이해졌고 조선의 역법 실력이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의는 분명 허원의 북경 파견 이후 조선 관상감의 시헌력 운용 능력이 향상될 수 있었던 한 가지 조건을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왜 허원이 북경에서 을유년 역서 문제의 해결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지식을 습득해 오려고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그 문제가 해결 된 이후에도 허원의 2차 북경 파견이 비교적 쉽게 성사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위의 두 의문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는 당시의 조선 조정 내에 시헌력 운용 실력 향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전제해야 한다. 청나라와의 관계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조선 내부에 시헌력 지식의 적극적 학습을 중요한 과제로 여길만한 이유가 없었다면 조선 정부가 허원으로 하여금 북경에 가서 당장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지식만을 구해오도록 하고 시헌력의 심화된 학습을 위한 2차 파견은 따로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조선의 시헌력 지식 확장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 호전 이외의 내적 동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만옥은 숙종 대의 천문 역산학의 정비가 경천근민 사상을 실현하고 유교적 이상 국가에 다가가기 위한 사업이었음을 들어 조선 내부에 적극적으로 천문학 지식을 습득 · 보충할 이념적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숙종 대 전반기의 혼천의 보수나 천문도 모각와 같은 천문학 관련 사업에서 숙종의 유교적 군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이념적 수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구만옥의 연구는 숙종 대 조정이 천문 역산학 정비에 힘을 기울이게 된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해 준다. 하지만 이념적 요인만으로는 이전 반세기 동안 중단되었던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이 을유년 역서 사건을 계기로 재개된 사실이 여전히 잘 설명되지 않는다. 요컨대, 조청 관계의 호전과 천문학의 이념적 기능에 대한 인식이라는 두 가지 요인만으로는 숙종 30년(1704)을 기점으로 천문학 지식의 비약적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던 동인을 충분히 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을유년 역서 사건’ 그 자체를 조명함으로써 조선 내부에 실제 어떤 이들이 시헌력 운용 실력 향상을 꾀했는지, 그들의 바람이 어떠한 과정을 겪으며 18세기 초에 실현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구체적으로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역법 지식을 학습해야 했던 관상감 천문학자들과 이들을 후원 및 관리 · 감독했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 남구만(南九萬, 1629-1711) 같은 양반 관료들이 어떤 목표를 설정했는지, 이를 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해 달성하려 했는지 등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역법 운용 능력의 향상을 이끌었던 이들의 활동을 드러냄으로써 국가나 조정이 아닌 실무자들의 차원에서 시헌력 학습을 위한 노력의 동인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 경우 18세기 초 시헌력 지식의 보충과 운용 실력 향상은 대청(對淸) 외교 관계의 변화나 유교적 군주의 이념과 같은 외교적 · 이념적 조건이 일부 양반 관료 및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지속적 노력 및 기획과 적절한 때 만나 이루어진 성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18세기 초 을유년 역서 사건을 중심 사례로 하여, 그동안 천문학 지식의 도입 및 운용에 수동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만 다루어졌던 관상감 천문학자의 역할과 서양 천문학 수용에 우호적이었던 최석정, 남구만 같은 양반 관료들의 활동에 주목하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조선 천문학이 겪은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18세기 초 조선 천문학의 발전은 단지 정치적 · 외교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새로운 역법 지식을 적극적으로 학습하고자 했던 관상감과 이들을 후원했던 일부 양반 관료들에 의해 17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준비되어 왔던 사업으로서 이들이 을유년 역서 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삼감의 천문학 운용 능력을 개선한 면이 있었음을 보일 것이다.
2. 17세기 후반 조선의 역법 운용 실태
18세기 초 관상감은 일과력(日課曆)과 칠정력(七政曆)을 모두 시헌력을 토대로 계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변화는 효종 4년(1653) 시헌력으로 개력한 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그동안 관상감은 시헌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과력을 산출했고 칠정력과 중성법은 아예 옛 방법, 즉 대통력(大統曆)에 근거하여 운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세기 동안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 및 운용이 지체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을 배워오기 시작한 17세기 중반부터 약 50년 동안 천문학을 둘러싼 조선 조정의 논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개력 당시의 역법 상의 문제들은 17세기 후반까지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적극적으로 역법을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일견 역법 학습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역법 학습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해서 역법 이해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1680년대 즈음, 남구만, 최석정 같은 양반 관료들은 관상감 관원들의 시헌력 학습을 위한 학문적 · 제도적으로 조직적인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준비는 이후 관상감 천문학자가 북경에서 시헌력을 학습해 올 수 있게 되는 동인 중 한 축으로 작용했다.
17세기 중후반 조선의 역법 운용은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실행되었다. 청나라가 입관 후 효종 5년(1644) 새로운 역법(시헌력)을 공식 역법으로 채택한 이후 조선의 역서가 청나라의 역서와 차이가 났기 때문에 역법 계산부터 역서 편찬에 이르는 절차를 모두 관장했던 관상감은 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선이 시헌력으로 개력한 때는 효종 4년(1653)으로, 그 이전까지는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인조 23년(1645)에 이미 개력을 마친 청나라의 역서와 조선에서 사용하는 역서는 서로 다른 역법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17세기 중 · 후반 조선의 왕들은 시헌력을 쉽사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역법을 배워올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4]
관상감이 시헌력을 운용할 수 있는 실력에까지 이르게 된 때는 효종 재위 초에 이르러서였다. 체계적으로 역법 훈련을 받은 천문학자가 북경에 파견되어 시헌력법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는 효종 원년(1650) 관상감 제조 여이징(呂爾徵)의 제안에 따른 조처였다. 그의 제안은 천문학자 가운데 총명한 다섯 명을 선발하여 시헌력법을 공부시키고, 그 중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자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이 제안에 따라 정9품 천문훈도 김상범이 적임자로 선발되었다.[5] 당시 관상감에 따르면, 그는 시헌력을 교습받은 사람들 중에서 시헌력의 일전 · 월리법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효종은 그가 조선인들에 대한 경계가 심한 북경에서 새 역법을 제대로 배워올 수 있도록 조처했는데, 우선 그의 직위를 종6품 천문학 교수로 승진시켰고, 북경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통역관을 붙여주었으며, 엄격한 문금 정책을 피해 필요한 서적을 구매해 올 수 있도록 경비도 마련해 주었다.[6]
효종 2년(1651) 겨울, 김상범은 북경에서 시헌력 운용에 필요한 지식들을 성공적으로 학습해 돌아왔다. 이후 그는 북경에서 배워온 내용을 관상감의 다른 천문학자들에게 전수했고, 이를 토대로 관상감 관원들이 시헌력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정한 준비를 거쳐 조선의 개력은 효종 4년(1653)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의 개력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시헌력의 태양과 달의 궤도 계산법인 일전월리법(日躔月離法)의 대강만을 이해한 상태에서 개력되었기 때문이다. 김상범이 배워온 일전월리법으로 월의 대소, 윤달의 위치, 절기 날짜 등을 포함한 시헌 일과력을 계산할 수는 있었지만, 일월 교식(交食) 및 오성의 위치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시헌 칠정력은 산출할 수 없었다.[7] 당시의 이런 상황에 대해 김상범 이후 반세기만에 북경에 파견되어 시헌력을 학습했던 천문학자 허원은 자신이 저술한 『현상신법 세초류휘(玄象新法細草類彙)』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에 우리 조정이 관상감 관원 첨지 김상범에게 명하여 다년간 북쪽에 가서 배우게 했지만, 그 방법 중 얻은 것은 일전과 월리의 대강뿐이었으며, 칠정 행도의 법과 일월 교식의 술법에 이르러서는 얻지 못했다. ... 그때 이후로 일전월리의 미진한 방법을 계속 사용해 왔다.[8]
17세기 중반의 관상감 천문학자들도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상범을 위시한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1차 북경 파견 때 미처 알아오지 못했던 일월 교식 및 칠정 행도 계산법을 학습하기 위해 천문학자를 다시 북경에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그들은 시헌력이 대통력에 비해 더 정확한 역법이라는 점을 적극 강조했다. 효종 3년(1652) 9월, 관상감은 지난 월식 관측 때 수성과 목성의 위치가 대통 칠정력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시헌 칠정력과는 부합했다는 점을 근거로 시헌 칠정력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9]
효종의 윤허에 따라 김상범의 파견이 두 번 더 있었지만 효종 대에는 시헌력의 완전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끝내 시헌 칠정력 학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마지막 사행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10] 김상범의 죽음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효종은 이전과 달리 북경에 파견할 천문학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도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17세기 중반 북경에 파견된 김상범의 목표였던 시헌 칠정력 계산법 학습이 결국 성공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그 결과 효종 4년 이래로 조선이 시헌력을 공식력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만 계산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렀다. 즉, 조선의 역서는 일과력은 시헌력으로, 칠정력은 대통력으로 제작 되었다.
김상범의 마지막 파견이 있었던 효종 4년 이후부터 허원이 북경에 파견된 숙종 31년(1705)까지 천문학자들이 북경에 파견되어 시헌력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역법 운용 실력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사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천문학자의 역법 학습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효종 5년(1654)부터 숙종 25년(1699)까지 약 50년 간 연대기 사료 중, 관상감의 역법 운용 문제를 지적한 사례는 단 두 차례만 발견된다. 그 중 하나가 현종 14년(1674), ‘관상감의 역법 운용 실력이 형편없으니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하여 배워오게 하자’는 당시 관상감 제조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제안이었다.[11] ‘관상감이 매번 청나라의 역서와 다른 값을 가진 역서를 발행하고 있으며 더욱이 시헌 칠정력은 아예 계산해 내지도 못한다’는 그의 지적은 효종 대 개력 당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20여 년이 지난 당시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민유중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관상감의 시헌력 운용 문제에 대한 두 번째 지적은 숙종 10년(1684) 승지 최석정이 제기했다. 10년 전 민유중의 지적처럼 그도 관상감이 청나라의 시헌 일과력을 겨우 모방할 수 있을 뿐이며, 시헌 칠정력은 아예 계산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대통력이 변하여 시헌력이 되었지만 관상감에서는 겨우 [시헌 일과력의] 추보를 모방할 수 있을 뿐이고, 칠정력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대통력의 규례에 의지하고 시헌력법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월의 대소와 윤월이 행용 삼력과 더불어 많이 다르고 매우 거칩니다. 관상감을 신칙하고 그들로 하여금 추산법을 학습하도록 하여 점차 [역법을] 닦아 밝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2]
그러나 천문학자를 청나라에 보내 그들의 역법을 학습해 오게 해야 한다는 민유중과 달리 최석정은 관상감 자체의 역법 학습을 우선 독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관상감의 역법 운용 실력에 대한 우려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말까지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이 역법을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는 않았다. 이는 사실상 관상감이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당시 정황으로 추측하건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념적 측면에서 병자호란과 명청 왕조 교체 직후 조선 양반 관료들의 반청 감정이 숭명 이념과 맞물려 상당히 고조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위시한 노론계 유학자들은 역서에 존주론적(尊周論的) 가치를 부여하며 조정의 시헌력 수용을 비판했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에 대한 조정의 지원을 위축시키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3] 이들은 1636년까지 명나라가 조선에 매년 반사했던 대통력만이 중화 국가인 명나라와 그 조공국 조선 사이의 정당한 관계를 표현하는 제도적 매개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명나라를 무력으로 찬탈하고 새로이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 청나라가 ‘오랑캐’ 서양인들의 술법을 토대로 편찬한 시헌력은 이상적인 세계 질서를 무너뜨린 역서로 비추어졌다.[14]
둘째, 지구설과 절기 배치법 등 서양 천문학의 ‘과학적’ 내용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비판도 조정의 지원을 약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김시진(金始振, 1618-1667)은 전통 우주관에 입각하여 지구 관념을 전제한 서양 천문학을 비판했다. 그는 효종 3년 시헌력이 절기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일 년의 길이가 전통 역법과 다르다고 비판하며 당시 추진 중이던 조정의 시헌력 수용을 반대했다. 안동의 선비 송형구(宋亨久, 1598-1675)도 현종 1년(1660)부터 현종 10년(1669)까지 시헌력의 절기 배치법인 정기법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를 세 차례 올려 시헌력 수용에 적극 반대했다.[15] 시헌력의 정기법이 절기를 결정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송형구의 비판은 현종 1년 조정에 일부 수용되기도 했다. 당시 시헌력 운용에 자신이 없던 관상감은 송형구의 상소문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시헌력과 대통력을 함께 인출하자는 절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은 시헌력을 사용하면서도 그와 함께 대통력 2부를 상징적 차원에서 편찬하게 되었다.[16]
셋째, 1664-1669년 청나라에서 발생한 소위 ‘강희 역옥(康熙曆獄)’ 사건도 시헌력 학습에 대한 조정의 후원 의지를 감소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 역옥은 중국의 전통주의자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이 당시 흠천감에서 역법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과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 등이 허무맹랑한 역법으로 중국의 전통을 와해시키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 받아들여지며 시작되었다. 양광선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천문학의 정통성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했고, 이로써 아담 샬과 페르비스트가 투옥되었다. 흠천감정이 된 양광선은 역법을 대통력으로 회귀시켰다. 그러나 1669년 양광선이 실각하고 페르비스트가 그 사이에 죽은 아담 샬을 대신하여 흠천감부로 임명되면서 다시 청나라는 시헌력을 발행하기 시작했다.[17] 그 결과 청나라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시헌력-대통력-시헌력’으로 공식 역서를 두 차례나 바꾸었고, 이에 따라 조선은 왕세자(훗날 숙종)의 생일을 바꾸거나, 절기 제사일을 옮겨야 하는 등 국가의 경조사에 혼란을 겪게 되었다. 시헌력이 조선에서 공식 채택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조선의 조정은 시헌력이 완벽한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청나라의 공식 역법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페르비스트가 흠천감으로 복귀한 후, 청나라와 조선은 다시 시헌력을 편찬하게 되었지만 조선에서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하자는 건의는 한동안 제기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상과 같은 이유로 17세기 후반 관상감 천문학자의 시헌력 학습에 대해 조선 조정은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관상감 천문학 사업 전반에 지원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시헌력 학습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천변 현상 관측과 천문 의기 중수 사업 등에는 비교적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던 것이다. 연대기 사료에 의하면, 17세기 후반에는 유독 혜성과 같은 천변 현상 관측 기록이 많다. ‘경신 대기근(1670-1671)’, ‘을병 대기근(1695-1699)’ 같은 기근이 들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던 이 시기에 관상감의 업무는 자연 재해나 천변 현상 등 이상 현상을 관측하여 그 동향을 파악하는 일에 더욱 집중되었던 것 같다. 다른 천변 현상들에 비해 더 중대하면서도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졌던 혜성은 이 시기가 되면 더욱 체계적으로 관측되었다. 세 명의 문신 측후관이 관상감의 측후관과 한 조를 이루어 혜성을 관측하는 제도가 성립된 것인데, 문신 측후관이 관측에 참여하는 관행은 중종 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화되었다.[18]
연속된 자연 재해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경천근민의 정치를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업도 추진되었다. 조정이 관상감의 혼천의 제작 사업을 적극 지원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현종 10년(1669), 혼천의를 제작하여 과거 세종의 흠경각 제도를 복원하자는 좨주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건의에 따라, 이민철(李敏哲, 1631-1715)과 관상감 관원 송이영(宋以穎, ?-?)이 시각을 알리는 “혼천 시계”이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우주 형태를 완벽히 묘사하는 전시 도구로서 혼천의를 완성했다.[19] 이민철과 송이영의 혼천의는 국왕의 신성한 임무, 즉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들에게 제때를 알려주는 ‘관상수시’의 정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0]
그로부터 약 20년 뒤인 숙종 13년(1687), 그 사이에 망가져서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던 이민철과 송이영의 혼천의를 보수해야 한다는 부총관 최석정의 건의에 따라 숙종은 혼천의 개수 사업을 후원하기 시작했다.[21] 그는 최석정을 보수 사업의 책임자에 임명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22] 약 7개월 뒤, 두 대의 혼천의가 보수되자 숙종은 희정당 남쪽에 따로 제정각(齊政閣)을 마련하여 이 기구들을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업은 이듬해 4월, 최석정이 “제정각기(齊政閣記)”를 작성하면서 마무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혼천의는 숙종이 요 · 순 임금의 문물 제도를 본받고 그들처럼 경천근민의 자세로 정치에 임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최석정은 혼천의 중수 사업을 적극 추진하도록 한 숙종의 결정을 유교적 예악 문물과 전장 제도가 완비된 세종 대의 고제를 복원하는 성과였다고 칭송했다. 세종이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 설치한 간의대와 흠경각, 보루각이 전쟁을 겪으며 없어지게 되었지만 숙종에 의해 비로소 옛날의 훌륭한 문물과 제도가 부활하고, 태평성대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것이다.[23]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에 국왕의 지원이 소극적이었던 17세기 후반, 관상감의 천문학 관련 사업은 이상과 같이 천변 현상을 관측하고 혼천의를 중수하는 사업에 집중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서양 천문학을 옹호했던 남구만, 최석정 같은 양반 관료들이 적극 개입하면서 국가 천문학의 수준 전반을 제고하려는 시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관상감의 열악한 형편을 개선하고 시헌력 운용 수준을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최석정은 관상감에 측후관들이 숙직할 공간도 없고 천문학자들이 박봉에 시달리는 열악한 형편 등을 숙종 13년(1687) 당시 관상감 영사였던 남구만과 함께 조정에 호소하며 관상감 관원들의 근무 환경과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건의했다.[24]
이들은 당시 관상감의 역법 운용 실력이 효종 5년 시헌력으로 개력할 당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최석정은 숙종 10년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시헌력 운용 실력이 형편없다고 지적하며 관상감 천문학자들에게 추산법을 학습시켜야 할 것을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의 이 같은 제안은 숙종 21년(1695) 남구만이 관상감 천문학자들을 대상으로 ‘역법 공부 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함으로써 실현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로 이 모임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숙종 27년(1701) ‘역법 공부 모임’에 대한 조정의 후원을 요청했던 최석정의 건의를 통해 그 대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을해년(1695) 영부사 남구만이 [관상감] 영사를 담당할 때에, 젊고 총민한 사람 십 여 명을 뽑아 훈장과 교회를 정하였는데, 빈한한 부류인데다 시골에 사는 이가 많아 그 사세가 일하기에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미곡 백 여석을 구해서 먹이고 공부하게 했습니다.[25]
숙종 21년 남구만이 조직한 이 모임에서 천문학자들은 주로 시헌력을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구만이 “북경에서 [시헌]역법을 배워온 선학들이 이미 모두 늙고 죽은 데다 후학에게 공부하도록 권장하지도 않아 술업이 쇠퇴하고 있는” 실정을 염려하여 결성하게 되었다고 최석정이 밝힌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26]
평소 남구만은 시헌력을 대통력에 비해 더 정확한 역법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시헌력이 태양의 실제 운동을 대통력보다 훨씬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는 현종 3년(1662) 3월, 암행어사로서 경상도 진주를 방문한 남구만이 의흥현감(義興縣監) 하홍도(河弘度, 1593-1666)와 나눈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하홍도가 ‘오랑캐’의 요망한 역법인 시헌력이 기존 역법과 비교하여 절기 사이의 시간 폭이 규칙적이지 않다’고 비판하자 남구만은 그에 대해 ‘시헌력은 태양의 실제 운동을 반영했기 때문에 절기일 사이의 시간 폭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며, ‘계절에 따른 주야 길이의 차이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27] 바꿔 말하면, 남구만은 시헌력의 치윤법 등에 불만을 토로했던 김시진, 송형구 등과 달리 그에 대해 깊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구만이 조직한 역법 모임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에 사회 ·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힌 이른바 ‘을병 대기근’으로 인해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28] 이 모임은 숙종 27년(1701) 영의정에 임명된 최석정이 ‘남구만의 모임이 해체된 이후 시헌력 계산법을 가르쳤던 훈장들이 사망하게 되어 역법 지식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모임을 다시 추진함에 따라 부활했다. 그는 천문학 생도 열여섯 명과 그들을 가르칠 선생 네 명을 뽑음으로써 모임의 규모를 더 확대했으며 원활한 운영을 위해 구성원들에게 제공할 필수 물자를 조정에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29]
17년 전 관상감 관원들의 시헌력 학습을 장려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던 최석정은 이 모임을 통해 관상감의 시헌력 운용 실력이 향상되기를 기대했다. 최석정 역시 남구만처럼 시헌력을 정확한 역법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친구 이세구(李世龜, 1646-1700)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양이 ‘여름에는 느리고 겨울에는 빠르게 가는’ 정기법에 대해 언급하며 “몰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시헌력 또한 대통력처럼 언젠가는 오차가 발생하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이 역법은 서양인들이 혼의와 규표 등 천문 의기로 최근에 직접 관측한 자료를 가지고 ‘정교한’ 서양 수학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이기에 대통력에 비해 훨씬 정확했다.[30]
‘역법 모임’을 부활시킨 해에 최석정은 조선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관상감의 천문학자를 청나라에 보내어 시헌 칠정력의 미진한 계산법을 배우고 그에 필요한 서적들을 구입하게 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던 것이다.
(1) 대통력에서 시헌력으로 한 번 바뀐 이후에 삼력 일과에 대해서는 일찍이 효종 조에 천문학관 김상범이 절사를 따라 북경에 가서 시헌법을 배우고 서책을 구해온 이래 갑오년부터 우리나라 역시 시헌법으로 추산하고 역서를 반포했습니다. 그러나 칠정 행도에 대해서는 아직 시헌법을 배워오지 못했고, 추보 가능한 방서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근래에 사용하는 [칠정] 역서는 계속 대통법으로 추산했습니다. 한 관서의 역서를 때로는 시헌력법으로, 때로는 대통력법으로 인출하고 있으니, 사체에서 보건대 극히 미안합니다.
(2) 절사가 부연할 때에 본감의 관원 중에 총민하고 일의 이치를 잘 아는 자를 뽑아 데리고 가서 [북경에서] 역법을 잘 아는 사람을 찾아 칠정 추보법을 배우게 하고, 또 그 책을 사서 가져오도록 하소서.[31]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하여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학습하게 해야 한다는 건의는 남아있는 기록상으로 앞서 언급한 현종 14년 관상감 제조 민유중의 제안 이후 27년 만에 다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후 천문학자의 북경 사행에 관련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최석정의 제안이 실현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에 대한 지원이 단절된 17세기 후반, 혼천의 중수 사업 등을 계기로 관상감의 천문학 사업에 깊이 관여하게 된 남구만, 최석정 등의 양반 관료들에 의해 천문학 사업의 성격은 천변 관측과 천문 의기 중수 사업에서 역법 학습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1680-1690년대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은 관상감 영사를 역임하며 조선 천문학자들의 천문역법 운용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역법 공부 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했고, 숙종 27년 영의정에 제수된 최석정 역시 스승이자 선배인 남구만의 사업을 계승 · 발전시켜 조선 천문학자들의 시헌력 운용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제도적 · 학문적인 제반 여건을 마련하고 있었다.
3. 을유년 역서 사건
조선 관상감의 시헌력 운용 능력은 18세기 초에 크게 향상되었다. 관상감의 천문학자 허원이 총 네 차례 북경으로 파견되어 그간 부족했던 시헌력에 대한 지식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동기는 숙종 30년(1704) 12월에 발생한 ‘을유년 역서 사건’이었다. 관상감에서 계산한 을유년의 역서가 청나라의 역서와 달라서 벌어진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시헌력 학습의 필요성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숙종 30년(1704) 12월 11일, 이듬해의 역서를 검토하던 관상감에서 승정원을 통해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조정에 알렸다.
오는 을유년의 청력과 향력(鄕曆)을 지금 막 비교·검토해보니 대소월이 서로 달랐습니다. 청력은 11월이 대월(大月), 12월이 소월(小月)인데, 향력은 11월이 소월이고, 12월이 대월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대한(大寒)이 청력은 12월 초6일인데, 향력은 초7일이고, 입춘(立春)이 청력은 동월(同月) 21일인데, 향력은 22일이어서 진퇴의 차이가 하루에 이르니, 진실로 놀랍습니다. 이 역서를 추산한 역관을 일단 수금(囚禁)하고, 천문학 겸교수와 본 감의 제원들에게 다시 명하시어 회동, 추산하게 하여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32]
관상감에서 미리 계산해 둔 역서와 황력재자관이 가져온 청나라의 역서를 비교 · 대조해 보니 두 역서에 11 · 12월의 대소, 대한 · 입춘의 절기 날짜에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선 관상감은 을유년 역서를 계산한 천문학자를 구금하고 역법을 잘 다루는 사람을 모아서 계산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검토하겠다고 보고했다.
엿새 후, 산원 7명과 천문학 겸교수 2명을 선발하여 을유년 역서의 계산 과정을 검토한 관상감은 애초 조선의 계산에는 잘못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단 지금으로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니 차후 그 원인을 강구하겠다고 말하며 하옥된 관원을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33] 그에 따라 그해 동지 무렵 애초 관상감의 계산 값이 반영된 역서가 반포되었다.
을유년 역서의 오차 원인에 대한 관상감의 보고는 사건이 발생한 지 반 년이 지난 숙종 31년(1705) 5월 말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이들은 ‘문자책(文字冊)’에 잘못 인쇄된 연근(年根) 값을 가지고 월의 대소를 계산했기 때문에 을유년 역서에 오차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즉, 원래 연근 값 ‘2궁 10도’를 가지고 월의 대소를 계산했어야 했는데 ‘문자책’에 잘못 인쇄된 ‘2궁 14도’를 넣어서 계산했기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의 월의 대소가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관상감은 실제로 ‘2궁 10도’를 가지고 을유년 역서를 다시 계산해보니 청나라와 동일한 값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예전에 연경에 가서 산법을 학습한 관원이 남겨둔 사본 한 책을 찾아서 보니 지두(紙頭)에 잔글씨 몇 줄이 있었는데, 곧 이른바 “각 해의 연근에 4궁 9도를 더하면 다음 해의 연근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추산해보니 각 해의 연근이 일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올해 연근에 있어서도 이 방법으로 비교해 보았더니 2궁 10도였는데, 본 감의 ‘문자책’에 인쇄된 것은 2궁 14도였습니다. [2궁] 10도를 가지고 올해의 [역서를] 청력과 비교해 보았더니 과연 서로 부합했습니다. 공(空) 자와 사(四) 자가 서로 달라서 대소월의 다름이 있었던 것입니다.[34]
관상감은 전해 12월의 주장과 달리 그들이 을유년 역서를 잘못 계산했다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상감 관원의 계산 실수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소위 ‘문자책’이라는 것은 『서양신법역서』의 “일전표”와 “월리표”로서 갑오년에 [중국에서] 배워올 때 한 부를 사와 간행하여 전해온 것입니다. 지두에 적힌 것은 곧 산법의 가령(假令)에서 빠진 것인데 그때 배워온 관원이 미처 ‘문자책’ 가운데 간입(刊入)하지 못해서 사(四) 자가 잘못 인쇄되었던 것입니다. 역관들이 [이를] 그대로 따라서 추보하여 이 같은 오차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태만하여 잘못 계산한 것에 해당될 게 아니라, 해당 역관이 깊이 궁구하지 못한 듯합니다.[35]
을유년 역서와 관련한 관상감 관원의 잘못이라면, 역서를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문자책’이 잘못 인쇄되어 있었음을 몰랐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서 계산한 역서가 틀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전국에 이미 반포된 역서라 할지라도 청나라 역서대로 수정해야 했다. 이들은 어람 역서를 회수하여 수정한 뒤 다시 올렸고 전국에도 문제가 된 11 · 12월장의 수정 본을 돌렸다. 또한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산법을 잘 아는 사람을 북경에 보내 ‘문자책’의 진본을 구하게 하자는 건의도 제기했다.[36]
그렇다면 관상감은 어떻게 을유년 역서의 오차 원인을 발견했을까? 그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는 사료는 없지만, 여러 간접적인 증거로 볼 때 관상감의 해명은 그리 석연치 않다. 관상감이 당시에 참고했던 ‘문자책’의 진본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숙종 연간 간행본으로 추정되는 『월리표(月離表)』를 통해 그 ‘문자책’의 대강을 추측해 볼 수 있다.[37] 숙종 31년 5월, 관상감이 ‘문자책’에 잘못 인쇄된 수치라고 말했던 ‘2궁 14도’는 규장각본 『월리표』에서 뿐만 아니라 대만고궁박물원이 편집한 『서양신법역서』의 『월리표』에서도 확인되는 값인데, 이 두 책에 의하면, ‘2궁 14도’라는 값은 관상감의 해명과 달리 을유년이 아니라 이듬해인 병술년(숙종 32년, 1706)의 값이다. 바꿔 말하면, 관상감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병술년의 연근 값을 가지고 을유년 역서 사건의 발생 원인을 해명한 것이었다. 『서양신법역서』에도 관상감이 잘못 인쇄된 값이라고 주장했던 ‘2궁 14도’가 병술년의 값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자신들이 참고한 ‘문자책’이 인쇄될 당시 실수가 있었다는 관상감의 해명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들이 왜 병술년의 연근 값을 을유년의 연근 값이라고 진술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들이 거짓 해명을 했을 수도 있고,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더 근본적인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그들이 ‘문자책’ 진본을 확인하기 위해 북경에 가야만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통해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당시 관상감이 사용했던 ‘문자책’에는 이들의 해명대로 ‘2궁 14도’가 을유년의 연근 값으로 기록되어 있었을 수 있다. 관상감의 ‘문자책’이란 그들에 따르면, 과거 효종 대 천문학자(아마도 김상범)가 북경에서 구해 온 『서양신법역서』의 『일전표』와 『월리표』를 그들이 보기 편하도록 따로 편집해 둔 책을 말하는데, 그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2궁 14도’가 병술년이 아니라 을유년의 값으로 인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랬을 경우, 관상감은 북경에서 구한 ‘문자책’ 진본을 확인함으로써 그들의 해명이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관상감은 계산으로 구한 ‘2궁 10도’를 역서 계산식에 다시 대입하여 청나라와 동일한 값을 얻을 수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그 말이 맞다면 관상감이 사용한 ‘문자책’에는 무언가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것이므로 북경 흠천감에서 사용하는 ‘문자책’과 대조해 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당시 관상감이 사용했던 ‘문자책’에도 『서양신법역서』의 일전 · 월리표와 똑같이 ‘2궁 14도’가 병술년의 연근 값으로 기록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랬을 경우, 관상감은 을유년 역서 사건의 원인에 대해 조정에 거짓 해명을 한 셈이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경우 ‘문자책’에 인쇄된 ‘2궁 14도’가 과연 병술년 값으로도 옳은지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값의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병술년의 역서를 계산하면, 또 다시 을유년의 역서에서처럼 청나라와 조선의 역서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관상감은 청나라에서 어떤 값으로 병술년의 역서를 계산할 것인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자체 계산으로 구해낸 ‘2궁 10도’를 병술년 역서 계산에 적용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청나라가 ‘2궁 10도’를 적용할지, 아니면 ‘문자책’ 진본에 기재된 관상감이 알 수 없는 ‘다른 값’을 적용할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인쇄된 대로 ‘2궁 14도’를 적용할지 당시로서는 몰랐던 것이다. 조선의 역서를 오차 없이 계산하기 위해서 관상감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는데, 이는 산법을 잘 다루는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비록 관상감이 왜 그들의 문자책에 을유년의 연근 값이 잘못 인쇄되어 있었다고 해명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연근 값의 오류 때문에 월의 대소차가 생겼다는 관상감의 해명이 50년 동안 단절되었던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을 재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큰 문제없이 일단락되었던 일을 오히려 논란의 중심에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시헌력 계산법 보완을 위해 천문학자를 북경에 파견하자는 최석정의 4년 전 기획이 실현되는 데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역서 사건의 처벌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에 대한 처벌과 함께 그들의 작업 여건 개선이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관상감은 조선의 역서가 틀렸다고 주장을 번복한 것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했다. 실제로 그에 대해 몇몇 관료들의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먼저, 5월 27일 승지 허지(許墀, 1646-1719)는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중차대한 역서 계산에서 실수를 범해 놓고도 ‘문자책’의 인쇄가 잘못되었다는 핑계를 대며 잘못을 덮어버리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미 왕에게 올린 역서를 수정하여 다시 올린 일에 대해서도 관상감을 질책했다.[38] 그의 비판에 따라, 을유년 역서를 계산한 관원은 장형(杖刑) 80대의 형벌에 해당하는 보석금을 내야 했다.[39] 이어서 열흘 남짓 지난 6월 10일, 대신과 비국당상이 왕을 인견한 자리에서 예조판서 윤세기(尹世紀, 1647-1712)와 우의정 이유(李濡, 1645-1721)가 차례로 관상감의 잘못을 강조하며 더 엄중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윤세기는 ‘희화(羲和)가 역상수시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죽여 용서하지 않았다’는 『상서(尙書)』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관상감의 죄가 매우 무거움을 강조했다.[40]
이날 조정의 논의가 역서 계산을 잘못한 관상감 관원의 처벌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세기와 이유는 관상감의 열악한 형편에 대한 것으로 논의의 주제를 전환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관상감 관원의 잘못을 무거운 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관상감에 역서 계산을 잘하는 인재가 없고 제대로 된 관측 설비와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근래 역관들 중에는 산술을 잘 다루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의 논의에 이어 윤세기 또한 관상감의 사정이 매우 열악하다고 동조했다. 그는 천문을 관측하는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관상감의 관원들이 ‘모양(模樣)’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관측대는 풍기 이외에 필요한 관측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며 관측 체계 역시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관상감의 수준이 매우 한심한 상황이라고 개탄했다.[41] 게다가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을 요임금 때의 희화에 비유한 이들의 발언은 그만큼 관상감의 직무가 국왕의 중요한 임무로서 그의 신성한 권위를 뒷받침하는 일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논의에 따라 관상감 관원이 받게 될 형벌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상감이 국왕의 권위와 직결되는 역서를 다루는 중요한 기관으로서 그에 대한 좀 더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관상감의 제안이 수락되어, 숙종 31년(1705) 동지사행에 동행할 천문학자로 선발된 사람은 바로 허원이었다. 그가 어떤 절차에 따라 북경 파견원으로 발탁되었는지 남아있는 기록으로 알기 어렵지만 그보다 반세기 전에 북경에 파견되었던 김상범의 전례를 따랐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효종 1년(1650) 관상감 제조 여이징이 조직한 역법 공부 모임의 일원이었던 김상범이 북경에서 시헌력의 일부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학습했던 사례는 숙종 31년 북경에 파견할 천문학자를 선발하는 절차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허원은 최석정이 조직한 역법 공부 모임의 일원이었을 것이며 이 모임에서 최석정에게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유학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숙종 조에 최석정이 역법의 차이를 걱정하여 허원을 보내 그 방법을 탐구하게 했다”는 짧은 기록을 통해 18세기 초 역법 정비 사업에서 최석정과 허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42]
북경에 파견된 허원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의 목표가 관상감이 계산으로 밝혀낸 연근 값이 옳은 것인지 확인하는 일뿐만 아니라 일전 월리법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고, 나아가 교식 계산법과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모두 학습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지사의 서장관이었던 남적명(南迪明, 1655-?)이 남긴 “문견사건(聞見事件)”에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허원은 흠천감 관원에게 편지를 보내 시헌 칠정력 계산에 필요한 “일월오성 주법 목록(日月五星籌法目錄)”, 태양 궤도 운동 계산에 관련된 “일전 세초(日躔細草)”, 교식 추산에 필요한 “삼원 교식 총성고(三元交食總成稿)” 등의 서적을 요구했다.[43] 당시 허원이 역서를 계산하기 위해 필요했던 다양한 천문학 서책들, 즉 태양의 운동, 일월식, 시헌 칠정력 계산법에 관련한 서책을 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남적명의 기록은 허원이 흠천감에서 발행한 을유년과 병술년 역서의 ‘누자(縷子)’를 확인하려 했다는 점도 알려준다.[44] 앞서 살펴보았듯이, 허원이 을유년과 병술년 역서의 ‘누자’를 요구한 까닭은 청나라가 두 해의 역서 계산에 각각 어떤 연근 값을 대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차 파견 이후 허원과 한동안 편지를 왕래하며 역법 계산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었던 하군석(何君錫, 1643-1714)이 당시 허원에게 ‘누자’ 정보를 알려주었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허원은 청나라 흠천감의 계산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45]
결과적으로 허원의 북경 파견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관상감은 ‘문자책’에 관련한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개력 이래로 습득하지 못했던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학습할 수 있었게 되었다. 허원이 원래 흠천감에 요구했던 서적들을 얻지 못하고 단지 을유년 · 병술년 역서 계산에 썼던 정월 초하루 ‘누자’만을 받았다는 일면 부정적인 남적명의 기록과는 달리 이후 조선에 귀국한 허원은 북경에서의 공적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는 상을 받았다.[46] 숙종 32년 4월, 숙종과 비국당상 및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의정 최석정과 우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은 허원이 북경에서 어려운 과업을 완수했으니 그에게 상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허원이 북경에서 청나라에서 비밀로 취급하는 ‘일월오성 초면 추보법(日月五星初面推步之法)’을 학습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금 관상감이 그 술법을 모두 이해하여 시헌 칠정력을 계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47] 즉, 이들에 따르면, 숙종 31년(1705) 허원의 북경 파견 이후 관상감은 비로소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숙종 31년 허원의 1차 북경 파견이 성공함에 따라 관상감 천문학자들은 비로소 시헌 칠정력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시헌 일과력과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모두 학습함으로써 두 역서의 계산법이 서로 달라 매우 “미안”했던 상황이 마침내 해소되었음을 의미했다. 시헌 칠정력을 계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이에 필요한 제반 제도적 요소들도 하나씩 갖추어지기 시작했다.[48] 나아가 허원의 북경 파견의 성공은 관상감 천문학자가 또 북경에 파견될 계기가 되었다. 관상감은 허원의 1차 파견에서 흠천감의 관원으로부터 완전히 학습하지 못한 역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허원을 파견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이 제안이 수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을유년 사행 때 허원은 흠천감 관원 하군석에게서 시헌력에 관련된 일부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며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와의 인연은 귀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허원은 하군석과 숙종 34년(1708)까지 역서 계산에 필요한 상수들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시헌력 산법 문제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때 허원의 질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이백항년표(二百恒年表)”의 태양 최고충(太陽最高衝)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성과 금성의 인수(引數) · 연근(年根) 값이 산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49] 하군석은 허원에게 1705-1713년의 연근 값을 알려주었지만 편지로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관상감은 연로한 하군석이 죽기 전 그에게서 최대한의 지식을 배워 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허원의 2차 파견을 제안했다.
숙종 34년 일식 · 월식 계산법을 익히고 수성과 금성의 수표를 구입하기 위한 허원의 두 번째 북경 파견은 1차 파견 때보다 훨씬 우호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이전처럼 ‘을유년 역서 사건’ 같은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2차 파견이 필요하다는 관상감의 제안이 흔쾌히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때 관상감이 제시했던 목표는 금성 · 수성의 연근 값을 알아내는 것으로서, 이는 순전히 기술적인 영역의 문제였다. 숙종은 관련 사업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관상감의 건의에도 기꺼이 응답했다. 청나라에서 판매를 금지한 일식 · 월식 계산법을 다룬 천문학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은이 필요하다는 건의에 숙종은 허원에게 은 200냥을 관향과 운향에서 지급하라 지시했다.
시헌력 학습을 위한 허원의 2차 북경 파견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데는 당시 서양 천문학에 대한 국왕 및 조선 지식인 전반의 인식을 호의적인 방향으로 바꾸려는 최석정의 노력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허원의 2차 파견 직전인 숙종 34년 5월, 숙종의 명을 받아 관상감은 서양 선교사 아담 샬의 천문도와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모사하였다. 영의정이자 관상감 영사로서 이 사업을 관장한 최석정은 모사 작업이 완료된 직후 작성된 “서양 건상 곤여도 이병 총서(西洋乾象坤輿圖二屛總序)”에서 서양 천문학의 우수함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관상감에서 모사한 천문도와 세계지도가 청나라의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서양 천문학 지식을 옹호하는 전략을 택했다. 최석정은 서양 천문도와 세계 지도에서 각각 발견된 “숭정무진(崇禎戊辰)”과 “대명일통(大明一統)”의 글귀가 모두 옛 명나라를 상징하는 문구로서 이를 통해 두 도상이 명나라의 유산임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명나라를 계승한 조선은 두 도상으로 대변되는 서양 천문 지리학을 받아들이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영의정 최석정의 이러한 주장 직후에 허원의 2차 파견이 이전보다 좋은 조건에서 이루어져 서양 천문학의 심화된 학습과 운용이 가능해 진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50]
요컨대, 시헌력으로 개력한 17세기 중반 이래로 숙종 30년(1704)에 이르기까지 관상감이 안고 있었던 역법상의 문제들은 ‘을유년 역서 사건’을 계기로 점차 해결되기 시작했다. 관상감은 ‘을유년 역서 사건’을 도리어 그들의 부족한 천문학 운용 실력을 보완하고 효종 대 개력 이래 반세기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역법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획의 배후에는 관상감 영사로서 이미 수년 전부터 관상감의 역법 학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제로 관상감 관원들의 학습을 후원했던 최석정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최석정이 ‘을유년 역서 사건’의 해결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실제로 허원에게 시헌력 계산법을 학습해 올 것을 지시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는 없다. 하지만 ‘을유년 역서 사건’이 해결되어 나가는 양상을 살펴보면 관상감의 천문학 실력을 향상시키려 했던 최석정의 기획이 점차 실현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허원의 1차 북경 파견은 4년 전인 숙종 27년(1701) 최석정의 제안이 마침내 성사된 것이었으며, 북경에서 허원이 수행한 일도 ‘을유년 역서 사건’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문제의 해결을 넘어선 관상감의 숙원 사업이었던 시헌 칠정력 학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국한 허원이 애초에 사행 목적으로 제시되지도 않았던 “일월오성 초면 추보법”을 학습한 일로 정3품 통정대부에 가자된 데는 허원의 공적에 대한 최석정의 적극적인 추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울러 허원의 두 번째 사행이 이루어질 무렵, 최석정이 서양 천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정당화하는 데 앞장선 것도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관상감과 그 후원자였던 최석정은 이미 수년 전부터 ‘역법 공부 모임’을 통해 추진하고 있던 시헌력 학습을 본격화할 기회로 을유년 역서 사건을 성공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 『현상신법 세초류휘(玄象新法細草類彙)』 편찬과 시헌력 지식의 보완
앞서 살펴보았듯, 관상감은 숙종 30년 12월 발생한 ‘을유년 역서 사건’의 위기를 산법을 잘 다루는 허원을 북경에 파견하여 시헌력을 학습하게 함으로써 역법 운용 실력을 향상시킬 계기로 활용했다. 을유년 동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허원은 흠천감 관원 하군석에게 시헌 일과력과 시헌 칠정력 계산법을 배워 옴으로써, 관상감은 반세기 전 개력이 이루어질 때 세웠던 목표를 비로소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숙종 34년(1708) 역서부터 시헌 칠정력을 편찬하고, 숙종 36년(1710) 이후부터는 시헌 중성법을 활용한 야간 시각 체제 정비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숙종 36년(1710) 허원이 저술한 『현상신법 세초류휘』(이하 『세초류휘』로 약칭)는 당시 그가 북경에서 배워온 지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후 관상감에서 시헌력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숙종 31년과 34년 두 차례 북경에 다녀옴으로써 역법 운용에 필요한 서책을 구입하고 하군석과 여러 차례 시헌력 관련 지식을 교류하며 점차 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던 허원은 숙종 36년 6월, 그동안 습득한 지식들을 정리하여 총2권 1책의 『세초류휘』로 엮어냈다. 이 책은 “건책(乾冊)”과 “곤책(坤冊)”으로 구성되어, “건책”에는 일월식 추보법을, “곤책”에는 칠정에 관련된 계산법 등을 수록했다. “건책”에 정리된 일월식 계산법은 허원이 숙종 34년 북경에서 구입한 서적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보이며, 다소 두서없이 여러 계산법들이 나열된 “곤책”은 허원과 하군석의 질의 응답이 시간 순서대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천체의 천문학적 위치 계산법을 수록한 『세초류휘』는 실제 시헌력을 계산하는 천문학자들이 손쉽게 참고할 수 있는 책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세초를 분류하여 모아놓은 것’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허원은 서양 천문학의 이론과 원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철저히 역서 계산에 필요한 계산법만을 간략히 서술한 이 책은 천문학자들이 시헌력을 만드는 데 쓰일 ‘역법 계산 매뉴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역가(曆家)에게 있어서 목공들의 도구와 같다”는 허원의 표현은 이 책의 독자가 관상감 천문학자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51]
『세초류휘』에 수록된 지식과 기법들은 당시까지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알지 못했던 시헌력 운용법으로서, 그 중 상당수가 허원이 하군석에게 배운 내용이었다. 하군석이 허원에게 1705-1713년 사이의 수성 · 금성의 연근 값을 알려준 것에 드러나듯, 허원은 주로 천문학자들이 시헌력을 계산할 때 실제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질문했고 하군석은 그에 대해 친절히 대답해 주었던 것 같다. 『세초류휘』 “곤책”에 소개된 ‘태양과 달의 연근 구하는 방법’은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태양과 달의 연근 계산법은 『서양신법역서』의 『일전표』와 『월리표』에 기재된 것으로서, 이 표를 구했다면 굳이 따로 싣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원은 이 내용을 『세초류휘』에 실었던 것이다. 태양 이백항년표의 일부인 ‘일전 최고충’ 값이 따로 표로 정리되어 있는 점이나 수성 및 금성의 인수와 복현(伏見) 값이 표로 제시된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초류휘』의 편찬이 곧 시헌력에 대한 완전한 학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초류휘』가 저술될 당시까지도 허원을 비롯한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알지 못했던 역법 지식과 기법들이 상당했고, 이는 추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실제로 부족한 지식들은 이후 조금씩 보완되었는데, 화성 · 목성 · 토성의 위치 계산법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세초류휘』에는 칠정 중 태양과 달, 수성, 금성의 위치 계산법 및 수표들은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화성, 목성, 토성에 관련한 정보는 상당히 누락되어 있다. 세 행성의 위치 계산법이 간단하게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 행성에 관련한 수표는 수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허원은 숙종 42년(1716) 사행에 군관으로 참여한 그의 조카 유취오(柳聚五, 1681-?)를 통해 “화성 · 목성 · 토성의 위치 계산법과 그에 필요한 수표를 알려 달라”는 편지를 하군석의 아들이자 흠천감의 오관사력(五官司曆)이었던 하국주(何國柱, ?-?)에게 전달했고 이로써 세 행성에 관한 수표를 습득할 수 있었다.[52]
시각 제도 개편에 핵심 지식인 시헌 중성법도 『세초류휘』 편찬 이후 보완된 것 중 하나였다. 시헌 중성법을 보충한 일은 이후 조선의 시각 제도를 개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초류휘』에 실린 시헌 중성법은 ‘별을 이용한 시각 구하기’나 ‘시각을 이용한 별 구하기’의 계산 과정을 간략히 나열한 정도에 불과했다.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었고 당시에는 중성 계산에 참고할 서적이 간행되어 있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1710년대까지도 시헌 중성법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본격적으로 시헌 중성법을 학습하기 시작한 때는 청나라의 오관사력 하국주가 측후 의기를 가지고 한양의 경위도를 측정하기 위해 조선에 방문한 숙종 39년(1713)이었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하국주를 의주까지 동행하며 시헌 중성법에 관해 논의한 허원은 이 방법을 활용하는 데에 『신제 영대 의상지(新製靈臺儀象志)』(이하 『의상지』로 약칭)와 『황적정구표(黃赤正球表)』 같은 책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바로 관련 책의 간행을 추진했다. 이 책들은 이미 허원의 숙종 34년 북경 파견 당시 구해왔던 것이었다. 숙종 39년 8월 1일, 관상감 제조 조태구(趙泰耈, 1660-1723)가 서양 의기의 제작과 『의상지』의 간행을 조정에 건의했으며, 9월 18일에는 허원과 최천약(崔天若, ?-?)이 이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의상지』 간행 사업은 약 8개월 후인 숙종 40년(1714) 5월 23일에 완료되었는데, 당시 관상감이 이 사업을 서둘렀던 이유는 시헌 중성법을 활용하는 데 핵심적인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년 뒤인 숙종 44년(1718) 시간 관리를 담당한 주시관들이 시헌 중성법을 교습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관상감이 시헌력에 맞추어 조선의 시각 제도를 개정할 기본적 능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를 실제 야간 시각을 관리하는 기준으로 적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영호와 남문현의 연구에 따르면, 시헌 중성법을 따라 개정한 시각 제도를 인정과 파루의 알림에 적용하자는 관상감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잠시 시행되기는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11부전 경루법 체제로 회귀했던 것이다.[53]
요컨대, 17세기 중 ·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천문학자를 청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역법을 완벽하게 습득하고 운용하려 했던 관상감의 노력은 을유년 역서 사건 직후 점차 결실을 맺게 되었고, 관상감은 이를 토대로 시헌력 체제에 입각한 시각 제도를 개편하는 사업까지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개력 60여 년이 되도록 대통력 체제에 근간을 두고 있었던 조선의 시각 제도를 시헌력 체제에 따라 수정하는 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실제 밤 시각 관리에 활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숙종 44년(1718) 관상감이 시헌 중성법을 다룰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5. 결론
이제까지 연구에서는 18세기 초 조선 천문학 실력의 비약적 성장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적 관계에 주목하여 설명하거나 유교적 이념을 체화한 군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군주의 정치적 · 이념적 동기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18세기 초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17세기 후반보다 훨씬 우호적인 환경에서 청나라의 천문학을 학습할 수 있게 되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국왕이 적극적으로 천문학 학습을 후원하고 옹호했던 동인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정치적 조건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왜 하필 18세기 초에 조선의 천문학 실력이 향상될 수 있었는지 충분한 답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역법 운용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행위자가 누구였는지, 그들이 어떻게 당면 과제를 해결해 나갔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17세기 후반부터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을 학습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학문적 · 제도적 제반 여건을 마련했던 남구만, 최석정 같은 양반 관료들의 노력과 실제로 천문 역서 제작을 담당한 실무자인 허원의 적극적 활약에 초점을 맞추어 18세기 초 조선 천문학의 비약적 성장 과정을 해명하려 했다. 17세기 후반 역법 학습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크게 위축되었을 때에도 서양 천문학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한 양반 관료들은 관상감 관원들이 추후 시헌력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며 준비했다. 때문에 숙종 30년(1704) 12월 발생한 ‘을유년 역서 사건’이라는, 관상감의 입장에서 중대한 위기 상황을 오히려 그들이 준비했던 바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여 개력 이후 반세기 동안 풀지 못한 역법상의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이 논문은 18세기 초 조선 천문학 수준의 발전이 비단 조청 관계의 안정이나 숙종의 왕권 강화 노력 등의 정치적 · 외교적 환경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서양 천문학에 우호적이었던 남구만, 최석정 같은 양반 관료들의 관상감 천문학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과 당시 청나라의 천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운용하려했던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보였다. 바로 이들의 기획과 노력이 18세기 초 정치적 · 외교적 환경의 우호적 변화와 만났을 때 실제 천문학 사업의 확장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천문학 운용의 중심에 있었으나 그동안 중요한 행위자로서 주목받지 못했던 관상감 천문학자들 및 이를 후원했던 양반 관료의 활동에 집중함으로써 18세기 초 조선 천문학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동인의 한 축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투고: 2016년 11월 1일, 심사 완료: 2017년 12월 15일, 게재 확정: 2017년 12월 18일)
출처 : http://www.khss.or.kr/kjhs/9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