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金海 金氏)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편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는 김해시(金海市) 한림면(翰林面) 퇴래리(退來里) 퇴은촌(退隱忖)에 살아 왔으나, 담헌공(淡軒公) 휘(諱) 극첨(克僉)의 후손(後孫)은 임진왜란때 청도군(淸道郡) 이서(伊西)로 옮겼다가 다시 성주(星州) 비봉산(飛鳳山) 용기곡(龍基谷)인 현(現) 고령군(高靈郡) 성산면(星山面) 상용리(上龍里)에서 100여년을 살다가 다시 맏집 응생(應生)의 후손(後孫)은 하양(河陽) 보인동(寶仁洞)에서 거창(居昌)으로, 둘째 응수(應壽)의 후손(後孫)은 달성군(達城郡) 논공읍(論工邑) 금포(金圃)로, 셋째 응달(應達)의 후손(後孫)은 용암면(龍岩面) 삽재(명포리(明浦里))를 거쳐 조곡(租谷 : 현(現) 계상리(溪上里))으로, 넷째 응립(應立)의 후손(後孫)은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 관호리(觀湖里)에서 각각 문중(門中)을 이루고 있다. 성주(星州)에는 성주(星州), 선남(船南), 용암(龍岩), 수륜(修倫), 대가(大家), 초전(草田), 월항면(月恒面)에 100여 호가 살고 있다. 선대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世 김수로왕(金首露王)부터 10세 구형왕(仇衡王)까지는 가락국왕(駕洛國王)이다. 김무력(金武力)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金首露)왕의 11세손이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서기 553년) 아찬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냈다. 김서현(金舒玄)은 김무력(金武力)의 子로 소판대양주도독(蘇判大梁州都督)을 역임했다. 김유신(金庾信)은 김서현(金舒玄)의 子로서 신라 진평왕(眞平王)15년∼문무왕(文武王)13년(서기 595∼673년) 동안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원훈(元勳)이다. 서기 656년 당(唐)나라에서 봉상정경(奉常正卿) 삼십육도장군(三十六道將軍) 대사마(大司馬) 대원수(大元帥) 금은자광록대부(金銀紫光祿大夫) 병부상서(兵部上書)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 태대각간(太大角干)이며, 신라 흥덕왕(興德王) 10년(서기 835년) 3월에 순충장열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에 추봉(追封)되었다.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金庾信)의 동생(同生)으로 대당총관(大幢摠管) 및 각간(角干)이다. 김삼광(金三光)은 김유신(金庾信)의 장자(長子)로 좌무위익부 중랑장(左武衛翊府 中郞將)이며, 김원술(金元述)은 김유신(金庾信)의 2자(二子)로 화랑(花郞) 소판(蘇判)이다. 김반굴(金盤屈)은 김흠순(金欽純)의 子로 급찬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윤중(金允中)은 김유신(金庾信)의 손자(孫子)로 대아찬이며, 김영윤(金令胤)은 김반굴(金盤屈)의 子로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이다. 김 암(金 巖)은 김윤중(金允中)의 손자(孫子)로 집사시랑 저강진두상(執事侍郞 沮江鎭頭上)이다. 성주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를 중심으로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경신(金敬臣)은 중시조(中始祖)로 고려(高麗) 충렬왕조(忠列王朝) 진변총관부군총관(鎭邊摠管部軍摠管)을 지냈다.
김태덕(金台德)은 원현(元鉉)의 3자(三子)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김방려(金方礪)는 태덕(台德)의 장자(長子), 자(字)는 여용(汝用), 호(號)는 축은(築隱), 문과(文科) 급제(及第), 백당재(栢堂材)에 들어갔고,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에 이르렀다. 장흥(長興)의 사현사(四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순생(金筍生)은 방려(方礪)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여택제(麗澤齋)에 들어갔고 고려 공민왕(恭愍王) 임인년(壬寅年)에 문과(文科)에 올라 지청도 군사(知淸道 郡事)에 이르렀다. 장흥(長興) 사현사(四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김계희(金係熙)는 순생(筍生)의 2자(二子), 자(字)는 회숙(晦叔), 호(號)는 퇴은(退隱). 세종(世宗) 을묘(乙卯, 1435년)에 생원탐화랑(生員探花郞)이 되고, 신유(辛酉, 1441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로 한림(翰林)에 들었으나 부모(父母)가 연로(年老)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니 당시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이 한강(漢江)까지 송별(送別)하고 시(詩)를 읊으니,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은 ‘청운미(靑雲未) 탈백운사(奪白雲思)’라 읊고,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理) 노산(魯山) 이영서(李永瑞)는 ‘이친사환지다소(離親仕宦知多少) 강상추풍독송군(江上秋風獨送君)’이라 읊으니 모두 조선(朝鮮) 명시(名詩)이다. 그때 지은 한림정(翰林亭)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燒失)되었으나 지금도 그 마을을 한림정(翰林亭), 면(面)을 한림면(翰林面), 한림정역(翰林亭驛), 한림중학교(翰林中學校)가 있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은혜(恩惠)로운 정치(政治)를 베풀고 향교(鄕校)를 크게 수리(修理)함으로써 백성(百姓)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향교(鄕校)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여 춘추(春秋)로 배향(配享)하고 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오고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으며, 1463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김계희(金係熙)의 장자(長子), 생원진사(生員進士)를 하였고, 사재감정(司宰監正)이며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도사(同知義禁府度事)이다. 김극검(金克儉)은 강의(剛毅)의 3자(三子)로 자(字)는 사렴(士廉), 호(號)는 담헌(淡軒), 괴애(乖崖)다. 1459년 생원진사(生員進士)에 1등을 하고 같은 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1466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壯元), 발영시(拔英試) 3등에 올랐다. 경상도사(慶尙都事), 양산(梁山) 및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치적(治蹟)이 있고 도승지(都承旨),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황해(黃海) 및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명환(名宦)이시고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으나 돌아가시자 벼슬이 정이품(正二品)에 이르렀으나 집도 없다 하여 청백리(淸白吏)로 나라에서 고향(故鄕)인 김해시(金海市) 진영읍(進永邑) 신용리(新龍里) 주변(周邊)의 산(山)을 하사(下賜) 안장(安葬)을 하니 그 마을을 지금도 관찰사촌(觀察使村)이라 부른다. 장흥(長興) 사현사(四賢祠)에 춘추(春秋) 배향(配享)하고 있다. 김관(金寬)은 극검(克儉)의 장자(長子), 자(字)는 경요(景饒), 호(號)는 송재(松齋), 1497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고 홍문관 검열(弘文館 檢閱),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議)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에 이르렀다.
자(字)는 흥노(興老), 호(號)는 낙원(洛園), 태몽(胎夢)때 흥무대왕(興武大王 : 김유신(金庾信))이 일동자(一童子)를 보내어 같은 이름으로 지었고 후손(後孫)들이 유신(有信)이라 부른다. 1510년에 진사(進士)를 하고 1516년에 문과(文科) 장원(壯元)에 오른다.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및 교리(校理)에 올랐으나 자문점마(咨文點馬)로 평안도(平安道) 곽산(郭山)에 이르렀다가 대낮에 도깨비에게 가위 눌려 까무러쳤다. 마치 거문고 줄과 같은 끈이 그의 배를 돌려 매어 옆 사람이 칼로 그 끈을 베면 끊어졌다가 도로 이어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홀연히 어떤 서생(書生)이 들어오자 도깨비는 공중에서 여자의 소리를 내면서 “정한림(鄭翰林)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누대(累代)의 원수를 갚으려는데 장난질인가?” 하였다. 서생(書生)은 군수(郡守)에게 청하여 대나무통과 주사를 얻어 부적(符籍)을 그려 대나무통 상하(上下)에 붙여 공중에 날리니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더니 차차 사라지자 즉시 깨어났다. 그 후 3년 만에 죽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서생(書生)은 정희양(鄭希良)이고 유신(有信)은 김유신(金庾信)의 환생자(還生者)이며 그 여귀(女鬼)는 고구려(高句麗) 국모(國母) 유화부인(柳花夫人)이라 불렀다. 김선원(金善元)은 유신(庾信)의 장자(長子)로 자(字)는 문숙(文叔), 호(號)는 관포정(觀圃亭), 1564년 생원 진사(生員 進士)가 되고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1566년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올랐다. 김만증(金萬增)은 선원(善元)의 장자(長子)로 자(字)는 효삼(孝參), 진사(進士)이다. 임진란(壬辰亂)에 창의(倡義)하여 청도(淸道) 이서(伊西)를 거쳐 성주(星州) 비봉산(飛鳳山) 용기곡(龍基谷 : 현(現) 고령군(高靈郡) 성산면(星山面) 상용리(上龍里)에 입향(入鄕)하였다. 김종섭(金鍾燮)은 자(字)는 사진(士振), 호(號)는 송죽헌(松竹軒),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성균생원(成均生員) 행돈녕부도정(行敦寧府都正)이다. ※ 엮은이 : 성주군 월항면 덤개, 이재필(李在弼) 본지 편집인 (前 국회사무처 4급 보좌관, 現 대구경북연구원 3급 재직) 2006-02-07 15:4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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