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자가 세 번 씩이나 겹치는 2010.10. 10은 백년만에 찾아오는 쌍십절이라 하여, 중국인에게는 대단한 길일이란다. 10자가 두 개만 겹쳐도 대단한데, 세 개나 겹쳤으니 오죽할까. 올해의 쌍십절은 결혼식으로 인해 중국 전역이 들썩인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관모산 가는 길이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지체되었다.
쌍십절은 중화민국의 건국기념일이다. 중화민국은 현재 대만의 전신이고 국민당 정권이다. 다시 말해, 중화민국의 건국 기념일이 10월 10일인데, 10자가 중복되어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11년 10월 10일를 기점으로 발생한 신해혁명은 북방의 만주족이 세운 청나로 인해 국가를 잃은 한족의 혁명군이 300년만에 쑨원[孫文]의 민족,민권,민생이라는 삼민주의를 기치로, 후베이성 우창[武昌]에서 청나라 타도를 목표로 행동을 개시한 결과,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민주공화정치의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청제국의 막은 닫히고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省)에서 이 혁명을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난징지구를 공략한 각 성의 대표는 쑨원을 맞아들여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중화민국을 발족시켰다. 쑨원의 큰뜻을 이룩하고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을 기리게 되었다. 당연히 쌍십절은 중화민국 즉 현재의 대만의 기념일이다.
쑨원(孫文, Sūn Wén ,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혁명가, 사상가, 거기다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시자이다. 호(號)는 일선(逸仙, Yìxiān , 본자(本字)는 덕명(德明, Démíng, 별명은 중산(中山, Zhōngshān) 또는 나카야마 쇼우(中山 (なかやま))이다. 신해 혁명의 주요 인물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이라는 별명은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주에서 1895년 17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樵 나카야마 쇼(なかやましょう)(중산초)에서 유래한다.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孫德明,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은 쑨디샹(孫帝象,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孫眉)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본토 중국 및 대만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린다.
대만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로서라기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중국의 근대사를 이어 가는 여러가지 사건과 인물, 그리고 군벌과 같은 조직은 많이 생소하지만...파고 들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사건, 양무운동, 변법자강책, 청일전쟁, 리홍장과 위엔스카이에서 양쉐량으로 이어지는 군벌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있었던, 국공내전과 국공합작 시나리오
공산당이 국민당의 총공세를 피해, 2년에 걸쳐 9600km를 이동했던, 대장정
대장정 끝난이후 1936.12.12에 휘하 장수였던 장쉐량이 장제스를 연금시켰던 시안사건
1937년의 중일전쟁과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당이 세력을 넓혀 가는 시나리오
1945년 해방과 함께 1946~1950 간의 국공내전
국공내전에서 엄청난 열세였던 공산당이 승리하는 과정과 장제스의 대만 도피...
신해혁명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다. 1911년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 정부가 건립(1912년 1월 1일)되었다. 그리고, 1912년 2월 12일, 푸이는 폐위되고, 결국 청나라는 붕괴했다. 전기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자산계급혁명파를 주체로한 정부)되었으나, 후기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양위하여 임시총통으로 되고 군벌독재체제를 세웠다. 1911년이 12간지로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비록 이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곧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제2혁명으로 부르고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할거에 대한 대항을 제3혁명으로 부른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은 중화민국에서는 중요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로 기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지킨다.
아편전쟁 이후 몇몇 중국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중국이 서양의 문물과 과학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작이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일종의 국가 개혁운동으로 퍼졌는데 이를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부른다. 청나라 조정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양무운동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으나 청일 전쟁의 패배로 그 한계를 드러나게 된다. 더이상 봉건적인 청나라로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한계의식은 곧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새로운 개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개혁운동은 광서제의 주목을 받았고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시도되었으나, 이들의 청조 개조운동은 서태후를 중심으로한 반동세력에 의해 100일만에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중 과거 제도 폐지 및 근대적 대학 설립등은 나중에 신해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
청조는 1906년 새로이 헌법을 정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변화를 선언했고 1911년 5월 헌법에 의거한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는데 이 초대 13명의 내각중 9명이 만주족 출신이고 그나마도 7명이 황제의 친족이었다. 이는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실망을 더욱 키운 꼴이 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청나라 군대인 팔기군은 태평천국의 난, 청일 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약화되고 대신 리홍장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리홍장의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더욱 강화하고 각 지방에 군사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나중에 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근대적 대학의 설립과 군사학교등을 통해 신식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이들 지식인, 특히 해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서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 익었다. 1903년 황싱 등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난 성 창사에서 "화흥회(華興會)"라는 혁명조직이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차이위안페이, 장빙린 등의 "광복회(光復會)"가 결성되었다. 마침내 1905년 이러한 여러 혁명단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국동맹회가 성립되었다. 동맹회는 쑨원을 대표로 추대했고, "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공화국 창립, 토지 소유의 균등"의 강령을 채택했다. 또한 기관지 〈민바오(民報)〉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나섰다. 여러 혁명단체는 해외에서 해외동포들과유학생의 힘을 모으고 중국 본토에서는 비밀리에 무장봉기운동, 혁명 세력의 조직화를 꾀했다. 수차례의 무장봉기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아직까지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청조 몰락과 새로운 혁명의 기운은 고조되고 있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우연한 충돌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창 봉기는 당시 무르익은 혁명의 기운에 도화선이 되었다. 무창의 신군병사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한 혁명군은 단 하루 만에 우창을 점령하고, 이튿날 한커우·한양(漢陽)을 점령하였다. 무창 봉기의 성공은 혁명에 지식인, 학생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신군이 가담하여 군사적으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창 봉기의 성공은 곧바로 전국을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후베이 성의 무창 봉기 이후 약 40여일 사이에 사이에 산시 성(陝西省), 산시 성(山西省), 후난 성, 윈난 성, 구이저우 성, 장쑤 성, 저장 성, 광시 성, 푸젠 성, 안후이 성, 광둥 성 등 남부지방 대부분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했다.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동맹회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다. 일 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청나라 측은 군대가 혁명군에 대한 초기의 진압에서 실패하자, 은퇴해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내정과 군정의 전권을 위임하여 총리로 기용하고 그의 강력한 북양군으로 혁명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는 11월 2일에 한커우를 11월 27일에 한양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혁명군측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군측은 위안스카이와 협상하는 방향을 채택했다. 이로써 혁명은 무장봉기 국면에서 정치적인 협상국면으로 전환 되었다. 이러한 협상은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혁명군은 이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혁명군과 북양군은 12월 3일 이후 정전상태로 들어가고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남북의화가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협상중 12월 29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 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협상의 결과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종말을 실현시켰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자신이 황제에서 퇴위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퇴위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268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통치는 종말을 고했으며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부터 내려온 2,133년 간의 황제의 통치 역시 끝이 났다.
2월 13일 쑨원은 임시공화국 정부의 대총통직을 사직하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의 수도로 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2월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반란등을 구실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의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는 것을 결의했다. 이로써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혁명파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너와집?...귀틀집?...둘 다 아니란다. 이렇게 넓적한 돌로 지붕을 얹은 집은 청석집...또는 능에집이라고 한단다.
|
|
첫댓글 어제는 뭔말인고 했는데....되씹으니 쪼매 이해가 가네요....
그날 씰데없이 우이독경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여...된장!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요즘 많이 느낍니다. 10월 10일이 그런 깊은 뜻이 있는 날인줄 처음 알았내요
저도 첨 알았습니다.
북에서의 쌍십절은 "노동당 청건일" 이라 합니다. 1945년
아!...그렇습니까?
어제는 뭔말인고 했는데....되씹으니 쪼매 이해가 가네요.... ( 2人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뿔싸~...우이독경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 주는근녀...
어제 비즈니스석쪽에 지방방송이 있어서 잘 알아들을수가 없었는데..잘 읽고 갑니다..(캄사!!)
이거 또 있네...완존 폭탄이었고만...앞으론 조심해야 것다...주둥아리 함부러 놀리지 말아야쥐...이거 죽 쒀서 된장 만들었네...
뭐야..이거..살짝 삐칠라카는데...왜 옴팡 내가 다 뒤집어쓰는거야..된장...
놀랍군요...한국인이 중국근대사를 이정도 꿰뚫고있다는점이...암튼 박학다식하신 천진산사랑회 총무님 덕분에 산악회의 이미지가 점점 더 높아가고있는 느낌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