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아치의 노래, 정태춘>
1.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에 관한 ‘다큐’를 세 번째로 보았다. 앞선 두 번의 경우에는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정치인, 노무현과 노회찬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가수 ‘정태춘’이 주인공이다. 정태춘은 1970년대 말 <시인의 마을>과 같은 서정적인 노래로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인물이다. 한국의 ‘음유시인’의 탄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삶과 예술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서정적 세계에 머물 수 없었다. 그것은 ‘군사독재’가 지배하는 시대적 상황이 그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2. 첫 음반의 압도적인 성공은 2, 3집 음반을 만들 때 정태춘의 생각과 의도를 마음껏 발휘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적 선율과 리듬을 바탕으로 국악적인 포크를 시도했다. 하지만 완벽한 실패였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정태춘은 음반회사에서 만난 아내 박은옥과 함께 노래와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소극장’공연을 약 3년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회적 모순과 예술에 대한 시대적 탄압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다음 단계의 정태춘은 거리의 투사이며 노동자와 탄압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운동권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독특하면서도 특별한 한 인물의 탄생인 것이다.
3. 정태춘의 40년이 넘는 가수 생활 중에서도 특별한 시간은 ‘사전심의’와의 싸움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모든 예술과 방송 활동은 사전에 심의를 받고 허가를 받아야만 대중과 만날 수 있었다.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창작은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술의 근본적 특징은 원래 불온함이며,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그러한 예술적 본질을 정치적 힘으로 억압한다는 자체를 정태춘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심의’ 자체를 비판하거나, 우회적 방식으로 심의에 도전하였지만, 제도 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비록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꿈꿨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억압받고 자유가 통제되는 공간이었다.
4. 정태춘은 ‘사전심의’와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불법음반을 만들어 유통시켰고, 방송에서도 공연하였다. 의도적으로 제도를 거부함으써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위헌심판’을 통해 ‘사전심의’ 제도를 무너뜨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런 의도를 알고있던 정부는 처음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점차 영향력이 커지자 결국은 정태춘을 기소하였고, 헌법 재판소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를 위헌으로 결정하였다. 오랜 시간 한국의 예술과 창작 정신을 짓누르던 제도가 사라진 중요한 순간이었다.
5. 불법음반은 다시 정식으로 재발매되었고, 정태춘의 음악도 다시 서정적인 성격으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제 그의 음악을 찾지 않았으며, 자신의 음악적 작업에 실망한 정태춘은 오랜 칩거에 들어간다. 간혹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음악적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를 다시 무대에 세운 것은 2019년 박은옥의 데뷔 4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정태춘, 박은옥 노래 40주년> 전국 공연이었다. 다큐 <아치의 노래>는 이 공연을 계기로 정태춘의 음악을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한다. <아치의 노래>는 정태춘의 무대 공연을 생생한 사운드와 함께 입체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영화이전에 하나의 멋진 ‘공연’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정태춘의 대표적인 노래들이 힘차게,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6. 사실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정태춘 음악의 본질인 ‘서정성’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태춘은 노동운동에 전념하던 시기에 과거 서정적인 노래들을 ‘쓰레기’같다는 식으로 폄하했던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발언에 적잖은 충격과 거부감을 가졌었다. 비록 현재와 다를지라도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발언은 지나치게 현재적 상황에서 과거를 평가하는 독단적인 성격이 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정태춘이 다시 서정적 노래를 발표했고 비록 대중들의 호응은 받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노래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도 시간의 경과 속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서정미와 사회에 대한 단호한 발언이 결코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사회의 모순에 분노하지 않을 것이며, 사회적 분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바탕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의 노래 속에서 다시 발견한다.
7. 스스로 인정하듯이 노래의 다양성이나 음악적 장르의 경계를 넘어드는 형식적 실험에는 부족했을지라도, 정태춘은 노래와 실천의 경계를 무너뜨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실천적 예술가였다. 그의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고통받은 사람들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때론 그 과정에서 과격하고 도전적인 가사들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에 솔직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한 ‘의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집스런’ 사람 옆에서 묵묵히 협조하며 예술적 동반자가 된 ‘박은옥’의 모습도 존경스럽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부르는 <사랑하는 이에게>는 ‘혁명’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세계의 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는 한, ‘혁명’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1992년 부천의 뷔페식당에서 엉뚱하지만 소박하게 열었던 <작은 소리 연주회>의 메인 곡이었다는 점에서, 한때 꿈꿨던 ‘교육문화’ 프로젝트에 대한 갈망도 다시금 떠오르게 했다. 정태춘의 더 선해지고 깊어진 눈동자가 인상깊다.
첫댓글 계속 자기 음악을 한다는 것. 멋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