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휘자에 대해서 아는부분이 없는것 같아서..
고클래식의 자료를 가지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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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휘자 - 1 - 금난새
1947년 9월25일 부산태생으로 아버지이신 금수현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우연히 훗날 금난새의 청소년음악회의 모델이된
AFKN에서 번스타인이 지휘하고 진행하는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시청 하고 부
터 번스타인을 모델로 삼고 지휘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63년 서울 예고로 진학
하였고 2학년때 서울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데뷔함으로서 주위사
람들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 받았다. 그후 1966년 서울대 음대에 진학 작곡법
을 배웠고 지휘에 대한 관심과 애착으로 1970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예술대
학에서 지휘법을 라벤슈타인 교수에게 지휘를 전수 받았다. 77년 카리얀 지휘
콩쿨에서 드뷔시의 바다를 연주 하여 1등은 없이 2위는 러시아인 3위는 폴란드
인 4위는 금난새 였다 하지만 2,3위는 현역 지휘자였고 금난새는 학생의 신분
이었다. 당시 신문엔 "캬리안의 등수는 정치적이다. 나라크기에 따라 발표했
다"라는 평이 실리기도 했다 그후 입상기념 연주회에서 폰 베버의 마타의 사
수 서곡으로 베를린 필을 연주 했다. 그후 80년 국립교향악단 부지휘자격인 전
임 지휘자(최연소)로 국내에서 본격적인 지휘 활동에 들어갔다. 1981년엔국립
교향악단이 KBS교향악단으로 되면서 KBS교향에 상임지휘자로서의 활약후 국내
첫레코딩(스튜디오)을 녹음을 하였다. 1988년2월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연주
로 그의 역량은 더욱 빛이 났으며 KBS에서 13년간의 지휘자를 그만두고 수원
시향으로 자리를 옮겨 청소년 음악회의 신기원을 마련하여 많은 학생들에게도
친숙한 클래식을 안겨 주었다. 현재는 클래식벤처 1호인 유라시안 심포니 오케
스트라를 맞고 있으며 지휘의 보급화를 위해 지휘 아카데미를 열고 있으며 경희
대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국의 지휘자 - 2 - 우종억
지휘자라기보다는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 하였고, 창작 활동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작곡가에 더 가깝다. 계명대 음대등에서 작곡이론을 지도 했고 개인 작
곡 발표회를 갖는 등 창작 활동을 하다 본격적으로 지휘한 것은 1979년 이기홍
의 뒤를 이어 대구 시립교향악단의 2대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부터 지휘자로
서 국내에 알려 졌다. 그는 약 8년간 대구시향의 질적 향샹과 연주량의 증대
에 발전을 가져 왔고 정기 연주 100회 기념 전국 순회와 매년 서울,부산등을
돌며 연주한 것은 당시엔 기록할 만한 연주 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균형있
는 색체감과 견고한 구성감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표정으로 작품성의 설득에 그
의 지휘의 특성을 알수 있으나 그에 대한 음반은 없다ㅣ
1983년엔 미국의 아실랜드 교향악단 객원 지휘 및 자작곡 발표
1985년 일본 기카큐슈 교향악단 객원 지휘 및 자작곡 발표
한국의 지휘자 - 3 - 김만복
한국의 관현악(교향악) 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부터
생소한 서양의 악기, 연주등 어렵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 지휘자의 빈곤이
었는데 우리나라 지휘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김만복이다
1925년 6월 대구 태생으로 해방 직후 서울로와 서울대 음학대 작곡 전공, 50
년졸업후 도미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지휘 전공하여 그 대학을 이수 하고 버클
리 음악대학원에서 6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59년부터 약 2년간 오클랜드
교향악단 부지휘자로 데뷔하였고 미국의 버크샤이어 페스티발 오케스트라를 지
휘 호평 받았다. 61년 서울로 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후 약
10년간 서울시향의 모든 기초기능 및 매끈한 음새 유창한 음향의 흐름이 고유
한 체질로 자리 잡힌 것도 김만복의공이라 할수있다. 70년 서울시향을 사임
후 명예지휘자로 객원 지위 하였고 세종대,숙명여대에서 교편 생활을 했다
그 후 83년 kbs교향악단 총감독으로 다시 지휘 하며 그이 온화한 성격으로 과
거 서울 시향이나 kbs나 단원들과의 관계가 원만 하였고 강인한 기질과 다이나
믹한 음폭이 큰 작품보다는 악보에 충실, 서정적 표현에 능한 낭만성이 강한
지휘자라고 할 수있다.
그의 음반중 1991년 8월 26일 안익태의 달 기념음악회 공연실황 반인
한국환상곡(kbs교향악단,성남시립합창단,안양시립합창단)이 알려지지 않은
명반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지휘자 - 4 - 정명훈
1953년 서울 태생 음악가족 출신으로 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린리스트 정경화
그는 피아노 주자였읍니다. 7살때 서울 시립교향악단과 협연 하였고 68년 도
미 후 뉴욕의 맨스음악학교에서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피아노를 카를 벰버서에
게 지휘를 배웠다. 1973년 뭔헨 콩쿠르에서 피아노로 2등으로 입상후 안드레
피레빈이 지휘한 런던 교향악단과 협연 하였다. 74년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서 피아노 부분 2등, 75년 리즈 구제 피아노 콩쿨에서 4등후 일본,유럽각지에
서 피아노를 연주 하기 시작 했다. 그후 1975녀부터 3년간 줄리어드 음악원에
서 지휘법을 공부하면서 지휘한 오페라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지휘로 호평을 받
아 각지에서 상연(지휘)를 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로스엔젤러스 필하모닉의 수
석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어시스턴트 지휘자가 되었고 82년 3월 8일
에서 11일까지 로스엔젤러스 필의 정기 연주회는 크라우스가 지휘하기로 되었
으나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자 갑자기 지휘자를 찾다가 오케스트라 당국은 당
시 부지휘자인 26세의 정명훈을 지명 하면서 5일여의 잛은 리허설후 라흐마니
노프의 피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베토벤의 운명으로 정식 데뷔하면서
부터 지휘자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약력으로는
80년에는 로스엔젤레스 필 부지휘자
86년 시몬 보카네그라 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
88년 프레미오 아비타상 수상
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취임
89년 이탈리아 토스카니니 지휘자상 수상
92년 피렌체 테아트로 코뮤날레 수석 객원지휘자로 취임
95년 대한민국 금관훈장 수상
96년 일본평론가에 의해 '올해 최고의 연주자'로 선정
97년 로마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및 아시아 필하모
닉 상임지휘자
98년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2000년 5월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닉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2000년 6월 일본 도쿄 필하모닉 특별 예술고문 등을 역임
에피소드 : 정명훈처럼 대리 지휘 후 알려진 지휘자들이 많다.
위에서와 같이 크라우스 병이나자 정명훈이 대리 하였고, 토스카니니가 브라질
의 리우데자네이루 오케스트라의 첼리스였을때 지휘자가 사고로 지휘하지 못하
자 대리 지휘로 절찬을 받고 데뷔 하였으며, 번스타인는 브루노 발터의 대리
지휘로, 주빈메타는 마르케비치의 대리 지휘로 데뷔하여 유명해졌다
한국의 지휘자 - 5 - 홍연택
1927년 12월8일 출생. 서울대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후 빈 아카데미에서 데이비
드교수로부터 지휘법을 공부했다. 귀국후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와 국립교
향악단 부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뉴욕 필하모니 홀에서 뉴 월드 심
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 데뷔 공연에서 호평을 받았다. 1972년 국립교향
악단의 2대 상임지휘자로 취임 후 부터 홍연택 개인이나 국립교향악단으로서
나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79년 1월 국립교향악단과 미주 순회연주에 올라 한
달여에 걸쳐 22회를 연주 하였으며 귀국길에는 도쿄에서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
쳐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81년8월 국립교향악단이 KBS로
이관되면서 사임하고 85년 3월 과거 국립교향악단 단원과 신인주자로 구성되
고 홍연택 자신이 음악감독이 됨으로서 탄생한 순수 민간 단체인 코리아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다. 그는 지휘자로서 활동적이고 기질이 강한(고집스럽
다)면모로 소신껏 밀고 나가고 누구보다도 냉철한 판단력과 자아 비판력도 견
비했다. 또한 지휘는 엄격하기로 유명하고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않으며 규
형잡힌 음악적 조화를 추구하며 정감의 표현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견실하게 처
리한다. 그의 음악이 약간 무겁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무게있는 깊은 서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그는 작품도 발표하였는데 대표적인 오페라 "논개", "시집가는 날",
칸타타 "새마을 찬가", "영광은 우리의 것"등이 있다.
한국의 지휘자 - 6 - 강수일
1946년 출생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지휘, 작곡 전공 재학중 미시간 주립대 교향악단 지
휘자로 활약 귀국 후 계명대교향악단 지휘 1987년 3월 대구시립교향악단 우종
억의 후임으로 3대 상임지휘자로 취임(전문 단체의 상임은 처음)
그는 박력과 의욕으로 활기 있는 합주 풍토를 조성, 신선한 감각을 창출 고전
에서 현대 작품까지 넓게 소화하는 노력의 지휘자이다
한국의 지휘자 - 7 - 김선주
1923년 10월 5일생
1962년 경희대 음대 졸업후 1963년 KBS 교향악단의 부지휘자가 되면서부터 지
휘자 생활을 시작하며 지휘의 기초를 다졌다. 1965년에 경희대 음대 교수 및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하였고 1978년 비영리 단
체인 고려교향악단을 창단 상임 지휘자로 활동, 78년 서울 청소년교향악단 상
임지휘자로 겸임 하였다. 그후 85년엔 경희대 학장까지 맡으며 국내 여러 교향
악단의 객원 지휘, 여러 오페라단의 오페라 지휘 등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는
큰지휘의 방향은 아니지만 꼼꼼하고 셈세하고 세심하며 고전과 낭만 작품에 능
해 서정적이고 표정적 표현을 잘 하는 지휘를 한다
한국의 지휘자 - 8 - 한병함
한양대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독주자로서 활동을 하다 오스트리아 빈 국
립대에서 페터 슈바르츠와 쿠르트 뵈스에게 지휘를 배웠다.
부산방송교향악단 지휘를 맡았고 부산시향의 2대 상임지휘자로 취임 하면서 부
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 하였고 바로크 플루트 4중주단을 조직,센추리교
향악단, 대만 대북 시립교향악단, 필리핀 필, 대만교향악단등 객원 지휘를 하
면서 부산 동아대교수, 85년 창단된 울산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는 성실한 지휘자세와 표현 양식이 두드러지고 음악의 흐름을 유리하게 해가
는 연주법을 구사하고 현과 관의 균형있는 조화등 연주 기능에 항시 노력한다
한국의 지휘자 - 9 - 임헌정
서울대 음대 작곡과, 줄리어드음대에서 지휘,작곡 전공
그는 항상 '처음',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
학 시절,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를 한국 초연하였고, 1974년 제14회
동아콩쿨에서는 작곡 부문 최초의 대상 수상자, 그리고 문화체육부가 지정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음악 부문 제1회 수상자의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줄리어드 시절 재미 한국인으로 구성된 오페라단과 에밀레실내악단의 음악 감
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84년 6월 링컨센타에서 모짜르트 오페라 마
적을 지휘하여 뉴욕의 평론가로 부터 찬사를 받아 국내에 알려 졌음.
국내 여러 교향악단의 객원지위와 kbs교향악단의 부지휘자, 서울대 음대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 88년 국민 화합 음악제 전국연합교향악단(전국 교향악단 총망
라)의 지휘자로 선정 되었고 한국음악사상 국내 교향악단으로는 처음으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의 시작하였고 2000년에는 말러 교향곡 시리즈과 함께, LG아
트센터의 개관기념 연주회, 세 번에 걸친 브람스 페스티발에, 2000년 일본에서
열렸던 아시안뮤직페스티발 개막 연주에서 도쿄심포니, 호롤룰루필하모닉오케스
트라와 독일에서 가장 오랜된 프로 교향악단인 바덴바덴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지휘등을 하면 점차 세계로 뻔어 나가고 있다. 임헌정은 얼마 전 독일의 만하임
음대와 서울대음대 연합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Mannheimer Morgen지와 Die
Rheinpfalz지로부터 "서울대 음대 임헌정 교수의 섬세하고 정확한 지휘 하에 부
드럽고 풍부한 현악기의 음색과, 독특하고 인상적인 관악기의 음색은, 마치 굴
절거울 속에서 환상적이고 풍자적인 모습이 겹쳐져 비추어지는 일종의 상상 속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평했다. 현재 부천시립교향악단,서울음대교수를 맡고 있
다.그는 깔끔한 음향의 연출, 예리한 감각, 생동감을 주는 지휘자이다
한국의 지휘자 - 10 - 원경수
1928년생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작곡, 신시네티 음악원에서 바이올린, 인디아나 대에서
바이올린 지휘법, 오스트리아 잘스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지휘법을 전공하였다
뉴올리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미국머데스토 교향악단 미국 스타턴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 또한 겸임으로 서울 시향을 맡았었고 그
후 kbs 상임을 맡으며 kbs를 보다 원숙하게 가꾸었다. 그는 "음악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은 정확하고 완벽한 연주에 있다"는 신념으로 세부까지 잘 다듬
고, 한 음도 소홀치 않고 통솔력이나 능력이 있는 지휘자이다. 특히 그는 시간
이 허락 하는데로 외국의 유수 교향 악단의 객원 지휘를 해왔다 .
한국의 지휘자 - 11 - 곽 승
경희대 음대 기악과 출신으로 재학중 kbs에 트럼펫 주자로 활동하였고 이전 서
울시향에 16살때 트럼펫 주자로서도 활약을 했다. 뉴욕 매네스에서 지휘 전공
후 뉴욕 시립 조프리 발레단 전임 지휘자, 링컨 센터 실내악 협회 지휘자를 지
내다 77년 그 유명한 로버트 쇼에게 발탁되어 약 3년간 아틀란타 교향악단에
서 활동 하였으며 80년 로린 마젤에게 다시 발탁되어 클리브랜드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활동 하였고 1983년 텍사스의 오스틴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14년간
재직하다 부산시향으로 자리를 옮긴 지휘자이다. 그는 세계의 유수 교향악단
(시카고교향악단,워싱톤 내셔날 교향악단, 빈 교향악단 등)의 객원 지휘 하였
으며 한 음도 소홀치 않는 지휘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약간의 중후한 연주로 지
적인 지휘자로 유능한 지휘자로 인정받는 지휘자 중의 한사람이다.
한국의 지휘자 - 12 - 박은성
1945년생 인 그는 서울대학교 음대 기악과, 빈 아카데미에서 지휘 전공, 국내
에서 임원식, 오트마 수이트너에게 지휘를 배웠다. 국립 교향악단 수석 바이
올리니스트, 25세때인 1970년,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로 데뷔, 서울 시립 교향
악단과 서울시립 청소년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현재는 수원 시향 및 서울 음
악대학, 한양대 음악대학, 단국대 음악대학등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생리, 기능을 적절히 소화해내며 정확한 음원을 추구하고
있으며 오페라 지휘에서도 재능을 인정 받고 있다.
한국의 지휘자 - 13 - 안익태
1906.12. 5~1965. 9.17
삼일절에 즘해서~ 국내에서는 작곡가로 알려 졌지만 정확히 말하면 지휘자이다
평양 출생, 30년 동경 쿠니타치 음대 첼로 전공, 35년 필라델피아 음악학교
에서 독일인 첼리스트 벨크마이스터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그 후 신시내티 교
향악단의 제1첼로 연주자로 발탁이 되면서부터 그의 음악활동은 본격화되기 시
작하였다. 신시내티 교향 악단의 지휘자인 스토코프스키는 안익태를 통하여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데일리 뉴스지에서는 안익태의 첼로 연
주에 대한 평을 '놀랄만한 기교와 부드러운 소리'라고 칭찬까지 하였다. 28세
때 헝가리에서 안익태는 조르당 코다, 빈에서 펠릭스 바인가르너, 스트라우스
에게 지휘를 배웠고 스트라우스는 안익태를 부지휘자로 유럽 악단에 데뷔시켰고
, 지휘자로서의 길과 36년 완성된 애국가완성으로 유럽에서는 지휘자의 명성
(로얄 필,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베를린 필, 로마 산타 체실리아 심포니
등 객원 지휘), 으로 일제 강점기에서는 올드 랭 사인의 애국가가 아닌 진정
의 애국가로 사랑을 받고 몰래 전파가 되었다. 그후 1938년 한국 환상곡 완성
을 하였고 더불린에서 초연(지휘 부다페스트 브카레스트 소피아) 42년에는
로마에서 직접 지휘하였고 2차대전 후 스트라우스가 전범으로 체포되자 안익태
는 스페인으로 옮겨 마요르카에서 결혼과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재
임하였고 48년에는 애국가가 정식 대한민국 정부의 애국가가 채택이 되었다.
55년 이승만 80세 생일기념 음악제에 초대되어 한국환상곡 지휘하였고 62년 서
울 국제 음악회 시작을 하였지만 국내 음악계의 질시와 경제적 요건으로 3회로
끝이 났다. 65년 사망, 문화 훈장을 받았고 77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에 안장
되었다.
작품으로서는 "한국 환상곡", "페르노스탱", "파스토랄", "강천성악",
"논개"등이 있고 그는 일정때 한국환상곡으로 여러나라에 우리말로 연주하여
한국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린 음악을 통한 애국지사(베를린 필하모니
와 합창단으로 환국환상곡 지휘 등)이다.
-한국환상곡의 합창 부분 가사-
우리 대한 만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화려한 강산 한반도 나의 사랑 한반도 너희뿐일세
무궁화 삼천리 나의 한반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화려한 강산 한반도 나의 사랑 한반도 너희뿐일세 대한 대한 대한 만세 만 만세
무궁화 삼천리 나의 한반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 무궁화 화려한 강산 한반도 나의사랑 한반도
너희뿐일세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무궁화 삼천리 나의 한반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대한 대한 화려강산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
한국의 지휘자 - 14 - 금노상
저에게 자료가 없어 인천시립교향악단에서 퍼 왔읍니다.
서울예고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비엔나 국립음악학교에서 그곳 교수이며 당
시 동베를린 국립오페라 좌 음악감독 겸 지휘자인 Otmar Suitner의 문하에서
1980년 ~ 1985년 동안 사사하여 지휘 디플롬을 받았고 오페라 전문지휘 과정
인 Korrepetition Praxis을 1980년 ~ 1986년 동안 지휘과와 복수 전공 하
였다. 국외에서는 톤퀸스틀러 오케스트라, 비엔나프로아르테 오케스트라,
Maccedonia Chamber Orchestra, Maccedonia 국립오페라단, 상하이교향
악단, 대만성립교향악단 등을 지휘 하였고 귀국후 KBS교향악단, 서울시립교
향악단을 비롯해 부산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 등 전국의 시립교향악단
을 지휘하였고 국립오페라단, 한국오페라단, 광주오페라단 그리고 실내악단인
서울바로크합주단, 서울심포니에타, 광주심포니에타 등을 지휘하였다.
1989년 ~ 1994년 2월 까지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만 5년이 넘는
재임기간을 통하여 광주시립교향악단을 도약시킨 평가를 받았으며 1994년부터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예술감독겸 상임지휘자로 활동중이다.
한국의 지휘자 - 15 - 정재동
1928년 원주 출생 후 원주농고 졸업후 서울대 음대 피아노전공, 52년 교편생
활과 동시에 서울 중앙방송 피아노 주자, 57년 해군 정훈실 합창단, 63년 서
울합창단, 64년 수도 합창단 지휘, 동년에 국립교향악단 객원 지휘후 지휘자로
서 알려지기 시작 하였고 65년 국립오페라단에서 아이다, 라보엠등을 지휘 하
여 그의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그무렵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대로가서 본
격적인 지휘를 공부 하였으며 71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로 본격적
으로 지휘자로 활동 했으며 74년 원경수 후임으로 서울시향의 본격적인 상임지
휘자가 되어 88년에는 처음으로 서울시향과 유럽 순회 공연을 감행 하기도 했
다. 또한 한양대 음대 교수, 중앙대 음대 학장, 전문 지휘자 양성을 위해 지휘
자 세미나를 개최 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을 섰다. 그는 부지런하고 창의적이
며 자신의 소신을 펼쳐 새롭고 신선한 생동감을 주는 연주를 펼치는 지휘자이
다
한국의 지휘자 - 16 - 이남수
30년 1월 1일 서울 태생
서울대 음대 작곡과, 맨하탄 음대,대학원 지휘 전공
56년 창단한 KBS교향악단 부지휘자로 지휘자의 활동시작,
69년 국립교향악단 전속 지휘자로 활동 오페라 위주로 활동, 서울대 음대 교
수, 미시간주립대 교환교수,창악회(작곡 단체)회장 한국음악 협회 이사장 역임
그의 음악은 명괘, 합리적인 구성으로 깔끔하며 전체 흐름에서 깊은 내용보다
음악의 객관성을 지휘 한다.
에피소드 2.
KBS 교향악단은 56년에 창단 되었지만 국내 연주자의 부족과 음악계의 갈등으
로 69년 국립교향악단소속으로 약 12년간 활동 했다. KBS의 많은 투자와 국내
연주자들의 실력 향상등으로 81년 8월 제2의 창단으로 오히려 국립교향악단이
KBS로 이관 되었다.
한국의 지휘자 - 17 - 오태균
22년 4월 27일 공주태생
도쿄 구니다치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후 서울 관현악단, 해군정훈음악
대 주자, 육군 군악 악단 교관, 부산 실내 악단을 조직 운영하였다.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한 것은 부산지역의 동호회적인 모임으로 연
주인들이 조직된 관현악 악단이 부산시의 배정 지원을 받든중 부산시 소관으로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창단과 초대 상인지휘자로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부산시향
으로 개편하는데 성공 62년 11월 정식으로 창단을 맞게 되었고 그후간 10여년
간 부산시향의 연주활성, 운영개선등에 노력으로 부산시향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바이올린 독주회 또한 많이 열었고 동아대학, 부산여대 등에서 후진양성
에 힘썻으며 그이 지휘는 강직하고 꼼꼼하고 건결한 연주로 세부까지 배려해 곱
게 다듬는 지휘자로 알려졌다
한국의 지휘자 - 18 - 이기홍
1926년 2월 5일 경북 영천출생 대구에 관현악운동의 선구자로 지방 교향악단
을 조직 지역 음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지휘자이다.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빈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배웠다. 55년경부터 대구
에서 소규모 관현악단을 조직 활동하다 대구교향악단을 창설, 비영리 단체로
연주활동을 하다 대구방송국으로 확대 개편 후에 방송과 연주 활동을 했으며
64년11월 그의 노력으로 대구시의 행정 지원을 받는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이
관 창설 시켰으며 초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 하였고, 연주무대는 대도시 위주보
다 당시의 소도시를 위주로 연주했으며 고전음악을 알렸다
79년 4월 부산 시향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부산시향 내의 분규로 인하여 1년
여만에 악단이 해체되자(다시 재편성 되었다) 사임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그후 경성대 음악과에서 후배를 양성했으며 그의 지휘는 방대한 힘과 양감이 넘
친 음향을 울리는 기량이 놀라왔었고 기복있는 뉘앙스로 낭만을 노래해가는 음
악성이 뛰어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관현악 운동에 열의는 대단한 지휘자였다
한국의 지휘자 - 19 - 김생려
우리나라 관현악이 시작된 초창기 부터 주도적인 활동과 지휘자계통에 선구자적
인 원로의 한사람이자 증인이기도 한사람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리스트로서 일
제시대때부터 활동하였고 1945년9월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의 바이올린주자로 활
동 했으며 고려교향악단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자신이 주동이 되어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을 모아 서울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운영자이자 바이오린주자 겸 지휘자
로서의 활동을 시작 하였고 1948년에는 고려교향악단의 주자 외로 모집을 하
여 약 70여명의 2관 편성인 교향악단의 규모로 편성하며 고전음악의 알리다는
취지로 완전히 지휘자로 전향을 하였다. 6.25후 악단이 와해되자 서울교향악
단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해군당국의 주선으로 해군 정훈음악대로 재편성을 하
여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제1회 연주회를 서울시 공관에서 지휘하였고
1954년 해군정훈음악대를 해군교향악단으로 개칭, 우리 군 최초로 1957년 3월
에는 동남아 순회 연주를 하였다. 그 후 김생려는 악단의 운영상 재정, 기구운
영을 서울시에 소관 이관하는게 올바른 생각을 하여 1957년 8월 서울시립교향
악단으로 발족 하였고 성공하였으며 1961년 사임때까지 서울시의 운영과 연주
기량등의 기초를 닦는데 이바지 하였다.서울시향 사임후 한때 예그린악단의 지
휘를 맡았고 미국과 국내의 여러 교향악단을 내왕 지휘하였다.
그의 지휘는 두르러진 개성이나 특성은 없지만 전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통솔
과 구성을 무난히 이끌어 가는 대범한 연주를 한다
한국의 지휘자 - 20 - 박종혁
1942년생 클라리넷주자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클라리넷 독주회를 가진 사람이다
서울예고, 경희대 음대 졸업후 클라리넷 주자로 교향악단에서 활동하고 독주가
이었고 64년 미국으로가 뉴욕 브리지포트 대학 음대, 얀크턴 대학, 훈터 대
학, 맨하탄 음악 하교 하계학교에서 지휘법을 연수하였고 뉴욕 한인 오케스트
라와 합창단을 지휘자로 데뷔 하였고 뉴욕 음대 관현악단을 지휘 하기도 했다
1975년 뉴욕에서 재미 음악인들로 구성된 서울실내합주단을 창설, 음악 감독으
로 5년간 이끌며 매년 카네기 홀에서 4회의 연주회를 가져 뉴욕타임즈의 호평
을 받았으며, 같은해에 카네기홀에서 클라리넷 독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80년 귀국 후 계명대 음대, 영남대 음대에 재직하면서 객원지휘를 하였으며
1983년 재창단된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부산시향을 단시
간만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1983년 부터는 서울,대구,광주등 지방
순회공연을 매년 실시 했고 1988년엔 중앙 교향악단을 제치고 아름다운 음악
을 창출하였다고 격찬을 받기도 했으나 다음해인 89년 부산시향을 사임하였다
그는 다채로운 표현법과 서정 짙은 정감으로 음악을 꾸려 주었고 관현악의 생리
를 잘 파악 하여 다양한 색체감과 음폭이 큰 표정으로 흥취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지휘자이다.
한국의 지휘자 - 21 - 박영호,장윤성
지휘자 박영호는
계명 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후 합창 음악에 뜻이 있어
독일 Frankfurt 음대 및 Stuttgart Bach Academy에 유학하여
세계적인 합창지휘자인 Helmuth Rilling 에게서 사사를 받았으며,
또한 미국 New Mexico 주립 대학원에서는 합창 지휘 및 성악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대학원 재학 중에 음악 대학 합창단인
Concert Chorale 의 상임 지휘자 ('90~'92) 및 John Clark 교수가 지휘하는
Concert Choir의 부지휘자로 2년간 활동하였으며
또한 한인 여성 합창단 ('90~'92) 등을 창단하여 지휘하다가
귀국하여 계명 대학교('92~'97) 안동 대학교('93~'97),
대구 예술 대학교('94~'96), 신일 전문 대학('93~'96) 그리고 부산 예술 고등 학교
('96~'97) 등에 출강하여 지휘법을 강의하며 성악과 합창단을 지휘하였고,
안동 남성 합창단 ('94~'97), KBS 대구 어린이 합창단('96~'98) 등의
상임 지휘 및 포항 시립합창단('96. 9)을 객원 지휘를 하였고,
울산 시립 합창단('97~'99)의 상임지휘자를 역임 하였다.
지휘자 장윤성은
서울예고·서울음대 작곡과 졸업 서울예고·서울음대 작곡과 졸업
서울음대 대학원 지휘과, 비인국립음악원 지휘과 (사사 Leopold Hager),
러시아 국립 림스키코르사코프 음악원, 러시아 키로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부
중앙('86. 2위, '87. 1위)·동아('85)·창악회 작곡 콩쿨 입상
러시아 쌍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열린 제1회 프로코피에프 국제 지휘자 콩쿨 2
위 입상 ('93)
제 11회 동경 국제 음악 콩쿨에서 1위 없는 2위 입상 ('97)
ARS 챔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활동
제31회 난파음악상 수상
현재 울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객원
지휘자이다
한국의 지휘자 - 22 - 류석원, 이숙형, 이경구
류 석 원
관동대 음악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음악과 클라리넷 전공
단국대 대학원음악과 오케스트라 지휘전공 졸업
불가리아 국립 소피아음악원 지휘과 졸업
불가리아 국립 소피아음악원 지휘과 박사과정 졸업
현재 강릉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관동대 교수
이 숙 형
단국대 음악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음악과 졸업
이태리 Firenze 국립음악원 졸업
이태리 Percara 아카데미 수학
이태리 Vicenza 교회음악 아카데미 지휘과 졸업
서울 및 강릉 Y.W.C.A.합창단 지휘
현재,강릉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협성대 출강
이 경 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박재열, 김청묵 교수에게 사사하여 작곡과를 졸업하
고 인천시립합창단 지휘자를 역임하고 유학하여 네덜란드 마스트리히느 콘서바
토리움에서 암스텔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Anton Kersjes 와
독일 퀼른 방송교향악단 지휘자인 Jan Stulen 교수에게 사사하고 그외 이론
및 실기등 지휘과의 과정을 이수하여 오케스트라 지휘과를 졸업하였으며, 독
일 데트몰트 음악대학에서 지휘과를 수료하였고 이태리Imternationale
Meisterkurse, 이태리 Musica Riva 지휘자 과정 공부
현재 인천시립교향악단 지휘자, 평택대학교 교수, KBS 열린 음악회 클래식 전
임 지휘자로 활동중이다.
한국의 지휘자 - 23 - 임원식
1919년 6월 24일 평안북도 의주 태생이며 동경음악고등학교(지휘전공)를 마친
후 45년 하얼빈교향악단에 입단, 지휘자에 데뷔하였다. 해방 후 46년 당시에
계정식, 현제명, 김생려 등이 중심이 되어 고려 교향악단을 조직 초대 상임지휘
자 이기도 하며 고려교향악단의 재정난으로 해산하게 되자 미국 줄리어드에서
지휘연수를 하고 48년 수료 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엔 육군의 지원을 받아 육군교
향악단을 조직 활동하였고, 56년 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KBS 교향악단(당시임원
식 그의 교향악단이나 다름 없읍)을 창단 초대 상임지휘를 맡아 모든 운영 책임
을 직접 맡아 어려운 시대를 극복 했으나 결국의 재정난으로 69년 국립교향악단
으로 이관 작업을 하였고 국립교향악단이 창단 및 초대 상임으로 지휘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가장 전성기와 화려한 생활을 보낸 시기라 할 수있다.
72년 국립의 사임 후 하이델베르크, NHK, 오사카, 뉘렌베르크, 홍콩, 베를린 교
향악단등을 객원지휘하였으며 유능한 음악 영재 교육을 위해 서울예술고등학교
를 설립과 동시에 초대 교장을 역임 했고, 경희대 음악학장을 맡기도 했다.
1984년 12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재건의 목표로 상임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지휘자로서의 오랜 연륜과 풍부한 경험, 통솔력, 합주 기능의 정교성은 타의 추
종을 불허하며 내용성또한 원로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
또한 당시엔 지휘를 전공한 사람은 두사람인데 한사람(안익태)는 유럽에서 활
동 했고 유일하게 국내에 지휘를 전공한 사람은 임원식 뿐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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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이론
한국의 지휘자!
00: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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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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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익태 선생님 으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만세 만세 만세 모냐고~~~으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