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지,나 죽으면 외상술값 좀 갚아줘.”
72년 가을 어느날,‘정치인’ 김두한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무심코 유언을 남겼다.
언제나 권력의 반대편에서 ‘주먹’과 ‘독설’로 맞섰던 김두한은 우리에게 ‘협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18세에 서울 종로통을 평정하고 주먹계 신화를 이룬 김두한의 일생을 후계자 조일환씨(65)의 입을 통해
들어봤다.
―김두한과의 첫 만남은.
▲57년 장충단 공원에서 조봉암을 경호하던 김선생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61년쯤 그의 수하로 들어갔다.
―김두한의 후계자로 부각된 계기는.
▲선생은 60년대에 이미 주먹계를 완전히 떠나 있었다. 5·16 직후 ‘애국단’을 조직해
재기를 노렸지만 박정희 정권이 약속했던 활동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후배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상태였다. 당시 인천 출신의 엘리트 김길영씨가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관철동 여관 사건’으로 물러났다. 여관촌에 올라와 농성 중이던 후배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를 수습한 것이 바로 나였고 이후 줄곧 선생의 곁을 지켰다.
―선생의 죽음에 얽힌 얘기를 해달라.
▲아직 구체적 사연을 밝힐 수 없다. 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아직 권력층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김을동씨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직원의 전화를 받고 나간 아버지가 고려병원 응급실에서 발견됐다고 증언했지만 당시 선생은 딸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 선생의 사인이 고혈압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생전에 이문동 중정 본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죽음에 이른 원인이었다.
―정치인 김두한은 어떠했나.
▲소신이 강했기 때문에 여당뿐 아니라 야당에서도 배척당했다. 협객 김두한으로만 보지 말고 정치인 김두한,민족투사 김두한으로 봐달라. 언제나 힘있는 자의 반대편에 섰고
극우세력이었음에도 ‘무산대중’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서민정치인이었다. “외상술값을 갚아달라”는 유언과 함께 선생은 당신의 유지를 받들 것을 부탁하셨다.
―선생과의 일화가 있다면.
▲국회의원 시절,내가 술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드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배석했던 일행이 “김의원은 저런 동지가 있어 좋겠다”고 농담을 던지자 선생은 “내게 저런
동지가 만명은 있다”고 받아쳤다. 선생은 유난히 입담이 좋아 해학과 유머로 청중을 사로잡곤 했다. 사실 반공법으로 구속되기 직전 수원에서 이병희씨와 붙었던 선거도 투표함을 덮지 않았다면 선생의 승리가 분명했다. 말년에는 연사로 나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여당의 유혹도 많았다.
―김두한의 여자관계가 복잡했다는데.
▲드라마에서 18세 때부터 기생집을 드나들고 여러 여인과 정분을 통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다. 술집다운 술집이 생긴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먹고사는 게 어려워 배를 곯던 시절이다. 선생의 사후에 아기를 업고와 후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핏줄로 인정받아 호적에 올라간 것은 장남 경민씨 등 4남2녀뿐이다. 그는 ‘정’을 줄 여자와 그렇지 않을 상대를 엄격히 구분했다. 을동씨 표현대로 ‘여자 숫자를 세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라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 조일환은 누구
1938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조일환씨(65)는 김두한의 후계자로 지난 40여년간 전국 주먹계의 대부로 통해왔다. 김두한은 생전, 동료와 후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씨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17세에 천안일대를 평정하고 서울로 진출,한때 수백명의 '어깨'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의 책 '불의 아들'은 20만권이 팔려나간 것으로 유명하다.
■ 김두한 외모는 "실제로는 중절모 안썼다"
김두한은 그러나 머리스타일에는 몹시 신경썼다. ‘고데’로 지진 후 포마드 기름을 발랐는데 장남 경민씨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한 번 손질하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또 현재 드라마의 김두한은 중절모를 쓰고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해방 후론 중절모를 전혀 쓰지 않아 1961년부터 김두한을 모신 조씨는 모자 쓴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키 180㎝가 넘는 조씨는 또 “전성기 때 선생의 몸집은 키 176㎝에 몸무게 80㎏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안재모와 닮은꼴이다. 하지만 피부가 좋지 않아 김두한
자신도 ‘곰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진 찢어진 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때론 너무 눈이 작아 함께 술을 마시다 말이 없어지면 잠든 줄 착각하기도 했다. 손이 여자처럼 고운 것도 의외였다”는 게 조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긴또깡’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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