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루중수기[七星樓重修記]
전병조(全柄朝)1)
우리 14대조 휴계(休溪) 선생의 이름은 희철(希哲)이니, 곧 고려시대에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옥천군(沃川君)에 봉해진 전유(全侑)2) 란 분의 5대손이다. 선생은 재기가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확고하였으며 일찍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진로를 바꿔 무과에 급제하였다. 문종(文宗)과 단종(端宗) 두 임금을 섬겨 관직이 어모사직상장군(禦侮司直上將軍)에 이르렀다.
단종이 왕위를 양보하자 비분강개하여 육신과 더불어 눈물로써 작별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영주(榮州)의 휴천(休川)에 은거하여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매일 칠성산(七星山)에 올라가 영월(寧越) 땅을 바라보면서 배례를 올렸다. 단종이 승하하자 통곡을 그치지 않고 삼년상을 치렀다. 중종조(中宗朝)에 80세로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3) . 병이 들어 임종할 때에는 여러 자식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해마다 한번 씩 장릉(莊陵)4) 에 가서 참배하거라.”라고 하였다.
후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5) 선생이 영주를 지나면서 느낀 감회를 시 한 구절로 읊었는데 그 시에 “한 줄기 방산(方山)은 어디에 있는 건가? 남쪽 와서 두문동(杜門洞)6) 을 다시 보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양천(陽川) 허전(許傳) 선생이 지은 「휴계유적서休溪遺蹟序)」에 이르기를“오직 전공의 절개가 동방에 빛을 발하니, 방산의 푸른 하늘 아래 고결한 사람 편안히 누웠도다.”라고 하였다.
인조조(仁祖朝)에 선생의 5대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7) 가 칠성루(七星樓)8) 를 창건하여 추모의 장소로 삼았으며, 선조조(宣祖朝)에 휴계공의 증손인 전개(全漑)9) 가 휴계재사(休溪齋舍)10) 를 칠성루 바깥쪽에 구축하여 선생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삼았다. 세월이 흐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칠성루와 재실이 모두 기울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문중 사람 전하우(全河禹)가 여러 문중사람들과 함께 중수의 의지를 모으고 또 경상북도 문화재로 등록하여 영구히 보호될 수 있는 대책을 꾀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조를 추모하고 그 업적을 계승할 수 있는 방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정성을 볼 수가 있다.
여러 문중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그 전말을 기술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나 또한 같은 조상의 자손으로서 추모의 정 또한 같으니 어찌 감히 외람되이 사양할 수 있으랴? 가만히 엎드려 선생이 당시에 하셨던 일을 생각해보니 그 고고한 충정과 곧은 절개는 우주를 지탱하는 버팀목이고, 해와 달과 빛을 다툰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 이런 상전(桑田)11) 의 물결이 백겁(百㤼)의 세월을 더 흐를지라도 저 누대를 바라보고 그 업적을 듣는다면 누군들 경계를 따라 감회가 일어나 두 손을 마주잡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리오. 하물며 그 자손들의 추모의 정성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저 이곳 칠성루에서 거처하는 우리 문중 사람들은 마땅히 선생의 충절을 공부하고 마음에 새겨서 계승해 나갈 것을 생각하고, 또 휴계재사의 제향 의식을 미루어 생각하여 그 엄숙함과 공경심을 더한다면 선생의 덕이 진실로 바로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니 축문을 올리고 분향하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령께서 감응하실 것이니, 넘실대는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마음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장과 같은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고, 밝은 덕이 바로 향기로운 것이다12)는 것이다. 우리 여러 종씨(宗氏)들은 더욱 선조의 덕을 닦는 일에 매진하여 오랜 세월동안 선생의 도의가 실추되지 않게 한다면 이 누각은 더욱 광채가 있을 것이며 이 건물의 기둥이며 들보와 섬돌이며 계단이 장차 칠성산과 함께 그 수명을 함께 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아니하리오.
광복후 정묘년(1987) 입추절(立秋節)에 14대손 전 성균관부관장(成均館副館長) 전병조(全柄朝)가 삼가 짓다.
1) 전병조(全柄朝) : 본관은 옥천(沃川). 17대 성균관부관장을 지냈다.
희철(希哲) : 전희철(1425-1521).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2) 전유(全侑) : 옥천(沃川) 전씨의 시조. 고려 충숙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부사(密直府使)·판도판서(版圖判書)·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고, 관성군(管城君 : 옥천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3) 제수받았다. :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 및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인 수직(壽職)을 받은 것을 말한다.
4) 장릉(莊陵) :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4리 에 있는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
5) 정경세(鄭經世) : 정경세(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유성룡의 문인으로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복집』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방산(方山) : 경상북도 영천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북안면 고지리와 신촌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6) 두문동(杜門洞) : 경기도(京畿道)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땅으로 조선 왕조를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낀 고려의 충신 72인이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여기서는 전희철이 영주 휴천에 숨은 일을 견주었다.
허전(許傳) : 허전(許傳 1797-188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병조참의에 올랐다.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 저서로 『성재집』이 있다.
7) 전익희(全益禧) : 전익희(1598-1659).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의 5세손으로 선산부사를 지냈다. 저서로『설원당문집』과 유고(遺稿)가 전한다.
8) 칠성루(七星樓) : 전희철(全希哲)이 살아서는 단종(端宗)이 유배된 영월(寧越)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힌 그의 사적에서 5대손 전익희(全益禧)가 칠성루라 하였다.
9) 전개(全漑) :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망일당(望日堂)이다.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의 증손으로 직장(直長)을 지냈다.
10) 휴계재사(休溪齋舍) : 휴계(休溪)는 전희철(全希哲)의 호로 그가 은거했던 영주(榮州) 휴천(休川)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유덕을 기려, 증손인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가 1576년(선조 9)에 짓고 휴계재사라고 하였다.
11) 상전(桑田) :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의 신선인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니, 뒤에 마고가 와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다.
12) 것이다 : 밝은 덕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로운 제사라는 말로 『서경(書經)』 『군진(君陳)』편에 나온다.
七星樓重修記
惟我十四世祖。休溪先生。諱希哲。卽高麗密直副使。版圖判書。沃川君。諱侑。五世孫也。生才器超邁。志操堅確。早達文章。中生進兩試而旋擢虎榜。歷事文端兩朝。官至禦侮司直上將軍。端宗遜位。悲憤慷慨。與六臣泣別。棄官南下。榮州之休川。隱居不出。日登七星山。望拜寧越。端宗昇遐。痛哭不已。服喪三年。中廟朝。以大耋陞授護軍。及病而臨終時。命諸子曰。汝等。歲一往拜莊陵云。後愚伏鄭先生。過榮州感吟一句。詩曰。一抹方山何處是。南來復見杜門洞。陽川許先生。作休溪遺蹟序。有曰。惟公節介。東方生光。方山蒼空。高潔安臥。仁祖朝。先生五世孫。雪月堂。諱益禧。創建七星樓而以爲寓慕之所。宣祖朝。休溪公曾孫。諱漑。搆休溪齋舍樓外而以爲先生俎豆之所。歷歲旣久。樓與齋。俱至傾圮。宗人河禹君與諸宗人。合謀重葺。又圖慶北文化財之登錄。而以爲永久保護之策。可見其誠於追遠而益敦繼述之方矣。諸宗人。使余記其顚末。余亦仁祖之孫。追慕攸同。豈敢辭諸。窃伏念先生當日之事。其孤忠直節。可謂撐柱乎宇宙。爭光乎日月。今此桑瀾百㤼之餘。望其樓而聞其蹟。則誰不緣境興感。携手仰止。況子孫追慕之衷乎。凡此吾宗人之居此樓者。宜講服乎先生之忠節而思紹述之。又推思休溪齋舍之享儀而加肅敬焉。則先生之德。實居然在玆。不待尸祝香火之擧而精神之所感。自當洋洋乎如見矣。是則所謂黍稷非馨。明德惟馨者也。吾僉宗氏。益加勉勵於先德之修。而使先生之道不墜於久遠。則斯樓也。益有光矣。而其棟樑砌石。將與七星山。同其壽也。盍相與勉之哉。
光復後丁卯立秋節。十四世孫。前成均館副館長。柄朝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