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는 호는 고하로 전남 담양출신이다.. 그는 김성수와친구였으며 그
를 대신하여 중앙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또 김성수가 창설한 동아일보의
사장이었다 또 김성수가 창설한 연정회의 회장이었으며 그는 일제시대 타
협노선을 걸은 민족주의자 진영을 대표하는인물이다.. 그런데 우스운것
은 민족주의자와 일제와의 타협이라는것이 어울리지 않는소리다 일제시대
때 거의 민족주의자라하면 독립운동가를 말한다 한마디로 일제치하에서
는 독립운동..이란 불순분자로서 감옥에 가야하는 처지다 송진우도 3.1운
동때, 동아일보를 경영할때를합쳐 3번의 옥살이를 했다. 그는 분명히 민
족주의자라할수있다.송진우는 원래 한학을 배웠으나 16세때 사설영어학교
인 영학숙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는데 바로
김성수와 만난것이다. (김성수에 대한 세부내용은 제가 올린 친일파 전격
해부2 김성수 전 부통령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하여간 김성수는 호
남의 갑부였고 이때의 인연으로인하여 김성수가 설립한 중앙학교의 교장
도 맡았고 이어서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송진우
는 교장시절 3.1운동연관자로 체포되어 1년반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것
은 그가 3.1운동에 참여했다는것이 아니고 중앙학교자체가 3.1운동에 깊
숙히 개입을 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무죄로 나왔다.
그가 동아일보의 사장시절 일장기말소사건을 겪에 되는데 이건 그와는 전
혀관계가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일로 옥고를 치루게된다.. 그러나 일장
기말소사건이 일어난 직후 그의 반응은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
다"며 주인공 이길용기자를 사장실에 불러놓고 크게 꾸짖었다 당시 총독
부와 연관관계가 있었던 동아일보에 이러한 "불경스러운"사건이 발생했으
니 김성수와 송진우가 펄펄뛴것은 당연한일이다..그는 물산장려운동이 실
패로 끝나자 김성수가 세운 연정회라는 단체의 회장이었는데 이 연정회
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또는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총독부문화정치
에 발맞추어 일제와의 타협속에 추진된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 무렵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쓴 민족적경륜 역시 이같
은 맥락에서 나온것이다 재등실일기에 따르면 송진우는 이일때문에 사이
토 마코토 총독과 월 1회꼴로 만났다. 연정회의 설립과 관련하여 총독부
측과의 사전계획이 있었음이 틀림없을것이다. 송진우는 그때 당시에 인촌
김성수의 오른팔이었고 또 김성수와 같이 1926년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
시 전개했지만 이는 도리어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일체단합을 촉진하는
결과가 되었다.. 한마디로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해석해야할까?..
(아닌가??^^)
하여간 이듬해인 1927년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가 창간되었다 송진우는
이신간회를 주도하고자했지만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
도 들여놓지 못했다..(어차피 송진우를 내세워 세력을 잡으려는 김성수
의 작전이었지만..)
하여간 송진우는 동아일보의 사장직에서 물러나서도 동아일보에대한 영향
력을 행사했다..송진우가 동아일보를 통하여 진행한민족운동중에 대표적
인것은 자치운동이었다 그러니까 일제가 허락하는 한도안에서 일부자치권
이라도 얻어내자는 의도였으나 이것은 각운동세력들과 일반시민들에게 호
된비판을 받았다. 동아일보 불매운동까지 벌어질정도였으니말이다. 이 이
후 송진우는 칩거하다시피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 되자 송진우
는 김성수와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는데 이 한민당은 송진우가 대표격
인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모인 정당이었다. 그의 한민당은 결국 일
제시대때 고생하지않고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파들이 자위책으로 결성한
정치 결사의 성격이 강했다 어찌되었든 한민당은 재력가들을 기반으로 하
고 있엇기때문에 그만큼의 발언권을 행사할수있었다.그것을 단적으로 보
여주는 예가 바로 임정요인인 신익희와의 말다툼끝에 "여보 해공 표현이
좀안됐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기요? 중국에서 궁할때 뭐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
르는지알아? 국외에서는 배가 고팠을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 사람들보
다 적었을것 아니요!그러니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라도 몰아붙였던것은 이러한 자신감의 반영이었다. 송진우는 임정요인들
이 귀국하기 전에는 임정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리자. 라며 다른 정파의 정
치활동을 부정했다 그러나 정작임정요인들이 들어오자 등을 돌려버린이유
는 그들이 송진우를 비롯한 친일파에게강경한 입장을 취했기때문이었다.
결국한민당은 독립촉성중앙회(이승만박사)와 손잡고 단독정부의 수립으
로 나아갔다 그러나 송진우는 단독정부를 보지는 못했다 정체를 알수없
는 한현우라는 자에 의하여 1945년 12월세상을 떠났다.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는 비밀결사 백의사의 일원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송진우는 김성수만큼은 아니지만 김성수와 친일의 맥
락을 같이한다.. 게다가 그는 충실한 김성수의 오른팔로서 모든임무를 충
실히 수행했다.. 물론송진우는 직접적인 친일파는 아니라치더라도 간접적
인 친일파로 구분할수있을것이다 물론 이런 간접적친일파를 두둔하는사람
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송진우같은 이들이 타협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
라 비타협민족주의로서 그당시 사람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더욱 공고히 했
다면은 우리나라의 독립이 더빨라지지는 않았을까?? 간접적이던 직접적이
던 친일파는 용납할수없다.. 게다가 독립이 되서도 송진우는 오히려 독립
운동가들에게 "너희는 마음이나 편했지 우리는 하기싫어도 했다"식으로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반성을 해도 봐줄까말까인데.. 송진우는 직접적이
던 간접적이던 일본을위해 일했던 친일파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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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전격해부-3 전 한민당 당수 송진우
국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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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5.2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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