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인물이 천명한 가르침이 체계적인 이론을 갖추고 집단을 이루어 이를 실천하고 신봉하는 신앙으로 발전한 것을 우리는 흔히 종교라고 한다. (물론 종교를 이렇게 간단하게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라는 말을 한자의 의의만으로 해석하면 으뜸이 되는 가르침을 뜻한다. 중국불교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당나라의 현장이라는 뛰어난 학승이 타계하고 난 얼마간까지 즉 수의 시대로부터 당의 전기시대에 걸쳐 불교의 황금시대를 누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에 인도불교로부터는 독립된 중국불교의 성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소위 명승·고승·학승이 숱하게 등장했으며, 혼자서 불교의 온갖 분야에 통달한 만능 승려도 출현하였다. 이들은 방대한 불전들 중에서 제각기 특히 의거할만한 문헌을 독자적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기초로하여 새로운 논서를 저술함으로써 나름대로의 교학을 확립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각각을 조사로 삼는 학파와 더 나아가서는 종파가 형성된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추구하는 입장을 표시하고 뒤에 종이라는 말을 붙여 자신들의 입장이 으뜸의 가르침임을 표방했다.
불교에 전래된 여러 사상들은 그것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필연성을 감추고 일시에 모두 동일한 자격으로 전래되어 왔다. 이 때문에 그 순서와 역사성을 밝히고자 하는 교판의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특히 "무엇이 불교 본래의 사상인가"하는 의문이 종이라는 의식으로 응결되었고 이것이 중국불교의 특색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제시된 종의 관념을 자신이 신봉하는 경전이나 교의에 맞추기 시작한 최초의 불교인은 천태종의 창시자인 지의였다.
여하간 종이라는 개념 자체는 원래 언어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구극의 진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바뀌어 일반적으로는 근본적인 입장이나 견해, 나아가서는 그것을 따르는 문류나 지파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학문적으로는 각 학파가 주장하는 교의라는 의미로부터 학파 그 자체를 통칭하는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종단이라 할 때는 동일한 입장이나 견해를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과 조직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불교 내부에 여러 종파가 있다는 사실을 불교의 분열상이나 혼란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 자신이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여 가르침을 전달하였고 그의 깨달음 내용도 하나의 접근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종파란 불교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다양한 접근방식이라고 이해해야할 것이다.
삼론종 三論宗
중관사상을 중국에서 이해한 종파가 삼론종이다. 중관파의 주요한 세 논서를 채택하여 이해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삼론종이라 칭하는데, 그 셋은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이다. 삼론종의 교설은 크게 세 가지의 입장에서 전개되었는데 즉, 잘못을 깨뜨리고 바름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 진리는 참된 것과 속된 것의 둘이 있다는 진속이제, 그리고 여덟 가지의 부정을 통해 중도를 밝힌다는 팔부중도이다.
삼론종은 중관사상의 이해인 만큼 중도의 해석에 전념하는데, 중도란 아무런 걸림이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파사현정이란 파사 이외에 현정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파사가 곧 현정이라는 즉, 잘못을 깨뜨리는 자체가 바로 바름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진속이제란 공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세속의 진리를 설하여 유有를 밝히고 유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참된 진리를 설하여 공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곧 공이 유이며 유가 공이므로, 모든 진리의 실제모습이란 뜻이다.
팔부중도란 (불생물멸 :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불상부단 : 지속됨도 없고 단절됨도 없다.) (불일불이 : 통일됨도 없고 다양함도 없다.) (불래불출 : 들어오는 것도 없고 나가는 것도 없다.) 의 여덟가지의 미혹을 타파하여 일체의 집착심을 정화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삼론종의 실천은 공관에 입각하여 선을 닦는 것이다. 선이라는 집착이 없는 명상의 실천을 통하여 공관과 불성이 상통함을 실현코자 하였던 것이다.
중관사상 中觀思想
학문불교로 치달은 기존의 교단을 비판하며 출범한 것이 대승불교이지만, 기본의 흐름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역시 자신의 입장에 걸맞는 참신한 교의가 필요하였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지탱해 온 교학체계에 있어서 우뚝 선 봉우리가 있다면, 그것은 중관파와 유가행파이며 이 두 계통이 발전할 기반을 구축한 이가 용수인데 그의 영향은 실로 그 이후의 불교 전 분야에 미쳤다고 평가된다. 그를 '8종의 조사'라고 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특징적인 사상이 공空사상이며, 이 공사상에 근거하여 중관파가 형성되었다. 용수의 공사상은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모든 것은 공임을 자각하는 데서 그 방법을 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인 동시에 실천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그 주안점을 둔 것이다. 용수가 취한 이 공사상의 입장이 나중에 하나의 학파로 성립되면서 중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을 막론하고 먼저 자기에게 부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전제하고 다시 그런 부정적 대립자를 부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없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되고, 그 없다는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이 다 그렇다. 그래서 그것은 공이며, 사물의 본질 자체는 구할 수 없는 불가득인 것이다. 공임을 확인하는 부정과 부정의 인식을 통해 사물은 있는 그대로 다시 드러난다. 이 이치는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느 한쪽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중도라고 한다. 용수의 입장을 따르는 학파의 명칭이 중관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다시 말해 중관이란 엄밀히 말하면 중도이다.
천태종 天台宗
흔히 평하기를 천태종은 화엄종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정수라고 한다.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서 우리 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쳐 불교의 대명사인 양 인식되고 있는 선종이 있지만 이는 교의의 연구보다는 곧바로 그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실천수행의 측면을 대표하는 종파라면 천태종은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교의의 연구라는 교학의 입장이다.
천태종의 교학은 소위 교관이문이라 하여 이론과 실천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는 교판과 교리를 포함하며 관은 소위 지관이라고 하는 실천방법이다. 천태종의 특징적 교의로서 일심삼관이란 삼제원융이라고도 한다. 즉 세 가지의 진리가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셋이란 공空, 가假, 중中을 말하는데 이 셋을 공관에 의해 자각한다는 의미이다. 假란 空에 의해 일단 부정되어 존해하는 것을 다시 假라고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假에 집착하게 되면 다시 현실의 전면적인 긍정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앞의 空과 이 假는 상호부정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假에 의해 공을 부정하듯이 空에 의해 假를 부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호부정을 中이라 한다. 그러나 이 中은 空과 假를 떠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법상종 法相宗
법상종이란 사물의 성질을 밝혀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며, 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한다. 법상의 법은 본체적이며 정신적인 사물, 즉 물질과 마음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법상종의 주요목적은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하는 것이다. 법상종에서는 사물의 본성을 우리의 마음과 의식 즉 심식이라 보고 이 심식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이 모든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유식종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일체의 현상이 空이라는 입장과 견해를 달리했던 실재론적 입장의 불교로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일체의 요소에 대해 연구했으며 실천수도에 있어서 취하는 특이한 입장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천태종 등의 다른 종파들과 교의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
화엄종 華嚴宗
중국의 수·당시대에 성립된 여러 종파 중에서 가장 깊은 철학적 교리를 전개한 종파가 화엄종과 천태종이다. 화엄종은 『화엄경』이 불교의 최고 진리를 교시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종파로서는 천태·삼론·법상 등보다 나중에 출발한 만큼 각 종파를 종합하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종래의 여러 사상들을 소위 오교십종의 체계로 분류함으로써 결국 화엄종이 최고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화엄종의 교의적 특징은 유심연기唯心緣起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며 유심연기唯心緣起의 입장은 서로 의존하고 관계되는 연기의 세계에 있어서 그 통일적 중심을 관찰하고 터득하여 그것을 진심眞心 또는 견실심堅實心이라 부르고 이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이에 대해 천태종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주장하는데 제법실상의 입장이란 서로 의존하고 관계되는 연결성만으로써 모든 현상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법계연기에서 법계란 상즉상입의 존재방식을 지닌다고 한다. 상즉이란 온갖 것이 서로 자기를 버리고 남에게 동화하는 것이다. 남이 있으므로 자기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주인으로 삼는다면 연결되어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은 동반자가 되어 그 하나를 돕는다. 상입이란 온갖 것이 서로 드나듦을 말한다. 즉 하나 속에 여럿이 들어가 걸림없이 자재함을 말한다. 따라서 상즉상입이란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 즉 일즉다 다즉일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너와 내가 대립하는 잡다한 현상계인 양 비치는 세계가 깨달은 사람에게는 법계로서 비친다.
정토교 淨土敎
대승불교에서도 특히 믿음이라는 신앙적 측면을 중시하고 믿음을 통한 구원을 약속한 것이 정토사상이다. 또 그러한 입장을 오로지 천명하여 교의를 전개하고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한 것이 정토교 또는 정토신앙이다. 중국에서 이 정토교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사회가 불안정함으로써 위기감이 고조될 때이다. 자력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선종이라면 타력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정토교이다. 정토란 '아미따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부처, 즉 아미타불이 과거의 무수한 공덕으로 인해 현재 거주하고 있다는 서방의 극락세계를 말한다. 정토교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경전을 소위 정토삼부경이라 하는데 곧『아미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토교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무량수경에 나오는 법장보살의 사십팔원 중 제 18원이다.
그 요지는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로 중생을 이끌겠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극락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 자신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이 본래부터 세웠던 맹세, 즉 본원이고 이 본원의 힘에 의해 중생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조계종 曹溪宗
우리의 불교사를 더듬어 보면 숱한 종파들이 성립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중에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명칭들이 있다. 조계종도 그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일단은 우리의 전통불교라고 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국의 모든 종파는 1424년에 선종과 교종이라는 두 종파로 통폐합되었다. 조선조의 태종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종래에 있었던 11종을 7종으로 정리하였고, 세종은 다시 이 중 3종을 묶어 선종이라 하고, 4종을 묶어 교종이라 하였다. 이 때 선종 속에는 조계종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계종 자체 내에서는 보조국사의 선을 정통으로 삼는 입장이 지배적인 것 같다. 이는 아무래도 그의 선이 한국 고유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의 독창적인 활동과 사상으로는 정혜사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정진하였으며 돈오점수·정혜쌍수를 주장한 것이다. 돈오와 점오란 애초에 중국 선종의 상반된 기본입장이었다. 그러나 보조는 양쪽의 가치를 다 인정하여 돈오로써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나면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일시에 제거되기 어려우므로 점수로써 점차적으로 닦아나가 온전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돈오로써 깨달음을 얻고 나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타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이 돈오점수다. 그는 말하기를 "돈오 이후 점수의 문은 더러움을 닦는 것만이 아니요, 다시 온갖 행을 겸해 닦아 나와 남을 아울러 구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한 것이 정혜쌍수이다.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정定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보는 지혜이다. 이런 입장은 결국 실천인 선과 이론인 교를 조화시키는 정신으로 이어진다.
정신통일을 꾀하는 선정의 수행과 학문적인 교리 연구로써 지혜를 닦아야 한다는 것은 정혜쌍수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원효 이래의 화쟁사상의 맥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조계종이 이러한 보조의 사상을 뿌리로 삼고자 한 것은 한국불교로서의 당연한 소망이라고도 하겠다.
첫댓글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