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연중 제4주간 목요일
1열왕기 2,1-4.10-12 마르코 6,7-13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제자들을 보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마귀를 쫓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수동적 태도에 머무를까 염려하신 것이 아닐까요?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해 주신다면,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할수록 오히려 능동성을 잃고,
점점 의존적으로 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게 마련된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 가운데 그들을 파견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책임을 느끼며, 고난 속에서도 성장하고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또한 복음을 전하라고 세상에 파견된 이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이 하면 되지요.” 또는 “먼저 저에게 기쁨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태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요?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부족하다며 불평하고,
복음을 전하기보다 불만을 토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물질과 세속의 기쁨에만 집중한 나머지,
주님께서 맡기신 고유한 사명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족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제자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사람을 착각하거나 잘못 부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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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4주간 목요일
1열왕기 2,1-4.10-12 마르코 6,7-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여행을 떠나는 열두 제자에게 여장을 꾸릴 때의
규칙을 일러 주십니다. 온갖 위험과 어려움이 예견되는 여행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까닭은 제자들이 이 길에서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느님뿐이심을 기억하고 인간적인 모든 보장과 안전을 포기한 제자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체험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라는 복음을 누구보다 힘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길”은 보통 ‘제자 직분의 길’을 의미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길을 떠날 때” 주신 규정은 곧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요구되는 지침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 모두에게 청빈의 삶을 권고합니다.
청빈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의 표현입니다. 이 신뢰는 세상의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의 뜻을 담대히 따를 수 있게 합니다.
교회가 주님께서 이르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수행하려면
불필요한 것들에서 가벼워져야 합니다. 움켜쥔 것이 많을수록 그 무게는 교회의 자유를 짓누르고,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을 더욱 키울 것입니다. 교회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할 듯한
헛된 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마련하신 더 좋은 것들을 얻을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하여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진 교회, 그래서 주님의 숨이 부는 대로 자유롭게
길을 떠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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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4주간 목요일
1열왕기 2,1-4.10-12 마르코 6,7-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가난으로 선포하는 기쁜 소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6,7).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줍니다(6,12-13).
이렇듯 제자들은 누구든지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주님의 자비를 전하고 선포할 소명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삶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고백하도록 불렸습니다. 어떻게 이 사명을 실행해나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 지팡이는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을 막는데, 신발은 돌이나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발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은 부유한 이들의
행동이었기에 금하셨습니다. 이는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아우구스티누스)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음선포에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철저한 가난이야말로 하느님의 풍요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가난이야말로 복음선포의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표지이지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비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기쁨은 가난이 아니고서는 선포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증거하는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하지 못한 듯합니다.
정치권력과 부당하게 결탁하고 사업을 벌여 재력을 키우며, 선교도 교회 유지도 돈을 앞세웁니다.
빈부격차에 따른 신자들 사이의 소외와 위화감 형성, 교회 세습화 등으로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로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에 파견된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라 하십니다(6,11). 가난한 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관상하고, 내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이지요(6,12).
사랑이신 주님과의 뗄 수 없는 견고한 관계에 있을 때 사랑이 전파될 것입니다.
물론 복음선포가 늘 순조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6,11) 이는 누구에게나 주님의 진리와 자비를 선포해야 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이들과는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 기쁨과 평화를 선포하는 주님의 참 제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교회 또한 재물과 권력에서 해방되어 가난한 이의 참벗이 되도록 회개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catholicsb
첫댓글 아 멘. 감사합니다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여행을 떠나는 열두 제자에게 여장을 꾸릴 때의
규칙을 일러 주십니다." 아멘
평화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