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실마을을 찾아서
德 庵 李 德 熙
오월의 맑은 공기와 꽃향기 풍기는 가운데 제30차 유종회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안동화수회 병선회장과 집 앞 진주다방에서 차를 한 잔 나누고 승용차편으로 석보에 도착하니 몇몇 족친이 광산문학연구소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충효당 종손이 도착해 석계 종손과 병열국장, 문열 등 몇이서 차와 다과 접대를 받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대구에서 회원들이 늦게 도착했으나 근 사백여명이 참석해 준비 과정에서 수고가 많았으며 총회에 이어 박약회 용태회장의 특강을 가진 후 오찬을 갖고 정부인 안동장씨 기념관, 석천서당, 석계고택을 들려 주실마을로 향했다.
주실은 일월산(日月山)의 정기가 쏟아져 내려오다가 장군천에 이르러 문필봉을 바라보고는 갈 길을 멈춘 언덕에 자리한 한양조씨 집성촌이다. 정기가 쏟아지는 고을이라 하여 주곡리(注谷里)라 부르고 매계(梅溪)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는 주실 조씨는 선대가 한양에 세거하다가 1519년 기묘사화를 만나 일문이 팔도로 흩어질 때 9세 현감공 종(琮)께서 영주로 낙향하고 그의 손자 원(源)께서는 1535년 영양 원당리로 옮겼는데 아들 경산당(景山堂) 광인(光仁)과 약산당(約山堂) 광의(光義) 형제가 청년기에 이미 도학이 남달라 1577년 영산서원(英山書院) 창립원로 16인에 선발되고 이어 해동이로(海東二老)라는 칭호를 들으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과 그에 이은 정유왜란에서는 약산당께서 수하의 수월(水月,儉), 사월(沙月,任), 연담(蓮潭, 健), 호은(壺隱 ,佺) 사종형제를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곽망우당(郭忘憂堂, 곽재우)의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함으로써 용사제현(龍蛇諸賢)에 이르고 수월, 사월 형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때도 대공을 세워 사월공은 통정대부에서 정2품 자헌대부에 승자되니 열 집에도 못 미친 가문이 경반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주실은 호은공이 1629년(인조 7년)부터 아들 진사공 정형(廷珩)과 함께 개척한 마을이다. 주실에 입향한 후에도 한양으로 돌아갈 뜻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나 진사공의 손자 16세(世) 호봉 호봉(壺峰. 德純), 옥천(玉川. 德鄰)형제와 임호(霖湖. 德厚), 임악(霖岳. 德久)형제 사종반이 1677년부터 연년 대소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이어지면서 주실에 만년 대기를 닦은 것이다.
그 후 붕당 와중에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여러 어른이 문명을 떨쳐 문향의 고장으로 성장해 갔다. 주실에 정착한 1629년부터 1894년 과거제 폐지까지 265년간에 옥천공 수난의 영향도 있어 홍패 넉 장, 백패 아홉 장에 불과했으나 문집과 유고를 남긴 분이 63인에 이르러 벼슬길 이상의 선비의 영광을 누렸다.
조선후기 실학자 채제공(蔡濟公)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과 교류하면서 개혁의 불길을 지펴 제례에서 단설의 실시, 관례와 혼례의 통합 등 생활 개혁을 추진했던 것으로 그것은 앞으로 주실의 개혁 전통을 세우는 단서가 되었다. 그 때 유학을 새롭게 익히던 곳이 월록서당(月麓書堂)이다. 호은정사(壺隱精舍), 만곡정사(晩谷精舍)와 침천정(枕泉亭), 학파정(鶴坡亭)도 그러한 뜻을 있던 곳이다.
의병대장 조남주(南洲. 承基)와 시인 조지훈(芝薰. 東卓)의 생가인 호은 종택은 기묘사화로 한양 조씨 일문이 화를 당하자 9세 조종(趙琮. 청하현감)께서 영주로 낙향한 후 안동과 영양을 거쳐 주실로 입향한 13세 호은공 조전(趙佺 .1576-1632)의 종택이다.
호은공은 영양 원당에 살다가 1629년에 주실로 이거하였다. 아들 정형(廷珩. 石宇)이 진사에 오르고 증손자 덕순(德純. 壺峰.1652-1693)이 장원급제로 사헌부 지평에 오르고 이어 덕린(德鄰. 玉川.1658-1737)이 급제하여 옥당에 이르자 이 집에 세거의 뿌리를 내렸다. 그 후 이 집에서 언유(彦儒. 心齋), 승기(承基. 南洲)등의 명사가 태어났고 근래에는 개화와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석(寅錫), 근영(根泳), 헌영(憲泳), 준영(俊泳), 애영(愛泳)의 오부자와 민족시인 동진(東振. 世林)과 동탁(東卓. 芝薰)이 태어난 곳이다.
옥천종택은 주실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이며 장사랑 조군(頵)의 둘째 아들인 옥천 조덕린의 종택이다. 옥천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正字), 세자시강원 설서(設書), 홍문관 교리(敎理),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고 시폐를 규탄한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疎)와 서원 남설을 비판한 상소로 모함을 받아 종성에 유배당했고 다시 제주도로 유배당하던 도중에 강진에서 서거하였다. 희당(喜堂. 草堂), 운도(運道. 月下), 진도(進道. 磨岩), 술도(述道. 晩谷), 거신(居信. 梅塢), 만기(萬基) 등의 명사가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옥천공의 아들 희당이 아버지를 기리며 별당을 세우고 당호를 초당(草堂)이라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호도 초당이라 했다.
창주정사는 조선조 영조 때 명신 옥천공의 정사로 창주는 옥천공의 별호이다. 숙종 34년(1708)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봉화. 소천)에 건립했다가 영양 청기면 홍림산의 정족리에 이건했다. 그 후에 화재를 만나 소실한 것을 재건하여 이산서당이라 불렀는데 주실로 옮긴 것은 1990년이다.
월록서당은 1765년에 한양조씨, 야성정씨, 함양오씨가 협력하여 일월산 기슭을 업고 홍림산을 안대하여 낙동강 원류인 장군천을 끌어안은 곳인 주실 동구에 세운 서당이다. 조선후기 실학이 학풍과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서당 건립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주실에는 월록서당이 건립되어 이 고을 교육의 중심을 이루었다. 월하 조운도가 주관하여 짓고 상량문과 현판을 걸었다. 대산 이상정이 기문을 쓰고, 천사 김종덕, 간옹 이헌경이 축송 시문을 남겼다.
일월산 아래 계곡 따라 잡은 터에 선비와 나라 지킨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니 지금은 서당과 사랑에 글 읽는 소리가 끊기고 신학문에 도취되어 도시로 나가고 없지만 그 뿌리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구나.
庚寅年 晩春之節 德庵精舍 閑筆
첫댓글 내고향 일원산 자락 주실마을을 이렇게 소상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제자신도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이리 소상히 정리 하셨는지요
아쉬움이 있다면 사적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주실마을과 인근 지역의 평범한 소개가 있었으면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관광지도 아니고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건 아니지만 아직 자연생태계가 원래모습 그대로 간직한
몇안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원산을 비롯하여 송화계곡 수하계곡 울련산 금마산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休'의 고장이라고 할수 있죠 '休'란?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休'란?
언제나 가고 싶은 곳, 어머니 품 같이 아늑한 곳, 지친몸을 가누고 돌아가고 싶은 곳.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때 묻히고 싶은 곳...그곳이 주실마을을 품고있는 내고향 영양이라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덕암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오래전에 떠나온 고향생각에 몇자 적어봤습니다.
거듭 들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