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신보> 1921년 11월 8일자에는 '우연하게도' 자전거경주에서 우승한 엄복동 선수와 조선의 최초 비행가 안창남에 관한 기사가 한 지면에 나란히 수록되었다. 아직은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이 실현되기 이전의 시기이다. 이들은 나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하는 그 노래의 주인공들이 된다.
<매일신보> 1921년 11월 8일자, "자전차경주대회에 우승한 엄복동군, 사십회도는데 만인의 응원중에 일등상이 되고 대승리"
재작 6일에 시내 장충단(奬忠壇)에서 전조선자전차경주회(全朝鮮自轉車競走會)가 열리었섰는데 아침 열시부터 경주회가 개시되어 오후 여섯시에 마치인 바 관람자는 약 일만여 명에 달한 대성황을 이루었더라. 그런데 아침부터 각방면으로부터 모인 다수한 선수들은 각각 단련된 기능을 발휘코자 용맹스러이 경주에 달려들었으매 제일차로 삼백보되는 주위를 여섯번 도는데 예선경주가 시작되어 서로 선수에 뽑히려고 일심정력을 다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하여 관객의 박수갈채는 끊일 사이가 없고 보는 사람으로도 능히 진땀이 흐르게 하더니 육십명이 당선이 되었는데
조선인은 오십명이오 내지인은 열명 중에 역시 조선인 자전차경주가로 유명한 엄복동(嚴福童)군이 일등으로 되었더라. 이 다음으로부터 이십회 삼십회 사십회의 구별로 경주가 점점 어려운 편으로 들어감을 따라서 흥미는 점입가경으로 되는 중 시간은 가는 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삼백보의 주위를 사십호 경주하고 최고 경주가 개시되었는데 선수는 여덟사람에 불과하였는데 출발의 방포 일성에 선수 여덟명은 첫번 몇회에는 다시 힘을 쓰지 아니하더니 삼사회로부터 각각 앞을 다투기 시작하는데 관객의 앞을 스치고 살과 같이 닿는 선수들은 보는 사람의 정신을 현황케 하는데 언제든지 일등은 맡아 놓는다는
엄복동군은 삼십회 가량까지는 제일 최후가 되어 다른 선수의 뒤에 밖에 못좇아가매 각 선수의 응원자들은 잘하라고 소리를 치는데 엄복동군은 이번에는 별로 힘이 없는 것 같이 보여 엄군을 응원하는 편에서는 낙망할 지경에 이르었었다. 이와 같이 생각하자 엄군은 다시 용기를 쓰는 것 같더니 천신이 앞에서 끌고 가는 것 같이 남이 한바퀴 돌 사이에 두어번씩 홱홱 돌아가는데 관객의 흥미는 더욱더욱 깊어가더니 필경에 우승은 엄복동군이오 이등은 본정에서 자전차 영업하는 삼하(森下)군이오 삼등은 본정 산기(山崎) 집에 있는 천길(天吉)군이었섰더라.
칠세(七歲)에 경주참가(競走參加)
천재의 엄복동군 삼년만에 참예해
그런데 자전차경주에는 맡아놓고 일등을 하는 엄복동군의 말을 듣건대 열일곱살에 처음으로 자전차타기를 배우어 가지고 그해에 훈련원 경주에서 일등을 탄 후 금년 이십팔세가 되기까지 한번도 실패한 때는 없으며 일등상을 탄 수효는 알 수가 없는 바 팔년 전에 경복궁 경주에서 일등을 탄 후 금년 육월에 장춘(長春)에 가서 오십회 도는 대경주에 로국인 선수 열명과 지나인 선수 이십명과 내지인 삼삽명과 봉천에 있는 조선인 선수 한명 합하여 육십여 명 중에서 일등 탄 것이 제일 생각에 남아 있고 지난번에 논산에서와 이리(裡里)에서도 모두 일등을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자전차 경주에 다른 사람들은 힘이 매우 든다고 하나 자기는 언제든지 원력의 삼분지 일밖에 아니드린다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2년 4월 6일자, "엄선수(嚴選手) 중상(重傷)"
자전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 군은 지난 2일에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개최한 자전거 운동을 하는 중 최종에 칠십회를 도는 중 같이 돌던 일본선수가 두번이나 떼밀어서 중상을 당하여 방금 황금정 일미상회(日米商會)에서 치료중이라더라.
<매일신보> 1922년 5월 23일자, "우승은 엄복동군에, 십만 관중의 박수응원 속에 용맹히 우승을 차지한 장쾌"
운동 중에는 아마 장쾌하고 볼만한 것은 자전거경주대회밖에 다시 없을 듯하다. 지나간 21일은 경성윤업회(京城輪業會) 주최로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후훤하에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가 개최되는 날이라. 훈련원 전차종점앞 장충단 들어가는 어구에는 화려한 큰문을 세운 좌우에는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라는 간판을 높이 달아 있어 인기를 더욱 끌었었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드는 사람은 오정이 넘으면서
십만여명에 달하여 장충단 일대는 사람으로 밀리었섰는데 각선수들의 용쾌한 경주는 수십만 군중의 응원 속에 각기 재주를 다투어가며 승부를 결단하는 광경은 참으로 땀을 자아내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십만여 명의 군중은 일류선수의 유명한 자전거 귀신이라는 별명을 듣는 엄복동(嚴福童)군에게 시선이 한데 모이여 엄군의 경주하기만 고대하며 마음을 무척 졸이었섰다. 오후 다섯시가 채 못되여서 일류선수 총연합 경주가 시작되기가 되매 십만 군중은 박수환호하며 엄복동군의 우승을 저마다 빌고 바랐다. 동경 대판서
멀리 참가 하여 온 내지인 일류선수 네명과 조선인 선수 엄복동군외 여섯명 도합 열한명이 출장하여 마지막의 우승을 다투게 되는데 군호의 총소리 한 방에 장쾌한 차륜은 빨리 닿기 시작하여 서산에 기우러가는 해빛에 차륜의 은빛만 눈이 부시었고 십만 관중의 엄복동군에 대한 응원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 장충단 한쪽은 박수성으로 요란히 들리었다. 처음에는 내지인 선수가 앞을 서서 달아나고 엄복동군의 활 대여섯 바탕이나 떨어지매 구경군은 낙담이 되어 엄복동군 정신 차리라는 소리는 수만 군중의 가슴에 떨리었고 마음 조리는
손바닥의 땀은 정히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십회 도는 이 경주에 엄군은 평연히 뒤를 떨어져 가다가 차차 회수가 임박하며 삼십오륙회가 되면서 사오회가 남아오매 용기 충천한 엄복동군은 엉덩이 몇번 꿈적거리는 바람에 앞을 선 내지인을 멀리 뒤에 떨어뜨리자 또 뒤에 있는 조선인선수가 역시 내지인의 앞을 서기 맹렬히 하여 속이 터질 듯이 내지인 선수는 맨뒤에 떨어져서 심금이 떨리게 하였다. 이에 수만 관중은 열광적으로 펄펄뛰며 손뼉치는 소리는 과연 너무나도 컸었는데 뒤에 떨어진 내지인 선수도 동경 대판서
제일등을 내여 놓지 않는다는 선수로서 그날의 떨어짐은 오죽이나 통분하였을까. 타기도 잘 탔지만은 원체 자전거 귀신인 엄복동군 앞에서는 감히 들지 못하게 뒤었던 터이라 최후 결승에 엄복동군이 우승하고 이등 삼등도 조선인 선수가 차지하게 되매 내지인 편에는 일점의 생기가 없어지고 조선인 관중은 그라운드 장내까지 뛰여들어가서 좋아라고 뛰놀기를 마지 않았다. 우승한 엄복동군은 영광스러이 이완용 후작의 쓴 우승기 하나와 본사에서 기증한 금메달 한개와 은곱보 두개와 또 본사에서 준 화환(花環) 한개를 특히 주어 두편 손에 쥐고 장내를 한번 일주하매 십만 관중의 환호성에 엄군은 무쌍한 영관을 얻고 의기당당히 개가를 부르고 돌아가기는 오후 여섯시나 되고 공전의 대경주회는 이로써 끝을 마치였더라.
<동아일보> 1923년 5월 8일자, "운동 끝에 충돌, 장충단 자전거운동에 엄복동을 방해했다고"
재작일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에서는 또다시 조선사람과 일본사람의 싸움이 생겼다. 재작일은 일요일이므로 평시에도 그곳으로 모이는 사람이 많은 터인데 더구나 경성윤업회(京城輪業會)의 주최로 전선자전거경기대회(全鮮自轉車競技大會)의 마지막 날이라 하여 구경하러 모인 사람이 거의 사오만에 달하였으며 본정경찰서에서도 관내에 있는 경관 백여명을 보내어 경계에 노력하였는데 경기할 때에 어떤 일본 사람이 술병을 장내에 던지는 것을 본 군중은 일등할 엄복동(嚴福童)군의 경기를 방해하는 것이라 하여 그 일본사람을 붙잡고 여러가지 말썽이 생긴 끝에 서로 돌을 던지는 등 한동안 크게 분요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폭행을 하였다고 인정한 사람으로 시내 청진동(淸進洞) 269번지 손룡근(孫龍根, 24)외에 일곱명을 소관 본정서에 검속하였는데 그중에는 복잡한 가운데서 남의 물건을 훔치려하다가 발각된 자도 두 사람이나 된다하며 그들은 엄중히 설유한 뒤에 다 방면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23년 5월 31일자, "엄복동군 우승, 대련에서 일등에"
자전거에 대장 노릇하는 엄복동(嚴福童)군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나간 20일 대련시 봉판정(大連市 逢坂町)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경주회에 원정차로 떠났었는데 개최일되는 20일 아침부터 모여드는 관람자는 무려 5만 여명에 달한 중에 특히 조선인관람자가 많아서 엄군의 우승을 열광적으로 바라며 열심으로 응원하였다. 맨나중 일류선수의 칠십주 경주가 시작되매 장내는 더욱이 긴장하여지며 엄선수는 튼튼한 기상과 용맹한 자세로 출장하여 경기는 시작되었다. 일본서는 자전거대왕이라는 일류선수 일본인과 또는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주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 이에 엄선수는 줄곧 다섯 바탕을 앞서놓고 돌매 일본인들은 하품을 하며 혀를 내두른 모양은 장관이었는 바 최후 칠십주에 이르러 엄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이 이착이 되고 중국인이 삼착으로 끝을 마추어 만세성리에 엄선수는 우승기와 순금시계와 만주일일신문사 기증의 금메달을 타가지고 대련거주 조선동포의 환호성에 다섯채 자동차에 엄선수를 태워가지고 시내를 일주할 때마다 조선인의 만세성은 우뢰같다여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밤에는 동포의 발기로 엄선수를 위하여 환영회가 열리어 대성황이었섰다는데 그때 거액의 돈을 들여가며 동족의 우승을 감축하여 다대한 후원을 한 이 중에 시민대표로는
오창식, 정원, 한명○, 이용식, 김상문, 변영도, 김주열, 이병길, 박신○.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 "[지방단평] 부산"
일상인(日商人)들은 일전 자전거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여 일본에 있는 선수를 전부 초치(招致)하여도 일선족제(日鮮族際) 자전거경기회를 연다고 또지면 분사(憤死)나 할는지.
<시대일보> 1926년 6월 18일자, "조선각지, 동경, 대판의 일류선수쟁패전! 최후의 월계관은 어느 지방으로, 국제적 경기인 금번 자전거 경주"
오랫동안을 두고 만반의 준비와 백열적 고대 중에 있던 조선인윤업자로만 조직된 서울윤업회(輪業會)의 주최와 시대일보의 후원으로 두번째 시험인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全朝鮮自轉車競走大會)는 명일 아침 아홉시부터 녹음이 덧는 듯한 장충단(奬忠壇)에서 첫날의 막을 열게 되었다.
(중간 기사 생략)
엄복동군(嚴福童君) 인퇴경기(引退競技), 노장(老將)의 최후경기는 여하(如何)!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기대된다
조선은 물론 만주와 일본까지 경주대회만 있다 하면 의례히 빼어놓지 아니하고 번번이 조선인으로서 출장하여 외국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시기와 흠망을 받아 전후 오십여번의 우승기(優勝旗)와 수천 수만의 상품을 얻어서 조선의 방방곡곡은 말할 것도 없이 해외에까지 그의 이름을 모를 사람이 없고 "치어다보느냐! 안창남이오 내려다보느냐! 엄복동"이라는 동요(童謠)까지 있게된 조선의 자전거대왕(自轉車大王)인 엄복동(嚴福童)군은 그동안 인퇴(引退)를 하여 후진의 배양에 힘을 쓰고 있던 바 이번의 대회는 전조선의 경기일 뿐 아니라 국제적임으로써 노장(老將) 엄복동으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여 근년 중 처음 겸 마지막으로 대회경기장에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그의 웅장한 태도를 나타내이리라는 바 엄군은 이번 경기의 기회를 이용하여 인퇴경기(引退競技)를 하리라한즉 노장의 마지막 숙달한 경기는 과연 얼마나 씩씩할 것이며 늠름할 것인지? 전일의 엄복동을 생각하고 오늘의 엄복동을 마지막 보냄에 대하여 더욱이 일반의 인기를 끄으는 중이라고.
<조선일보> 1926년 6월 23일자, "엄복동 피착(被捉), 자전거 장물을 고매한 듯, 원산으로 압송"
지난 20일 오후 네시경에 장충단공원에서 거행되었는 자전거경주가 마치매 수만의 관중과 희비에 싸인 자전거선수들이 섞여서 물밀듯이 공원문을 벗어나서 병목정(병木町)네거리에 이르를 쯤에 돌연히 시내 본정서원이 나타나서 자전거선수로 가장 명망이 있는 엄복동(嚴福童)을 체포하여 본서까지 인치한 후 즉시 엄중한 취조를 마치고 22일 아침에는 동서 이(李)형사가 데리고 원산(元山)방면으로 향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기 엄복동은 얼마전부터 동업 두 명과 연락을 취하여 그들이 경성시내로부터 훔쳐내인 자전거 장물을 자기가 원산방면에서 팔아 쓴 것이 이미 이십여 대에 달하였으며 그와 같은 사실내용도 벌써 일주일 전부터 소관 본정서에서 탐지한 바 되었으나 그의 유일한 기술을 발휘할 자전거대회가 불과 이, 삼일을 남기고 있었으므로 경주대회가 끝난 후에 체포한 것이라더라.
<시대일보> 1926년 7월 5일자, "엄복동군 취조, 자전거 절취혐의로"
[원산] 조선 자전차운동계에 명성이 높은 엄복동(嚴福童)군은 목하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도부(渡部)검사의 엄밀한 취조를 받고 있다는 바 내용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듣건대 경성부(京城府) 병목정(병木町) 230번지 리효진(李孝鎭, 35)이와 공모하고 경성과 원산 두곳 자전차 십여대를 절취하여 원산 것은 경성에 경성 것은 원산에 팔았다는 혐의이라고.
<매일신보> 1926년 8월 15일자, "자전거 경주의 용장(勇將) 엄복동 예심(豫審)에 회부, 자전거 잘 타던 엄복동군 자전거 절취죄로 검사국, 죄명은 자전거절도죄"
자전거 경주계의 패자 엄복동(嚴福童, 35)군이 지난 7월 상순에 절도라는 불명예한 죄명으로 원산서(元山署)에 체포되었음은 일반이 아는 바어니와 그 후 취조를 따라 종범 리효진(李孝鎭, 35)과 공모하고 경성모처에서 자전거 십여 대를 절취하여 원산에 와서 판 것이 발각되었고 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많음으로 원산지청 검사국을 거치어 최근에 예심으로 넘어갔다는 바 그다지도 용감하고 활발하던 엄복동군은 요사이 찌는 듯한 더위에 핼쑥한 얼굴로 법정에 왕래하는 것을 보면 목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추억을 자아내게 한다더라. (원산).
<매일신보> 1926년 10월 7일자, "엄복동의 죄명, 장물아보죄(贓物牙保罪), 자전거선수가 자전거 때문에 원산에서 경성까지 끌려왔다"
자전차 선수로 이름이 높은 부내 병목정(병木町) 229번지 엄복동(嚴福童, 35)은 장물아보(贓物牙保)죄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일년육개월의 판결을 받고 불복공사하여 작 6일 일건서류와 함께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는데 이제 그 사건의 내용을 들은즉 부내 병목정 210번지 절도전과 이효겸(李孝謙, 35)이란 자가 대정 13년 8월경부터 금년 5월경까지 전후 아홉번에 부내 각처에서 남의 집 문전이나 또는 길가에 세워둔 자전차 아홉대를 절취하였다가 엄복동에게 그 사정을 말하고 처치방법을 의뢰하매 엄복동은 부탁을 받아가지고 절취하여온 자전차를 전부 자기친구로 원산상리일동(元山上里一洞) 52번지 고물상 김원숙(金元淑)에 팔아주었다는 사실로 이효겸은 징역 4년 엄복동은 징역 일년반의 판정을 받았는데 엄복동은 처음부터 일심공판정에서까지 리효겸의 의뢰를 받아서 자전거를 원상 김원숙에게 보내여 팔아준 사실은 있으나 그것이 절도하여온 장물인 것은 절대로 아지 못하였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33년 3월 31일자, "자전거 명인 엄복동 절도혐의농후, 검문하는 순사보고 달아나 산속에서 잡아왔다"
[의정부] 조선의 자전거 명선수(名選手)로 한동안 이름이 높던 경성초음정(京城初音町) 엄복동(嚴福童, 43)이가 절도 범인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지난 26일 오전 5시경 양주군 회천면(楊州郡 檜泉面) 주재소원 홍(洪) 정(鄭) 양 순사가 동면 봉양리(鳳楊里) 경평도로(京平道路) 경계중 거동수상한 사람 하나를 발견하고 검문한즉 그 수상한 사람은 그대로 도주하므로 곧 추격하여 그곳에서 약 15정 가량되는 은현면(隱縣面) 동암리 산우에서 체포하였는데 잡고 보니까 그는 의외에도 조선의 자전차 명인 엄복동이었다.
<동광신문> 1947년 10월 2일자, "자전차경기, 나주운동장에서 성황"
[나주] 나주애국청년동지회 주최로 전국남녀자전차경기대회를 지난 29일(추석)부터 2일간 개최되었는데 선수 40여명이 출장하고 자전차계 왕인 엄복동(嚴福童)씨와 나주 출신 청년으로 새남한을 울린 김원기(金元基)군이 특별출장하여 다른 출장선수와 수천 관중의 박수환영을 받았다.
경기는 ○○○○ 무사히 끝마치고 오후 5시에 회장 김선근(金善根)씨의 상품수여로 ○○식을 성황리에 마치었다. 그리고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하략).
(정리: 2005.3.25,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