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 우상의 황혼
사람들은 자신이 **선한 사람(good person)**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작은 친절에서부터 큰 기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행동을 동원한다.
그리고 공동의 선(common good)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 공동의 선이
자신의 이익과 손해의 저울 위에 올라가
명백한 손해로 기울어지는 순간,
그들의 결심은 흔들린다.
망설임이 생기고, 계산이 시작된다.
이것은 진정한 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
즉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거짓된 선함(false goodness)**에 가깝다.
진정한 선한 영향력은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는다.
공동의 이익에는 분명히 부합하지만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 앞에서도
찬성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덕(德)이 두꺼워지는 사람이다.
흔히 사람들은
*도(道)*에 *덕(德)*을 붙여 **도덕(道德)**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를 곰곰이 따져보면,
道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우주의 원리(principle)라면
德은 그 원리를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
곧 행동 선택의 기준이다.
덕이란
그 원리를 기준 삼아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도를 통해 덕이 두꺼워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덕은 개인의 이익과 손해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개인의 이익과 손해를 앞세우면서
덕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덕은 도를 바탕으로
세상의 순환 질서를 따르고,
그 순환 속에서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묻기보다
이 선택이 자연의 흐름, 삶의 질서에 부합하는가를
되묻는 태도다.
그렇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원리 속에서
공동의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덕을 두껍게 쌓는 삶이다.
살아가면서
위선적인 도를 앞세워 덕을 말하는 사람과
참된 도에 이르러 덕을 행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입으로만 덕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주어졌을 때
곧바로 또 다른 변명을 꺼낸다.
그리고 말한다.
“그건 덕이 아니다.”
덕을 행하는 일은
안전(safety)과 무관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려는 존재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과
덕을 두껍게 하는 일 사이에서
비록 안전이 훼손되더라도
덕을 선택하는 사람은
신체적 안위를 삶의 최우선에 두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교회에 가고,
사찰에 가며,
각종 사회 자생 단체와 봉사 단체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참여를 통해
자신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명함을 만든다.
JC클럽 회장,
라이온스클럽 회장,
교회의 장로와 권사.
누가 보아도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는
그런 직함과 소속을
자랑스럽게 내민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
그리고 그 사회적 위치가
오히려 짐이 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와도
과연 그 명함을
끝까지 들고 다닐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검증받기를 원한다.
만약 그 대상이 없다면
신(God)에게라도
자신의 삶을 검증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한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도덕을 선택한다.
그러나 삶은
검증되는 것이 아니다.
검증을 전제로 한 삶은
덕이 두꺼워지는 삶이 될 수 없다.
니체는 거짓된 덕에 대해 우상과 황혼 잠언와화살 18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뭐라고?그대들은 덕과 고양된 가슴을 택하면서 동시에 안전한 자들이 누리는 이익을 견눈질하는가?그러나 덕을 가지려면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반 유대주의자의 문을걸어두라.)<<<
대우고전총서 [우상의 황혼] 18쪽 인용
덕은
이익과 손해보다 앞서 있고,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덕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덕을 비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을 기준 삼아
타인의 도덕과 비교하고,
자신의 덕을 드러내기보다는
타인의 덕을 깎아내림으로써
우월함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덕이 두꺼워진 삶이란
타인의 덕과
자신의 덕을
비교하지 않는다.
덕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덕은
맑은 계곡물이 흘러
강으로 향하듯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그 계곡물이 혼탁해지는 이유는
물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염된 물이
계속 유입되기 때문이다.
덕은 이와 같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과 같다.
그 맑은 물은
흐르면서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계산하지 않는다.
진정한 덕(德)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자유로 가는 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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