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feature=shared
성욱현, 미싱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 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이재연, 토성에서 오는 것
버스는 아무것도 모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바퀴는
갔던 곳으로만 가는 습관이 있는 듯
중국 사람들이 몰려왔다 몰려갔다
연약한 사람은 창가 쪽으로 옮겨가
차가워진 바람을 매만지거나
자세를 바꿔 앉았다
꽃이 오고 꽃이 떠날 때까지
꽃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어떤 자세로도 다 알 수는 없지만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쓸모없는 예감과
날카로운 햇빛은 토성에서
오는 듯 했다
강재남, 그믐
한 생이 가는가 보다
기약 없는 바람이 저리 울어대는 걸 보니
나무는 빈 몸으로 매운 날을 건너고
달을 삼킨 고양이가 달을 닮아간다
한때 달이었을 나도 달의 기착지에서 방황하는 고양이었으면
그렇다면 그곳에서 길을 잃어도 좋았을 일
장난감 기차는 뛰뛰 떠나는데
달을 삼킨 고양이를 목격한 내 침묵이 달콤해진다
한생이 바람에 쓸려가는 하필 이런 날
눈물은 자란다
눈물이 투명한 건 슬픔을 들키지 않겠다는 의지란 걸
여자를 묻고 온 날 여자에게서 배운 일이다
저물어가는 저녁을 우두커니 보내고 함께할 사람이 없다
하늘이 텅 비었다
서동균, 바닥만
바닥만 보고 다닌다
한 손에는 핸드폰
전에는 없던 더듬이가 솟는다
군중들 사이를
부딪히지 않고 다닌다
포유류와 곤충 사이에서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한다
본능과 무조건 반사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땅 위를 걷는 자유를 상실하고
두더지처럼 퇴화한다
횡단보도에서 켜지는 바닥 신호등
초록색 빨간색으로 분광된 밀도가
햇빛을 굴절시킨다
올려다본 적이 없는 사람들
불편한 거리만큼 수평으로 멀어지는
이질적인 깊이
군집 드론 같은 일상에서
너와 내가 없는 공간이 말라간다
최옥, 이끼꽃
이끼에 꽃이 피었다 이끼에도 꽃이 피다니
물기 마를 날 없는 습지에서
수도승처럼 사시사철 옷 한 벌로 사는 줄 알았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드린 채
물이 지나간 자리, 그늘이 머물던 때를 놓치지 않고
조용히 영토를 넓히더니 쌀알 같은 꽃을 피웠다
점점이 찍어놓은 암호 같은 꽃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핀 어린 백성 같은 꽃
어쩌면 햇빛에 대한 반란일까
쌀알 같은 이끼꽃에서 푸른 숨소리가 들린다
첫댓글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