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구속 메시지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의 병태 생리로 제시된 가설의 하나로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메시지를 말합니다. 이중 구속이란 양쪽 손이 모두 묶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을 하면서
몸짓으로는 말과 상반되는 표현을 하거나, 혹은 말 속에 그 말의 본래적 의미와는 상반되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것이 이중 구속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혹은 모순되는 내용을 동시에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중 구속 메시지는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의사소통 방식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직장 상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
이제 퇴근들 하세요. 피곤하지만 내가 야근할게. 어제도 야근했는데
너무 힘들구먼...” 이 말을 들은 부하직원은 퇴근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야근을 해야 할까요? 추석을 앞두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통화를 합니다.
“어머니, 입덧이 심해서 이번 추석에 못 내려갈 것 같아요.” “아니다. 괜찮다. 네가 편한 대로 하거라.
그런데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서럽고 외롭고 눈물이 자꾸 나는지 모르겠구나.” 내려오라는
얘기입니까? 내려오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이중 구속 메시지는 듣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괴롭게 만듭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속마음을 표현해주면 좋으련만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
눈치를 살펴야 하기에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따라서 피곤해집니다. 자칫 속마음을 잘못
파악했다간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이중적 메시지가 옴짝달싹
못하게 구속하는 이중 구속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하게 사용되는 이중적 메시지는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포근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중적 메시지가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배려의 마음에서
출발하고, 또 그러한 마음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될 경우에 그렇습니다. 반대로 악의에 가득 차서 상대방을 곤혹스러움에 빠뜨리고 괴롭히기 위한 이중적인 메시지는 그 의도가 상대방에게
간파 당하는 경우에 이중 구속 메시지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더해서 심한 불쾌감을 추가로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말을 하면서 몸짓으로는
말과 상반되는 표현을 하거나, 혹은 말 속에 그 말의 본래적 의미와는 상반되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는
것이 이중 구속 메시지의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또 다른 의미의 이중 구속 메시지가 있습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그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망쳐놓은 동생을 때린 아이에게 폭력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며 부모가 아이의 뺨을
때린다면 아이가 겪을 정신적 혼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러한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 구속 메시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의 연설이나
설교, 혹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써진 글에서 가끔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 구속 메시지가 가져다 주는 괴로움은 다른 종류의 이중 구속 메시지가 가져다 주는 괴로움에 비해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연설이나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고문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인생을
정면돌파(?)해 온 목회자가 인생을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합니다. ‘한
영혼을 위해 나의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가?’라는 날 선 질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시작한다는
목회자가 자리보존을 위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회개를 외치는 성도들에게 이제 그만 나가주십사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 설교하지만 성도들을 고소, 고발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목사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당혹스럽습니다. 그 성도들을 용서하고, 용납하자는 것인지, 쫓아내자는 것인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누군가 그 목회자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글을 씁니다. 하지만 그 글 자체에서는 사랑이나 용서하는 마음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 목회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정죄와 미움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글의 내용과 그 글이 은밀하게 드러내주는 글 쓴 사람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중적입니다.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그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 목회자를 정죄하지
말라는 글을 씁니다. 하지만 그 글의 내용은 정죄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그 글 자체는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글입니다. 그 목회자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글입니다. 글의 내용과 그
글이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는 글 쓴 사람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중적입니다. 그 사람이 주장하는 ‘정죄하지 말라’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주님의 명령인 ‘정죄하지 말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의사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의사들은 자신이 환자에게 충고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말이 나올까 걱정스럽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목사가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목사가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첫댓글 이중구속메세지! 구절마다 공감 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특히 많이 배우고 공부했다는 지도급에 이중구속메세지를 발하는 분들이 많은것 같아요.
pasture님, 안녕하세요? 공감하며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인간의 이중성을 잘 밝혀주셨습니다. 사실 자기를 살펴보면 내안에 지적하신 이중구조의 생각과 그 생각을 나타내는 말과 행동이 내 안에 병존함을 늘 체험함니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에 배려와 존중에서 비롯된 이중 메시지가 상대방에게 관대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구속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또 자기도 모르게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 구속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좋은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요즘 절감합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