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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호 기사 번역문입니다.
박정혜(朴正惠) (상)_ 일본 국적에서 ‘조선적(朝鮮籍)’으로
취재 _ 나카무라 일성(中村一成)
자이니치3세 프리 저널리스트, 「교토조선학교 습격사건」저자
3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끝내고 녹음기를 멈췄다.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고 고개를 들자 이때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편안해진 표정의 박정혜씨가 있다.
“이렇게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조선적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것도, 민족학교 교사를 한 것도,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것도….
이 또한 민족학교를 만나고, 아이들을 만난 덕분이죠.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으로 변할 수 있어요. 내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에요.”
박정혜(朴正惠). 조선에 뿌리를 두었고, 일본 공립학교에 다녔던 아이가 조선의 말과 문화를 배우는 곳인 <민족학교>에서 30년 이상 교단에 섰고, 지금도 오사카시 민족강사회에서 상담역으로 일하며 후진들의 안식처가 돼주고 있다.
1942년, 평안남도 출신의 자이니치 1세인 아버지와 토야마(富山) 출신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 양가 모두 반대한 결혼이었지만, 법률혼이 아니었고, 태어난 박씨도 인정받지 못해 박씨는 어머니의 일본 국적을 이어 받았다. 조선대학교 학생이던 20살 때 결심을 하고 일본 국적을 이탈, 조선적으로 외국인등록을 했다. 졸업 후에는 6년간 조선학교의 교사를 한 후 오사카에서 민족학급의 강사가 되었다.
사실 이러한 경력에 대해 박씨는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얻을 피해를 회피하기 위한 ‘지혜’다. 총련계, 민단계 민족학교의 경우,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 동포들과 인연을 맺길’ 바라는 심정으로 부모가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데, <민족학급>은 교사가 조선출신의 아이를 발견하고 통급(通級, 일본 소학교에 설치된 언어장해 특수학급)교육을 추천해서 보호자의 이해를 얻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가정 사정과 사상 신조, 더 나아가서는 거주국 사회에서 장래의 전망 등 일본의 공립학교에 자식을 보내는 보호자의 이유는 각양각색으로 <민족>에 대한 의식도 다종다양해 민족학교 같은 전제가 구분 될 수 없다.
일본에서 조선의 말과 문화를 배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일본사회에서 <조선성(朝鮮性)>에 구애되는 등 리스크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인으로서 당한 차별을 내면화 시킨 사람도 있는데다, 말 그대로 <북조선 혐오>의 감정이 강한 사람도 적지 않다.
자기소개를 할 때 ‘조선대학교 출신’이라 말하면 그것만으로도 보호자가 민족학급을 꺼리는 일도 있다. 하물며 조선적(朝鮮籍)이다. 박씨는 오랫동안 국적을 물어오면 ‘민족적(籍)입니다’라고 대답하고, 고향이 화제에 오르면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입니다’라고 대답해 왔다. 여러 번 만나 대화를 거듭해 경력과 국적 이전에 먼저 자신의 인격을 알아주길 바라는 형태를 취해왔다.
본질적으로 일본국민 육성의 장이며, 조선인에게는 동화(同化)장치일 뿐인 공립학교에서 마이너리티의 장을 만들고, 유지, 발전시켜가겠다는 혹독한 싸움이 몸에 밴 <진중함>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상상 범위를 넘어 유포되는 서적에서 경력을 밝히는 것은 피해왔다. 학력과 직업력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공립학교에서 민족교육운동 기록인 첫 저서 <この子らに民族の心を(이 아이들에게 민족의 마음을. 2008년, 新幹社)에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몇 곳의 의뢰가 있었던 라이프 히스토리 인터뷰도 거부해 왔다. 그런 생각이 바뀐 계기는 2015년 입·퇴원을 하면서부터다.
“몸이 아프니까,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것저것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배워온 것은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미군기지
박씨의 기억은 5살 때 요코스카(横須賀)・미카사(三笠)에 있는 조선인부락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있던 판잣집은 맞은편에 군함이 보였어요. 원래는 미군의 무기창고였는데, 7~8개 창고 안을 베니어판으로 막아서 살았지요. 판자 한 장 사이라 한 집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죠. 판자에 구멍을 뚫어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며 놀기도 했지요. 태풍이 오거나 비가 많이 내리면 이내 판잣집이 엉망이 되었죠.”
어린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빈곤과 그것을 채워가는 동포들의 유대였다.
“함께 바다에 나가 조개를 모았는데, 냉장고 같은 게 없었으니까 구워서 건어물로 만들거나, 부락 바로 앞에 청과 시장이 있어서 일손을 도와주고 상품으로 팔 수 없는 남은 배추와 양배추, 무 같은 걸 얻어와 다같이 김치를 만들기도 했죠. 시장 일을 도와주고 수박을 얻어와 함께 먹은 일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어업을 나간 작은 배가 돌아올 시간에 모두 양동이를 들고 바닷가로 가서 뱃짐을 부릴 때 떨어진 생선을 주워 집에 가져와 달고 맵게 조림을 했지요. 먹을 수 있을 때는 다 함께 먹고, 먹지 못할 때도 다 같이 먹지 못하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인접한 미군기지는 부락의 조선인에게는 <보물산>이었다. 여자들은 해가 저물면 부대 안으로 몰래 들어가 재사용 가능한 ‘쓰레기’를 가져왔다. 제일 귀하게 여긴 것은 물자 운반용 나무상자다.
“상자를 분해해서 못 같은 쇠붙이들은 팔고, 남은 걸로 집수리에 썼죠. ‘집’ 자체를 아예 그걸로 지은 사람도 있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물자의 매매도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아키하바라(秋葉原)에 그런 물건을 사들이는 가게가 있었어요. 암시장이죠. 저도 소풍가듯 배낭을 메고 거길 갔죠. 배낭 속에 위스키나 치즈 같은 걸 넣어서 말이에요. 어머니는 나한테 ‘만약 붙잡히면 모르는 아줌마가 맡긴 것이라고 해라’ 하셨죠.(웃음)
단속이 심해지자 그만두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게 어린 마음에도 복잡한 심정이었어요…”
미군기지에는 환락가가 근접해 있어 일본인 여성을 데리고 미군 병사가 활보했다.
“<백인 거리>와 <흑인거리>가 있었는데, 실수로 들어갔는지 백인거리에서 흑인이 피투성이가 된 일도 기억납니다. 구두닦이를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미군 병사가 거만한 태도로 구두를 닦는 곳에 ‘털썩’ 발을 올려놓았죠. 그들은 하나같이 껌을 씹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껌을 씹는 사람이 싫습니다. 이런 말은 해선 안 되겠지만, 저는 미군 병사가 지나가면 ‘미국 놈’이라고 불렀어요.”
조국을 빼앗고, 이름과 문화를 짓밟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동원했던 구종주국 사람들을 왜나라 놈들, 즉 왜놈이라고 했던 것을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에 빗대어 부른 것이다.
“카바레에서 일하는 사람은 가난한 지역의 일본인 여성으로, 미군에게 몸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는데, 멸시받았죠. 저는 어렸지만 그 사람들도 열심히 사는 거라 생각해 오히려 응원했어요. 왜냐면 우리 부락에서도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살았으니까. 파친코 경품을 팔다가 붙잡히기도 했죠.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배우자를 폄훼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내들이 있었어요. 이 사회는 여자가 존중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미군과 일본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있었다.
“혼혈아에 대한 차별은 일본인, 조선인 상관없이 심했어요. 앞서 말한 구두닦이 아이도 그랬지만, 거리에 나가면 토박이 개구쟁이들이 ‘혼혈아’라고 부르며 돌을 던지거나 마구잡이로 못살게 굴었죠. 나 자신도 그렇지 않은가, 화가 났어요. 같은 혼혈아라도 흑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깜둥이’라 부르며 못살게 했답니다.”
그 아이들을 통해 박씨는 자신의 출신을 자각해 갔다.
관헌의 탄압 아래에서
부락 한 가운에는 주민들의 의지가 되었던 <요코스카 조선초등학원>이 있었다.
1949년 봄, 박씨도 입학해 테라이 쇼코(寺井章子)에서 박정혜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자주적으로 운영된 이 학교에서의 편안한 나날은 반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어느 날 아침, 몇 대의 트럭이 학교로 몰려들어왔다. 사이렌과 엔진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책상에 매달리려는 어른들을 경관대가 떼어냈고, 아이들의 목덜미를 붙잡아 개나 고양이처럼 건물 밖으로 쫓아내더니 학교 문과 창문에 모조리 판자를 덧대 붙였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형상처럼 보였습니다.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저는 경찰이 정말 싫습니다. 일본 동요에 <강아지 경찰관(犬のおまわりさん)>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그거, 아이들에게 절대로 부르게 하지 않았어요.(웃음) 물론 좋은 사람도 있지만 나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DPRK를 지지하고 일본공산당 지도아래서 민주혁명을 외쳤던 좌파 조선인운동의 탄압과 조선인을 키운 학교의 폐쇄는, 동서 대립시대에 행해진 미국의 일본 내 저항세력의 배제였다. 박씨의 부락에서도 권력과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처음부터 조직의 지시로 교토에서 이주해온 아버지 박원준은 투쟁의 선두였다. 아버지가 부락에 있는 길에 구멍을 파고 사상서와 서류를 묻었던 모습은 선명하다. 극비회합에도 따라가 회합장소인 집 앞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관헌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파수꾼’역할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용케도 그런 일을 아이에게 시켰다는 생각이 들지만, 회합 자리에도 데려갔던 것 같아요.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요, 소꿉놀이를 하는데 ‘자,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은 제가 합니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하니까.(웃음)”
어머니도 열렬한 활동가였다.
“미군기지에 삐라를 뿌리는 일인데, 몸에 삐라를 둘둘 감은 다음 겉옷으로 그것을 감추고는, ‘오늘은 미국 개놈들한테 다녀오마’ 하셔서 알았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사진관으로 가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 하거라’ 하며 나가셨죠. 공산당 위원장이 사진관을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한거죠.”
때때로 가택 수택도 있었다. 시커먼 경찰복의 경관대가 부락을 포위하고 흙발로 집안에 들이닥쳤다.
“경찰들이 몰려오면, ‘너희 같은 것들한테 당할까봐!’ 소리치며 연신 막걸리 항아리를 길바닥에 엎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가져가라!’고 소리치는 아주머니도 있었죠…. 부락에는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어요. 얼마나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만드는지 잘 아시잖아요. 화가 치밀어서 말이에요. 바닥도 벽도 전부 뜯겨졌죠. 무서워서, 조선인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요즘은 TV에서 영장을 가지고 가택수색을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나는 ‘우습기 짝이 없다’고 생각 하죠. 조선인한테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필사적으로 만든 생활기반이 마치 길게 자란 잔디를 깎아버리듯 파괴당해 갔다. 삶의 희망을 빼앗는 ‘수색’은 추방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먹고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은 번화가에서 나온 잔반을 모아 돼지를 키우고, 낡은 옷과 잡철을 모아 돈을 벌었다. 판매 금지된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씨에게는 통한의 기억이 있다.
“나도 가계를 돕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석을 끈에 달아 허리에 묶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석에 달라붙는 잡철을 모았어요. 비싸게 팔렸는데 좀 더 자란 다음에 의미를 알게 되었죠.”
바로 조선전쟁(6.25)이다.
“부모님을 도우려고 모은 철 조각이 동포를 죽이는 무기가 되었어요. 스스로를 책망한데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억울했죠. 그 때문에 일본은 부흥을 했잖아요. 그 후 일본인과 좋은 만남이 있었기에 일본인을 뭉뚱그려 원망하진 않았지만요…”
그러나 관헌의 탄압도 ‘배움’의 불꽃을 꺾지는 못했다. 빈 공터나 인접한 공립소학교의 한 교실에서 수업이 이어졌다. 당국과 교섭한 결과 학교는 공립소학교 분교라는 형태로 재개되었다. 조선인 교사는 무보수이고, 부락 사람들이 돌아가며 식사를 가져왔다. 법적으로는 공립학교의 분교이며, 민족과목 이외에는 일본인 교원이 수업을 했다. ‘죠센징은 돌아가라’고 공공연히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는 한편, ‘조선은 하늘과 강이 아름답고, 인정이 두터운 멋진 곳이다’라고 알려주는 교사도 있었다. 대대적인 탄압이 있는 후에 일이다. ‘같은’ 일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긍정’의 말이 얼마나 어린 마음에 힘이 되었던가.
박씨가 아끼는 <고향의 봄>이란 노래를 가르쳐준 것도 그런 일본인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한 번은 아버지의 고향(평안남도) 농촌 지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정혜야, 조선의 하늘이 얼마나 파란지 아느냐? 일본인은 저고리색이 화려하니 어쩌니 말하지만, 그 파란 하늘에는 초록과 빨강, 노란 저고리가 잘 어울린단다.”
조선의 자연 풍경을 설명해주는 수업에서 박씨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 노래는 그녀를 아버지의 고향으로 이끄는 동시에 일본사회에서 살아갈 희망을 이어준 그 때의 기쁨까지도 환기 시킨다. 이것이 후에 일본인과 함께 일하며 민족교육 운동을 해나가는 박씨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체험이 되었다.
활동가의 가정
하지만 곧바로 교사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간호사나 영양사 같은 직업을 가지려고 했죠. 자립해서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인생을 보내고 싶었어요.”
반면교사가 된 건 그녀의 아버지다.
작가이기도 했던 활동가인 아버지가 박씨의 눈에는 가정을 일절 돌보지 않는 ‘폭군’으로 비춰졌다.
“일단 집에는 계시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셔서 식사 준비는 소학생 때부터 내가 해야 했어요. 일본인 어머니가 정말 애쓰며 이웃에게 조선 요리를 배웠어요. 열심히 만드셨는데도 ‘우리 어머니의 맛은 이런 게 아니야’라고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셨죠. ‘맛있게 만들었다’라고 왜 한 마디도 안 해주셨는지 모르겠어요. 폭력은 전혀 없었지만, 활동가일수록 가정에서는 봉건적이라는 생각을 했죠. 집에 돌아오는 것도 매일 늦었어요. 당시는 가난해서 음식을 다시 데우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음식에 담요를 덮어 식지 않게 해두고 기다리는 거에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공연히 화가 났어요. 하지만 두 분은 몹시도 사이가 좋아서, 그것도 저한테는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래서 나는 활동가라면 아주 싫어했답니다. 물론 그런 활동 없이는 발전해 나가지 못하지만, 자칫하면 활동가는 가족을 희생시키게 되지요. 결국은 나도 활동가처럼 되었지만요.”
DPRK를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며 ‘민족을 위해서’를 모든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일본공산당 지도 시대의 <1국 1당>원칙에서 <조국 직결>로의 ‘노선전환’에는 순응하지 못하고 조직으로부터 비판당해 실의에 빠져 병으로 일찍 요절한 무심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존재를 마주하는 것도 한참 후의 이야기이다.
직업을 갖고 싶었던 박씨에게 조선대학교는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박씨는 일본대학으로 진학을 희망해 추천입학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담임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웃음), 나 모르게 어머니에게 의논을 했더라고요.”
어머니가 결심을 번복하기를 애원했다.
“나는 일본사람이라 너한테 조선인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대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지를 배우는 곳이니까, 조선대학에서 조선인과 친구가 되어 다양한 것들을 배워라.”
조선대학 문학부(현, 문학역사학부)에 진학해 독서에 몰두했다.
“고전을 통해 조선의 여성상을 탐구하고자 했어요. 자이니치 사회에서도 남녀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싸워서 자립하는 여성상을 동경했지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문학도 많이 읽었습니다.”
같은 세대의 동포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덧 각자의 이력이 화제에 오른다.
박씨는 그때까지 자신의 성장과정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조금 전 내가 말했던 ‘혼혈’이라는 말도 하기 어려웠죠. 친구들의 어머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웠어요. 왜 아버지는 일본인과 결혼했을까, 왜 어머니는 조선사람과 결혼했을까 생각했죠. 동포 사이에서는 아버지 이야기만 했으니까 ‘부자(父子)가정’이라 여겼을 거에요. 죄송스러워서 말하기 어려웠죠. 한편으로 일본인 사이에서는 어머니 이야기만 했으니까 ‘모자(母子)가정’이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당시의 박씨에게 자신의 출생은 정체성의 불안정함과 기댈 곳 없음일 뿐이었다.
결심을 하고 출생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은 어머니가 일본사람이고, 일본 국적이에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당시에도 일본국적의 친구가 네, 다섯 쯤 있지 뭐에요.”
일본국적의 친구가 생겼다. 그녀는 양친의 판단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는데, 민족운동과 만나면서 ‘뿌리’를 향한 마음이 싹텄고, ‘보다 민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조선대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국적이탈
결정적인 전기가 찾아왔다. 한일조약이다. 유상무상의 경제 지원과 바꾼 한국은 <대일청구권>을 포기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떠맡은 한·일 양국에 의한 ‘해결’은 현재에 이르는 화근의 한 원점이다. 이것은 2015년 말,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강행된 파렴치한 양국 간의 ‘담합’과도 통한다.
1962년 가을, 박정희의 오른팔 김종필이 막판 교섭을 위해 일본을 찾는다는 보도에 학생들은 들고 일어났다. 박씨와 친구들도 빌린 버스를 타고 항의하러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검문소가 보였다.
“경찰관이 와서 ‘모두 내려서 외국인등록증을 제시해라.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연행한다!’며 거만하게 말하더군요. 나와 친구는 일본 국적이라 외국인등록증이 없었으니까 서로 쳐다보며 ‘어떻게 하지…우린 없잖아…’했죠. 학생들이 심하게 항의해서 제시하지 않고 끝났지만, 그 일은 내가 일본 국적을 처음으로 의식한 때였어요. 너무 어렸죠. 일본 국적으로 민족학교에 갔으면서도 그때까진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자신에게는 등록증이 없다. 알 수 없는 결핍감이 국적 변경의 결심으로 바뀌었다.
“진짜 조선 사람이 되려면 등록증이 필요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나한테 이유는 그것뿐이었어요.”
친구와 둘이서 조선적으로 바꾸기로 결심하고 박씨는 부모에게 의논했다. ‘동포사회에 기반을 두고 살기 위해 일본 국적을 이탈하고 싶다’고. 어머니는 전면적으로 찬성해 주었다. 아버지는 한참동안 박씨의 얼굴을 보며 ‘진심으로 할 생각이냐’고 물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호적을 찾아 보증인을 구하고 방대한 서류를 혼자서 다 썼다.
“엄청난 양이었죠. 197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라 정신없어서 변경신고가 늦어졌어요, 니시나리(西成)경찰서에 불려가 조서를 쓴 일이 있는데, 그 때 당시의 서류 하나를 내게 내놓았는데, 이렇게 많았죠.” 라며 들어 올린 손바닥과 책상의 거리가 20센티쯤 되었다.
국적을 바꾼 후 증명서를 가지고 가서 외국인등록을 마쳤다. 담당관의 태도는 지금도 기억한다.
“‘정말 괜찮겠습니까?’하고 몇 번을 물어보았죠. 그 말에 화가 났어요. ‘조선인은 모두 일본인이 되고 싶어 하는데, 왜 당신은 조선인이 되려고 합니까?’라고 하더군요. 거만한 태도였어요. 지금도 그 공무원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한다니까요. 우리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친구들과 의논했는지. 사실 우리 자이니치의 국적란을 이토록 복잡하게 만든 것은 일본 아닌가요.”
박씨에게는 인생의 새 출발이었다.
그러나 함께 신청했던 친구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일본인이 되고 싶어서 ‘귀화’한 사람이 국적 이탈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 했죠. 그녀가 원해서 귀화한 것도 아닌데…”
아버지가 조선인이고 자녀로 인정을 받지 못한 박씨의 경우, 당시 한국국적법(조선적을 가진 이에게도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에 근거해 일본 국적 이탈과 외국인등록이 가능했지만, 일가가 모두 ‘일본국민’이 되었던 그 친구의 경우 그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친구가 조선적 취득을 결심한 이유는 조선대학에서 알게 된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적을 취득해 함께 DPRK로 귀국하겠다는 꿈은 제도의 벽에 부딪혔고, 연인은 그녀를 남겨두고 귀국했다. 다음 연인도 마찬가지로 귀국을 원했으나, 두 번째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인은 그녀를 일본에 남긴 채 바다를 건넜다. <일본인 아내>로서 귀국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학생끼리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살 미수를 겪고 결국 근무하던 곳에서 알게 된 일본인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결혼하는 조건은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조건으로 결혼했느냐고 묻자, 자신과 같은 고뇌와 괴로움을 겪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며. 그 후 결국 이혼하고 말았죠. 부모가 ‘귀화’한 아이는 정말 안타까워요. 본인이 선택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박씨가 몇 번이나 직면하는 고뇌이며, 분노였다.
“민족학급에서 여러 번 상담을 했는데, 괴로웠어요. 해줄 말이 없는 거에요. <국적>으로 인격이 규정되는 게 아니다, 조선적, 한국적, 일본적은 정치적으로 붙여진 것뿐이고, 민족은 하나니까 어떻게 나답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아닌가요? 라고 얘기해주지만, 본인의 마음은 다른 거죠. 거기에 구속되어 있는 건 일본사회의 억압 때문이에요. 뿌리에 눈을 뜨고 본인이 희망한 경우에는 국적을 되돌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동포사회에 뿌리내리고 살겠다는 마음은 대학 실습으로 찾았던 각지의 동포 커뮤니티와 조선학교에서 더욱더 강해졌다.
“숫자 공부를 할 때였는데 어떤 할머니가 종이에 내 이름의 ‘正’을 종이에 가득 쓰고 계신 거에요. 뭐냐고 물으니까 ‘5(다섯)’이라고 하시더군요. 숫자를 쓸 수 없었던 거죠. 나는 조선대학교를 나왔기에 동포사회에서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박씨의 남동생 둘은 모두 DPRK로 귀국했고, 아버지는 박씨에게도 따라 귀국할 것을 권했으나, ‘자신은 자이니치를 위해 공헌하겠다’며 거절했다. 자신이 살던 요코하마를 떠나 민족학교의 교사로서 교단에 서 경험을 쌓았고, 제주도 출신의 자이니치 1세의 남성과 결혼했다. 출산휴가 중, 박씨의 인생은 커다란 기로에 서게 된다. 민족 강사로 스카우트 된 것이다.
(하) 로 이어짐.
첫댓글 글을 읽고" 60만명의 동포면..(온갖 차별과 장벽속에서 살아온 )60만의 우주와 60만의 인생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
또 하나의 역사네요.... 좋은 글 소개 고맙습니다. 수고했어요 미영씨 ~~
이런 아픔을 우리 후세대에게 계속 물려줘야 한다는게 가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