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보면 정형시와 자유시의 두 가지로 된다. 자유시는 편편이 독자적인 리듬을 타고 구성된 언어조직인 까닭에 唯一回性유일회성의 형태를 지니지만, 이와는 달리 정형시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는 게 특색이다.
시의 표현에 일정한 제약이 있는 게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다만 어째서 그러한 제약이 필요한 것으로 요청되는가?생각해 보는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리라.
평생을 두고 자유시만을 쓴 시인의 경우라도 그 시인의 전작품을 통틀어 보면, 결국 그 밑바닥에 하나로 관통하는 그 시인 특유의 영혼의 구조랄까 정신의 원형을 감득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가장 특징적으로, 달리 말하자면 성공적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대표작이라는 것은 그가 유능하고 풍부한 시인의 경우일수록 결코 한두 편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의 성공한 시편들이 불러일으키는 열렬한 감명은 때로 군소시인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쳐 많은 모방과 유행을 초래할 경우도 있으리라. 잘만 되면 그 도도한 하나의 흐름에서 !
장차 새로운 시의 定型정형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모든 문화적 현상이 그러하듯 예술도 크게 보면 하나의 공동작업이라 할 만하다. 시인이 시인을, 한 편의 좋은 시가 무수한 좋은 시를 낳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필 조만간에 어떤 보편적인 가치의 기준이 설정되게 마련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의 典範전범이 성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의 정형을 시를 담는 그릇으로 비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때의 그릇이라는 것이 내용과 괴리된 물건으로서의 독립성을 갖는 기성품일 순 없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그걸 형태면에서 추상화하면 〈이목구비를 갖춘 것〉이라 할 수가 있겠으나―그 이목구비(얼굴의 형태)가 어떠한 정신(내용)으로 어떻게 혈육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독자성을 지니는 것과 같이 시의 정형(그릇)도 그것에 담긴 시인의 정신(내용)에 따라 편편이 다른 빛깔의 그릇으로 만들어질 줄 안다. 비록 그 그릇의 규격은 서로 같다고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더없이 기막힌 시의 그릇이 있다고 하자. 또 그 그릇은 누구의 전매특허품도 아니어서 뜻있는 시인이면 누구나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 갖?
?싶어한다. 그것이 바로 전범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하나의 전범으로서의 시의 정형은 때문에 시인들 전체의 공동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전범이란 하나의 정립된 가치 기준이다. 가급적 불필요한 방황과 협잡과 방자를 억제하고 완벽성에 다다르기 위해 정형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의 경우, 제약은 차라리 기꺼운 자승자박인 동시에 자유롭게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유시라는 것도 전혀 제약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건―설사 쉬르리얼리즘의 자동기술법이라고 하더라도―표현된 언어란 결과적으로 볼 때 선택된 언어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혹종의 제약, 즉 취사선택, 즉 비평의식, 즉 질서에의 의지가 작용하는 것이라 본다. 하여간 적어도 시인 자신의 영혼의 구조라는 근원적이요 무의식적인 선험적 제약마저 시인이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그렇고 이젠 그 정형시, 그 중에서도 사행시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자.
사행시란 사행으로 된 단시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인으로 이 사행시에 최초로 손을 댄 사람은 아마도 金永郞김영랑일 것?
甄? 근자에는 姜禹植강우식 씨가 많이 쓰고 있다. 형태면에서 이들에게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면 편편에 시제를 붙이지 않고 번호만 매기는 연작시풍을 이룬 점이겠다. 그런 점은 11세기 페르샤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사행시라는 뜻)와도 상통한다. 그런데 필자가 시도한 사행시엔 낱낱에 따로 제목이 붙어 있다.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시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건 나중에 생각해 낸 일이지만 그런 점은 중국의 고전시형의 하나인 絶句절구와도 흡사하다. 五言絶句오언절구이건 七言絶句칠언절구이건 절구는 四句사구로 구성된 것인만큼 가장 전형적인 사행시라 할 수 있다. 형태면에서나 운율면에서도 그처럼 완벽한 사행시형은 달리 없으리라.
무릇 모든 사행시에는 그 발상전개법에 있어 공통되는 원칙이 필히 있는 듯하다. 다름아닌 절구의 起承轉結法기승전결법! 제一구가 起句기구, 제二구가 承句승구, 제三구가 轉句전구, 제四구가 結句결구로 되어 있는 절구의 경우엔 절대적인 원칙이라 하겠으나, 이것은 어쩌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시일반에 공통되는 근원적 발상 전개의 원형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기·승·전·결을 !
좀더 알기 쉬운 현대어로 옮긴다면 提示제시, 發展발전, 轉換전환, 結末결말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시의 근원적인 발상 전개법이 가장 밀도 높게 집약적으로 담긴 시형이 사행시인 것이다. 하긴 일본에 하이꾸(俳句)라는 세계 최단의 독특한 일행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우리나라의 시조도 삼행시로 볼 수 있겠지만, 사행시야말로 단시형으로는 가장 무리없이 정제된 전형적 시형이라고 할 만한 것이리라.
그런데 필자가 특히 사행시에 착안해서 많은 작품을 시도한 것은 반드시 이러한 사행시관이 선행한 데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꾸 작품을 쓰다보니 반성이 되어 이런 생각들도 하게 될밖에……. 그렇다 하더라도 시작의 실제에선 어떤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본 적은 없다. 시인이 의식할 필요도 없이 기승전결이란 정서의 근원적인 리듬에 따라 전개되는 것인만큼 사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수의 제약은 즐거운 구속일 뿐 부자유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이것이 사행시로 될 만한 소재인가 아닌가 하는 식별감각은 있게 마련이다. 더러 그것이 여의치 않아 사행시를 쓰려고 했던 것이 달리 긴 시?
?둔갑을 하거나 그 역의 경우는 있었지만.
◇ ◇
그러면 이제부터 필자의 사행시 한 편을 들어 그 실제를 이야기해 보자.
通 路
눈도 코도 없는 地熱지열의 어둠 뚫고
비바람 피해 긴 초록의 터널을 달리다가
마침내 어느 날 진홍의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더는 갈 데 없네 寂滅적멸의 빛살바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화단은 온통 넝쿨장미로 덮여 있다. 그래서 유월이면 참으로 볼만하다. 무더기로 피어 있는 붉은 장미들은 선혈이 아롱져 있는 것도 같고 간간이 섞인 흰 장미들은 백설과도 같다. 코를 갖다 대며 냄새를 맡아본다. 몇 분이고 뚫어지게 응시한다. 자못 도취하여 몽상에 잠긴다. 쉬는 시간마다 나와서는 배회한다. 잠시도 그 곁을 떠나기 싫은 것이 도무지 싫증을 모르는 까닭이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장미! 맑은 기쁨을 샘솟게 하는 장미! 어쩌면 지금이 장미가 갖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지도 알 수 없다. 이렇듯 인간이 보아주지 않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장미의 순간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인간이 본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 그것은 한갓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하면서도 어쩌면 지난한 일의 하나이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꽃은 아름답다〉고 덮어 놓고 믿고 있을 따름이지 정말 자세히 보려고 한다거나 실감하고 있지는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하는 꽃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의 눈에 꽃이 그 본질을 드러내 뵐 리 없다. 일체의 분심잡념을 여의어야, 그리고 무한히 겸허한 태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비인 마음을 실현해 가진 자의 눈 앞이라야 사물은 비로소 차츰 그 베일을 벗으리라. 비인 마음이란 맑은 거울 같은 마음을 의미한다. 그 거울의 마음으로 보아야만 사물의 아름다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미를 볼 때마다 필자는 곧잘 이 본다는 순수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되씹어 보기도 하였다. 또한 그 분명히 볼수록 새록새록 샘솟는 아름다움, 그것을 시로 표현해 보고 싶은 욕망을 깨달았다. 그러나 쉽사리 써지진 않아 몇 해를 그냥 보냈던 게 생각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장미」라는 동일 주제의 사행시 몇 편이 써지게 되었는데 여기 선뵈인 「通路」는 그 계열의 첫 번째 작품이다.
꽃이 피기 전의 장미는 무엇인가? 겨울철에는 앙상하게 넝!
쿨만 남았던 게 차츰 감도는 봄기운 따라 초록의 잎이 돋고 가시가 살아나서 꽃망울이 맺힐 때까지만도 족히 서너 달은 걸리는 셈이겠다. 어떻게 그 기간도 무사히 잘 넘겨야 되겠는데. 하지만 신비스런 생명의 영위는 모든 시련을 잘도 견뎌낸다. 그리하여 어느 비 갠 초여름의 더없이 맑은 햇살을 받고 불붙듯 무더기로 장미는 피어난다.
장미의 그 신비스런 생명의 발단은 어디서부터라고 상정해야 할까? 우선 안 보이는 땅 속의 뿌리부터. 解凍해동의 땅에 地熱 지열이 일게 되면 뿌리 속에 잠자던 장미의 생명도 아주 은밀히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하(암흑)에서 지상(광명)을 향해, 즉 뿌리에서 줄기를 타고 가지와 잎들에도 머물다가 開花개화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꽤 긴 여행을 시도한다.
「通路」의 전반, 제二행까지는 이상의 상념을 담아본 것이다. 「눈도 코도 없는 地熱의 어둠 뚫고/비바람 피해 긴 초록의 터널을 달리다가」―〈긴 초록의 터널〉이라는 것은 초록의 줄기(여기서는 가시넝쿨)를 의미한다. 초록의 터널 속을 달리는 셈이니까 장미의 생명은 비바람에도 아랑곳 없이 알뜰히 보호된다. 장미의 생명의 목적은 개화이다. 햇빛 쏟?
팁測?대기의 한가운데 활짝 알몸으로 발현이 되어야 장미로서의 의의를 성취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날 진홍의 문을 열고 나가 보니/더는 갈 데 없네 寂滅의 빛살바다!」 장미의 개화를 이렇게 노래했다. 보이지 않는 땅 속의 뿌리에서 줄기로, 잎으로,―그 기나긴(?) 통로를 달리다가 드디어 마지막 관문인 꽃망울, 즉 진홍의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별안간 쏟아지는 햇빛의 사태! 환희의 절정! 광명이란 이렇게 황홀하고 무량한 것이던가. 이젠 더 갈 데도 없어졌다. 모든 소망이 이루어졌으므로. 지금 이곳이 니르바나(寂滅)인 것이다. 시 「通路」의 처음 제목은 「薔薇의 通路」였다. 그것을 후에 「通路」로 고친 것은 꽤 잘한 일인 것 같다. 너무 설명적인 詩題시제는 매력을 잃는 까닭이다. 「通路」하면 구체적이자 동시에 매우 추상적이기도 한 느낌을 준다. 이 시의 내용이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기를 바랬던 필자로선 안성맞춤의 제목인 것이다. 또한 그래서 이 시에서는 주어도 생략했고 가급적 직유는 피해 보려 했다.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것, 가시적이면서도 불가시적인 것,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것,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
?할 수 없는 有無相通유무상통의, 말하자면 그런 것이 뭇 생명 현상의 신비가 아닐까? 인간 생명의 소산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밀도 높은 고차원의 예술이 시일진대 거기엔 어떤 신비스런 속성도 있게 마련이라고 해서 망언은 아니리라. 다만 시의 신비라는 것은 靑天白日下청천백일하에 활짝 핀 장미처럼 분명히 있는 존재의 신비, 명확한 신비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