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입니다. 기억하실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적막한 카페를 보니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1년, 센티멘탈 그래피티에 푹 빠져서 열심히 카페활동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가끔은 인적없는 카페를 한번 둘러보고 가긴 하는데, 요 몇년 사이에는 처음이네요. 작년 글을 읽어보니 낯익은 여러 분들의 닉네임도 보이고 괜히 반갑습니다.
갑자기 생각나서 오랫만에 센티멘탈 져니를 보았는데, 루리카를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니 에피소드는 아키라의 1화, 유우의 3화, 카호의 5화, 와카나의 6화, 아스카의 8화를 참 좋아합니다. 그중에 최고는 역시 6화인 와카나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12도시 12소녀를 주제로 하는 미소녀 애니메이션인데, 유우편은 철도매니아의 냄새가 풍기고, 와카나편은 20분 내내 스님과 선문답을 하지를 않나, 에미루 편은 라무네 병이 주인공으로 나레이션을 하지를 않나. 일본 내에서도 98년 심야 애니메이션으로 방영 당시에 여고생이 스님과 20분동안 선문답을 하는 애니였다고 아직도 조금씩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 지금 다시 봐도 센티멘탈 저니는 파격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네요.
예전부터 와카나편을 돌려보면서 옛날 자막이 조금 오역이 된 것이 신경쓰였는데, 오랫만에 생각난김에 몇 가지 정리를 해 봅니다. (이전 2008년도 세이지님의 글에서 '급수장에서 급사가 나간다'나 '호흡은 부수적 운동' 부분의 오역을 바로잡아주신 것에 보충하여 적는 셈이네요.)
유튜브에서 찾은 센티멘탈 저니 6화 링크 (한글자막)
<#1>
와카나 : 자신을 위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건 어리석은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호도키님쪽에서 본다면 어리석은짓이 아닙니까?
→ 仏(ほとけ)様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바르게 수정한다면 부처님이라고 바꾸면 되겠네요.
<#2>
현악스님 : 세상(世)도 다시 선(善), 사(邪)도 다시 선(善)
광목동연(廣目同然) 대안선(大安善)
언제, 어떠한 것도 선(善)
→ 行(ぎょう)もまた禅、座(ざ)もまた禅, 語黙動静 体安然(ごもくどうじょう たいあんぜん)입니다.
사실상 오역을 바로 잡으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네요. 도무지 한자가 안 들려서, 며칠동안 고민하며 스페인어판과 중국어판 자막을 살펴보다가 중국어판 자막에서 한자를 알았네요.
원문은 行亦禪 坐亦禪(행역선 좌역선) 語默動靜體安然(어묵동정체안연)이라는 중국의 증도가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걷는것도 선, 앉는것도 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할때도 편안하니, 언제 어떠한 것도 선(禪)이라고 번역해야겠습니다.
조금 더 쉽게 의역하자면, 걷는것도 참선, 앉아있는 것도 참선, 삶의 전부가 참선이니 모든 것은 참선이라고 하면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현악스님 : "신(信)과 멸각(滅却)하면" 라는 말은 알고 있나?
와카나 : 신(信)과 멸각(滅却)하면, 불(火)도 다시 시원하다
현악스님 : 아니 바르게는, 불(火) 물(物)아니니 시원하다'라고 한다
와카나 : 처음들었습니다
→ 心頭滅却すれば火もまた涼し입니다.
심두(心頭)를 멸각(滅却)한다면 불도 또한 시원하다라고 하는게 맞는데, 심두멸각이라는 것은 생각을 없앤다는 이야기입니다. 국내에서도 심두멸각(心頭滅却)이면 화중유량(火中有凉)이라는 한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에서 많이 인용되는 문구이고 애니에서도 가끔 인용되는 말(ex: 아이돌마스터 애니메이션)인데, 원문은 중국의 시(詩)이고 오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문의 절을 불태울때 주지스님이 이 말을 인용하고 죽었다고 해서 유명합니다.
현악스님: 그 옛날 제 특사 해상자위대 다이토 콕시가 좌선을 짜고
오고가는 사람에게서 등쳐먹는 녀석들과 싸웠던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요는 가라앉고, 그 마음을 노래로 남겼다
"좌선하면, 사상(史上) 강정(强情)의 다리 위에 오고가는 사람을, 서로 보아가며"
어떤가?
꼭 그대의 생각과 겹치겠지.
와카나 : 저의 생각과...
→ 大徳寺の開祖 大燈国師が座禅を組み、行き来する人に揺すられる心と戦ったことがあった인 것 같습니다.
뜬금 옛날에 자위대가 있었나 싶었기도 하고, 좌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은 승려라는 것인데 이상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다이도쿠지(大徳寺:대덕사)노 카이소(開祖), 다이토 콕시(大燈国師)인 것 같네요.
번역하자면, 그 옛날 교토의 대덕사(다이토쿠지)를 창립한 대등국사(다이토 국사:大燈国師)가 좌선하여 오고가는 사람들에 흔들리는 마음과 싸웠던 적이 있었다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등국사는 일본어 위키로 찾아보니 宗峰妙超 (종봉묘초:しゅうほう みょうちょう) 라고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스님이고 교토의 대덕사(다이토쿠지)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사상 강정의 다리라는 시 부분은
禅せば 四条五条の橋の上 往き来の人を深山木(みやまぎ)に見て가 맞습니다.
교토의 시조(四条)와 고조(五条)의 다리. 지금도 교토를 가면 교토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가모강(鴨川:가모가와)에 시조대교와 고조대교가 있습니다.
"좌선하여, 교토의 시조와 고조의 다리 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숲속의 나무처럼 바라보고" 정도로 번역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이어서 소개되는 것처럼 오가는 사람을 숲속의 나무들로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대등국사는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시의 후렴을 정정하는 부분도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좌선하여, 교토의 시조(四条)와 고조(五条)의 다리 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座禅せば 四条五条の橋の上 往き来の人を そのままに見て)
현악스님과의 화두에서 깨달음을 얻은 와카나의 장면에서 와카나와 스님이 서 있는 다리는 고조대교(五条大橋)입니다. 올 여름에 교토에 가게 되면 들러볼 생각입니다.
<#5>
와카나 : 예(例)의 사랑에 실패한 그 남성분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행복하게 되었을까요?
현악스님 : 아마도 행복하겠지
뭐라 해도, 그후 불문에 들어가 그리고 친한친구의 진실 최고의 쿠즈키리를 먹고있으니깐
→ 親友の孫(まご)と、最高のくず切りを食べておるのだからな입니다.
진실(真:마코토)과 孫(まご:마고)하고 발음이 비슷해서 오역한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와카나편인 6화의 최고 반전이자 화룡정점인 부분이었는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오역되었습니다.
바로잡자면,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그리고 이렇게 친구의 손녀와 최고의 쿠즈키리를 먹고 있으니깐입니다.
현악스님이 와카나에게 들려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 이야기는 결국 현악스님 자신의 이야기였고, 와카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와카나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매로 결혼하였다고 할머니에게 물으면서,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미혹됨없이 서로 조금씩 알아가면서 사랑을 키워갔다고 (= 연애과정 없이 서로를 모르고 중매결혼했다고) 지레짐작을 했는데, 그 말에 와카나 할머니의 미묘한 표정의 의미를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는 부분이지요.
저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센티저니 6화 와카나편을 보고 있으면 일본의 선불교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20여분동안 여고생이 스님과 선문답을 하면서 번뇌니 사랑의 실존이니 자기애와 자아라던지 사랑의 영속성이니 철학적 주제를 심도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자면, 미소녀 애니메이션이라는 탈을 뒤집어 쓴 불교 철학만화나 다름이 없네요.
센티저니 12화중 6화 와카나편이야말로 저에게는 지금도 각본의 최정점에 서 있는 명작인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와카나편 오역부분과 스토리 리뷰를 블로그에 정리할 계획입니다.
첫댓글 오랫만입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어설트님 예전에 기타라던지 앰프라던지 총기류라던지 주제로 이야기했던 생각이 나네요. 여전하신지도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건승을 기원합니다.
@山本 るりか 와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MSN메신져상에서 뵈었던 걸 생각하니 정말 좀 시간이 지난 것 같네요 ㅡ
신유미라는 캐릭터로 처음 접해서, 루리카님 블로그에서 기차이야기 올리시던거를 간간히 보던게 기억나네요. 잘 지내시죠?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기차 좋아하고 뜸하지만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