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국가의 섭정 체제?
차라리 인공지능(AI)에게 국정을 맡긴다면
글 :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발행일 : 2017. 02. 08.
머릿속이 혼미하고 사리 분별에 어두운 국가 지도자가 40년 지기 비선 실세와 손을 잡고 저지른 국정 농단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기(國紀)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정부의 공조직과 국가 권력의 핵심 부서는 비선 실세의 사익 추구를 위하여 총동원되었고, 해당 부서의 공직자들은 주권자인 국민 대신 비선 실세 1인을 향해 충성 서약을 하고 기꺼이 그의 사용(私傭: privateservant)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구분이 무너지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붕괴되었으며, 민주 국가의 정체(政體)는 왕조 시대의 섭정 체제와 분간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 국기 문란 사태의 최종 책임자는 물론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다.
권위주의로의 회귀, 섭정 체제의 부활
작금에 벌어진 국기 문란 사태를 바라보며 국민들이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한 나라의 국정 시스템이 너무도 허망하게 붕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 권력이 대기업을 겁박하여 기부금을 강요하거나, 재벌에게 모종의 특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정치 성금을 받아 챙기는 일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숱하게 보아오던 일이라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하거나, 어용 단체를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벌이게 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일 역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일이어서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며 당시의 음습했던 정치 관행에 향수를 느끼는 퇴행적 뇌 구조의 소유자라면 충분히 그런 악습을 되풀이하고도 남음직하다.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이미 적지 않은 식자들은 대한민국의 정치 시계가 앞으로 몇 십 년은 후퇴하리라고 예견한 바 있다.
유신 시절의 정치 관행이 머릿속에 화석처럼 굳어 있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의 정치 시계는 정말로 식자들이 예견한 것처럼 40여 년 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번에 국회가 대통령 탄핵 사유로 제시한 △국민주권과 법치주의 위반 △대통령 권한 남용 △언론 자유 침해 △국민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뇌물 수수 등 형사법 위반 등의 5가지 항목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정치 관행을 그대로 요약한 범죄 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신 독재 시절의 악습이 그로부터 무려 40여 년이 지난 민주화 시대에 고스란히 되풀이된 것도 참담하지만, 우리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아버지 때도 없었던 섭정 체제가 주권자인 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가동됨으로써 국정 운영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법정에서 자신의 직업을 부동산 중개업이라고 밝힌 한 사인(私人)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 뒤에 버티고 앉아서, 장·차관과 외교관 등 고위 공직자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국가의 예산 배정과 재벌 정책까지 좌지우지하는가 하면, 심지어 외교 정책과 남북 관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니, 대통령은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섭정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섭정: 무자격자 군주를 위한 대행 체제
섭정은 왕조 시대의 명칭으로, 국왕이 어리거나 질병 또는 그 밖의 사정으로 정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모후와 같은 왕실의 어른 또는 선왕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이 정사를 대리 수행하는 제도를 말한다. 모후와 같은 여자 어른이 정사를 대리할 때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아들인 왕세자가 대리할 때는 대리청정(代理聽政), 고명대신과 같은 원로 신하가 대리할 때는 섭정승(攝政丞)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 수렴청정이 시행된 경우로는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이 어렸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왕조 시대의 섭정은 국왕의 국정 수행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비상 수단으로 도입하는 과도 체제로서, 조정의 선례(先例)와 중신들의 공의(公議)를 거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합법적인 정치 제도였다.
심지어 왕조 시대의 섭정도 역사적 관례와 조정의 공의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은 합법적인 정치 제도임에 비해,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섭정 체제는 아무런 법적 · 제도적 정당성도 획득하지 못한 불법 · 무법 · 탈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정치 시계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심지어 왕조 시대 이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OECD 가입국 순위 10위권에 근접하는 경제 대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지난 4년간 겪어온 정치 현실은 그 속을 까놓고 보니 민주공화정이 아닌, 섭정을 위한, 섭정의 의한, 섭정의 정치 체제에 불과했다.
왕조 시대에 섭정으로 하여금 국정을 대리하게 했던 이유는 국왕의 나이가 어려서 사리 분별의 능력이 없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으로 도저히 국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역사적 선례를 검토하고 조정의 공의를 거쳐, 사심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를 물색하여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조선뿐 아니라 중국 및 유럽에서도 합리적인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국왕 조지 3세가 정신 질환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그의 아들 조지 4세가 섭정이 되어 국정을 대신 수행한 적이 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공/사와 시/비를 분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리 분별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국무위원들의 대면 보고를 회피하고 기자들과의 간담회조차 기피할 정도로 언어 발달이 미숙하며,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혐오하고 탄압하는 ‘소시오패스’의 증세를 보이고, 상습적으로 거짓말과 유체 이탈 발언을 남발하는 허언증(虛言症)을 앓고 있으며, 자신의 무능과 무지 때문에 발생한 과오를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무런 죄의식과 수치심도 느낄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일 경우, 당연히 섭정을 내세워서 국정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국가나 국민 모두를 위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에는 섭정 제도가 없다. 대통령의 유고 시에 국무총리 또는 법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의 직무를 대행케 하는 권한대행 제도만 있을 뿐이다(헌법 제71조). 위에서 예로든 최악의 무자격자가 대통령직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경우, 스스로 사임하거나 탄핵을 받아 궐위되지 않는 한, 수많은 국민들은 그가 저지르는 무지와 광란의 통치 행위에 희생양이 되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스스로 사임이나 탄핵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우리의 대통령은 무자격자인 자신을 대리해줄 섭정으로 40년 지기 부동산 중개업자를 간택하여 그에게 국정 운영의 모든 권한을 양도하고 자신은 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국민들이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권력 이양의 과정에서 정작 주권자인 국민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자격도 능력도 없는 두 개인의 담합에 의해 국민들은 주권자로서의 헌법적 권리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탈당해버렸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임법(任法) 사상과 인공지능(AI) 전문가 시스템
한비자의 임법 사상은 무능하고 사리 분별에 어두운 혼군(昏君)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정치 방략이었다. 그에 의하면 요·순처럼 현명한 군주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소한 존재들이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보통 사람(中人)보다 별반 뛰어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통치 행위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따라서 나라의 안정을 원하는 군주는 철저하게 정해진 법령과 규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규정보다 못해서도 안 되지만 규정보다 더 잘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한비자는 강조한다. 군주의 독단과 자의가 개입되는 순간 공공 세계의 객관성은 무너지고 군주의 권위도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군주가 모든 판단을 정해진 규정에 맡기고(任法) 자의적인 작위를 멈추어야(無爲) 그 나라에 안정이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의적인 작위를 멈추고 정해진 규정대로 따르기만 하면 안정된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한비자의 임법 사상은 오늘날 인공지능(AI)의 분야에서 ‘규칙기반 추론 시스템’(rule-based reasoning system)을 탑재한 ‘전문가 시스템’과 그 취지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전문가 시스템’이란 특정 분야의 방대한 지식을 빅데이터 형태로 구축하고 여기에 강력한 추론 기능을 부가하여, 인간의 의사 결정을 효율적으로 조력할 수 있도록 구축된 인공지능의 한 종류를 가리킨다. 전문가 시스템은 해당 분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수준의 전문 지식을 갖추고 다양한 상황에서 신속한 판단과 예측이 가능한 초강력 ‘지식 기관’(corpus of knowledge)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을 눌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지금은 인공지능 법률 전문가, 금융 전문가, 의료 전문가가 등장하여 생활 현장에 속속 투입되고 있다.
미국의 한 대형 법무법인에서는 인공지능 법률 전문가 ‘로스’(ROSS)를 고용하여 파산 분야에 배치했으며, 인공지능 금융 전문가인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는 고도화된 알고리즘과 빅데이터로 무장하고 수많은 투자자들에게 투자에 관한 조언과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IBM은 패턴 인식(patternrecognition) 기술에 기반한 의료 전문가 시스템 ‘왓슨’(Watson)을 개발하여 암 정밀 진단과 의료보건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인공지능 전문가 시스템은 방대한 전문 지식을 빅데이터 형태로 구축하고 신속 · 정확한 분석 능력을 갖추고 있는 탓에 해당 분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경력을 쌓은 어지간한 인간 전문가보다 빠르게 정확한 판단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인간이기 때문에 범하기 쉬운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이나 이기심에서 기인한 주관적 왜곡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지기도 한다.
차라리 인공지능(AI) 전문가 시스템에 국정을 맡긴다면
만약 공과 사, 시(是)와 비(非), 합법과 불법, 참과 거짓을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는 ‘규칙기반 추론 시스템’을 탑재하고 정치 · 경제 · 외교 · 안보에 관한 방대한 전문 지식을 빅데이터 형태로 갖추고 있는 국정 전문가 시스템이 개발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사리 분별에 어둡고 모국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자격자를 대통령으로 받들어 모실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무자격자가 권좌에 앉아 국정을 농단하고 헌정을 유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로 하여금 국정 전반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 국익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당면 현실에서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 시스템의 도입은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다고 보인다. 이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설계할 때 이념 논쟁이나 지방색과 같이 망국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주관적 변수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해버린다면, 국민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서 차별하고 배제하는 분리주의적 공작 정치의 폐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정치 현실에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우리는 지능이 모자란 무자격자 대통령 때문에 답답해할 일도 없게 될 것이고, 유체 이탈 발언을 남발하는 거짓말쟁이 대통령 때문에 울화통이 터질 일도 없을 것이며, 자식 잃은 유가족을 향해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위선적 지도자 때문에 속상해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전문가 시스템은 어지간한 인간 대통령보다 정보 처리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고, 절대로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위선적인 감정 표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인공지능 전문가 시스템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최고의 장점을 지닌다. 국가에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7시간 동안 사라져서 소재조차 파악이 안 되는 어떤 대통령과는 달리,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는 24시간 내내 풀타임 직무 수행이 가능하며, 호텔 36층이건 성형수술 시술대건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국무위원의 보고를 수시로 청취하고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일이 가능하다.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일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과 직관력 그리고 감성적 공감 능력은 도저히 기계로부터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공지능’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 취약하고 유한한 인간 대통령의 능력을 보조할 수 있는 ‘조력자’(assistant)로서 인공지능 국정 전문가 시스템은 그 개발을 기대해볼 만하다. 사리 분별 능력이 부족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무자격자 대통령보다는 차라리 ‘규칙기반 추론 시스템’에 기반하여 철저하게 법규를 준수하며 공평무사한 판단을 내리는 인공지능 전문가 시스템이 그나마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훨씬 덜 위험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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