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봉황(鳳凰)과
중국의 용(龍)의 역사전쟁
― 동이족(東夷族) 봉황(鳳凰)문화와 지나족(支那族) 용 문화 ―
우리 배달(倍達) 민족 곧 한민족(韓民族)은 봉황(鳳凰)과 용(龍)을 둘 다 신성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봉황을 더 신성시하였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민족은 지도자의 상징으로 봉황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우리민족의 상징은 호랑이나 곰이 아니라, 봉황인 것이다. 동이족(東夷族)의 신수(神獸)는 하늘의 새인 봉황이며, 지나족(支那族)의 신수는 바다의 짐승인 용이다.
봉황은 불(火)과 대륙 문화를 상징하고, 용은 물(水)과 농경문화를 상징한다. 중국 지나(支那)족은 황하(黃何) 강 유역에서 물(水)을 중심으로 출발하였고, 동이족인 배달민족은 북만주와 요동에서 시작하여 대륙에서 말 타고 큰활을 쏘는 문화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큰 대(大) 자에 활 궁(弓) 자를 합해 만든 글다가 바로 우리 민족의 글자인 어질 이(夷) 자다. 지금은 지나족(支那族)의 영향으로 이(夷)자의 훈이「오랑캐」라는 뜻이 첫머리에 들어갔지만, 이는 우리 동이족을 깎아내리려는 지나(支那)족의 책략이요, 본디 뜻은「동방에(동東은 방향도 의미하지만 해(신이 사는)가 뜨는 존경해야 할, 받들어야 하는 지역) 사는 어진 민족」이란 뜻이다.
활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활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5천년 전에 대정씨(大庭氏)가 만들었다는데, 발해(渤海)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의 조상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1019~86)이 찬술했다는《자치통감(資治通鑑)》호삼성(胡三省) 주(註)에 나오는 이런 글에서 비롯된다.
“대정씨(大庭氏)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를 않고, 시신을 백모(白茅)로 싸서 들판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대정씨는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사랑하는 부모님의 시신을 들짐승들이 찢어 먹는 것을 두려워하여 시신 가까이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팽팽하게 줄을 맨 다음 싸리 가지로 화살을 매어 짐승을 쫓았다고 한다.”
이렇게 생겨난 활은 정신수련에 씌었지, 결코 살상무기로는 쓰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장례 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조상할 조(弔)자를 보면, 활(弓)에 화살을 먹인 모양(弔)으로 남아 있다. 현대 중국에서 만든 속자 조(吊)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 후한(後漢, 주후 25~220)시대에 허신(許愼)이 지었다고 하는《설문해자(說文解字)》1) 라고 하는 책은, 한자의 근본 원리를 해설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책인데, 그 책에서 夷 자를 찾아보면,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 이(夷)란 동쪽 사람이다. 남쪽 사람은 만(蠻, 오랑캐만)이라고 한다. 벌레를 따르기 때문이다. 북쪽 사람은 적(狄, 오랑캐적)이라고 한다. 개를 따르기 때문이다. 서쪽 사람은 융(戎, 오랑캐융)이라고 한다. 염소를 따르기 때문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이(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의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다.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후에 고구려의 의미, 높은 아홉의 민족이 사는 곳) 나라에 가고 싶다」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연유 있는 일이로다.
<원문> : 東方之人也。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浮於海有以也。
<주> : 1) 설문해자(說文解字) :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 후한(後 漢) 때 허신(許愼:58경~147경)이 편찬했다. 본문은 14권이고 서목(敍目) 1권이 추가되어 있다. 9,353개의 글자가 수록되었고, 중문(重文:古文·文의 異體字)이 1,163자이며 해설한 글자는 13만 3,441자이다. 최초로 부수배열법을 채택하여 한자 형태와 편방(偏旁) 구조에 따라 540개의 부수를 분류했다. 통행하던 전서(篆書:小篆)를 주요 자체(字體)로 삼아 고문(古文)·주문(文) 등의 이체자를 추가시켰다. 글자마다 지사(指事)·상형(象形)·형성(形聲)·회의(會意)·전주(轉注)·가차(假借)의「6서」(六書)에 따라 자형(字形)을 분석하고 자의(字義)를 해설했으며 독음을 식별했다. 고문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중국 고대서적을 읽거나 특히 갑골문(甲骨文)·금석문(金石文) 등의 고문자를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송대(宋代) 서현(徐鉉)이 쓴 교정본이 남아 있다. 후세인들의 연구저작이 대단히 많으나 청대(淸代)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 說文解字注〉가 가장 자세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언어가「빨리 빨리」인데, 이는 곧 말(火를 상징)을 타고 다니는 대륙기질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언어가「만만디(慢慢地, 천천히)」인데, 이는 물(水)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상징은 주로 불(火)을 상징하는 봉황이며, 중국의 상징은 주로 물(水)을 상징하는 용인 것이다. 물과 불로서 상극이다.
그런데 용에는 암수 구별이 없지만, 봉황의 경우는 암수 구별이 있다. 봉(鳳)은 수놈이고, 황(凰)은 암놈이다. 봉황이라고 하면 수놈과 암놈을 모두 싸잡아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봉황의 새끼를 봉추(鳳雛)라고 한다. 봉황은 주로 오동나무에 서식하며, 특히 대나무 열매를 좋아하며 깨끗한 샘물을 마시고 산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옥편인《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봉황은 신조(神鳥)다. 동방의 배달국에서 나왔으며, 사해(四海) 밖 곤륜산을 지나치기까지 날아간다. 오동나무에 서식하며, 특히 대나무 열매를 좋아하며 깨끗한 샘물을 마시고 산다.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정된다.
<원문>:《說文》四云:「鳳、神鳥…。出於東方君子之國,?翔四海之外,過昆侖,飮砥柱,濯羽弱水,暮宿風穴,見則天下安寧」。
우리 동이족은 용보다는 봉황을 더 신성시하였다. 천손(天孫)민족임을 자부하는 뜻에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메신저로 봉황을 더 중요시 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는 봉황의 변형이다.
봉황에서의 봉(鳳)은「새 중의 새」를 뜻하며, 황(凰)은「배달국임금(皇)의 새」 를 뜻한다. 중국에 황제가 나타난 것은 배달국보다 훨씬 후대인「진시황(秦始皇)」 때부터이다.
「진시황」의「시황(始皇)」은 처음으로 황제가 나왔다는 얘기이다. 진시황 이전에는 배달민족의 나라, 즉 배달국, 고조선의 임금이 황제였고, 그래서 황(皇)자는「배달나라의 왕」을 뜻하는「白+王」 을 합쳐 쓴 것이다.
중국의 옛날 역사책에는 배달민족은 백민(白民)으로 나온다. 밝달(밝은 땅), 박달, 백달, 박달나무 단(檀)의 변천을 거쳐서「배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봉황」은「새 중의 새, 배달나라 임금(皇)의 새」를 뜻하는 일이고, 지금도 대한민국(大韓民國) 청와대의 상징문양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봉황은 왜 태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는가?
《예문유취(藝文類聚)》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닭은 적양(積陽)으로 남방의 상이다. 화양(火陽)은 물(物)을 정하게 하여 불꽃이 솟는다. 그러므로 해가 뜨면 닭이 우니 유감(類感)으로써 그런 것이다. (해가 솟을 때 기뻐하여 같은 닮음을 보고 우는 것이다.)”
<주> : 2) 예문유취(藝文類聚) :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類書); 100권. 내용 구성은 천(天) · 세시(歲時) · 지(地) · 주(州) · 군(郡) ·산(山) · 수(水) · 부명(符命) · 제왕(帝王) 등 48부(部)로 나누어, 먼저 사실을 기록하고 다음에 그것에 관한 시문(詩文)을 수록하였다. 이 가운데 소미도(蘇味道) · 이교(李嶠) · 송지문(宋之問) · 심전기(沈佺期)의 시가 들어 있는 것은 후인이 찬입(竄入)한 것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의 간행본이 전한다.
곽박(郭璞)이 편찬한《현중기(玄中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는데, 위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도도(桃都)라고 부르며, 나뭇가지가 삼천리나 뻗어 있다. 위에는 하늘 닭 천계(天?)가 있어, 해가 처음 떠서 이 나무를 비추면 운다. 그러면 천하의 모든 닭이 일제히 따라 운다.
<원문>:東南有桃都山, 上有大樹, 名曰桃都, 枝相去三千里. 上有一天?, 日初出, 光照此木, 天?則鳴, 群?皆隨之鳴。
이렇게 옛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태양과 닭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여긴 것이다. 해가 뜨면 닭이 울거나, 혹은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인과 관계, 피차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유감(類感)의 발생을 초래하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 보면, 삼족오(三足烏, 일명 태양 새)가 나오는데, 태양 속에 들어있는 세발가진 까마귀이다. 세발 까마귀는 원래 동이족이 숭상하던 신성한 새였다. 고대의 배달민족은 세 발 달린 까마귀가 태양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태양신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단군의 지팡이 꼭대기에 까마귀를 조각함으로써 단군이 태양신의 사자임을 나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삼족오(三足烏), 그리고 정월 대보름의 까마귀제사 등에서, 신조(神鳥)로서의 까마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동네 입구의 솟대가 남아 있는데, 자세히 보면 세 마리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족오
고대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는 예언을 하는 새였다. 삼국시대 책이나 이야기들에서 보면, 까마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삼족오(三足烏, 일명 태양새)는 유일하게 남은 ‘태양 삼신(三神)’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이「태양 삼신(三神)」에 대해서 구한 말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고조선의 국교는 삼신교(三神敎) 즉 신교(神敎)였다.”
그는 또「삼신(三神)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박은식 선생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에게 삼신(三神)은 생명을 주고 가호(家護)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삼신(三神)에게 제사하는 의식과 관습이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족오는「태양 삼신(三神)」이며, 곧 환국(桓國)의 환인(桓仁),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을 지칭한다.
中華第一玉雕龍 원래, 중국의 용 문화는 청구(靑邱) 배달국(倍達國)의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수입해 갔다. 홍산문화는 배달국의 제1대 환웅인 거발환(居發桓, 주전 3,898년 즉위) 천황이 수도를 신시(神市)에 정한 이후부터, 제13대 환웅인 사와라(斯瓦羅, 주전 2,774년 즉위) 천황까지의 문화를 말하는데, 홍산문화 유적지인 내몽골 삼성타랍 지구에서 1971년 옥저룡(玉龍)이 발견됐다. C 자 모양의 이 용은「중화제일옥조룡(中華第一玉雕龍)」으로 명명되었다.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쓴다.
여기서 발견된 옥룡(玉龍)은 5천년 전의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용문화가 배달국에서 시발했고,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중국의 용문화는 중국 지나족의 시조인 황제 헌원(軒轅, 주전 2,692~2,593)에게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황제 헌원은 청구(靑邱) 배달국의 치우천황(蚩尤天皇)으로부터 변방의 자치정부의 황제로 임명받았는데, 치우천황(蚩尤天皇)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
도교(道敎)의 유서(類書)이며 북송(北宋), 진종(眞宗), 천희(天禧) 연간(1017~1021)에 장군방(張君房)이 편찬했다는,《운급칠첨(雲?七籤)》의「헌원기(軒轅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썼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구리머리(銅頭)에 무쇠이마(鐵額)」라고 하였다.
<원문>:蚩尤始作鎧甲兜? 時人不識 以爲銅頭鐵額。
치우천황은 철갑에 구리투구를 쓰고, 박치기 왕 김일(金一, 1929~2006) 선수 모양으로 적의 이마를 받아 묵사발을 만드는,「박치기전」(頭觸戰, 두촉전)을 썼기 때문에. 헌원과 그의 군사들은 벌벌 떨었다.
이 이야기는, 6~7세기 양(梁)나라의 임방(任昉)이 쓴《술이기(述異記)》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구레나룻은 칼날같이 날카롭고, 머리에는 뿔이 있는데, 헌원(軒轅)의 군사와 더불어 싸울 때, 뿔로 받아치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지를 못했다.
<원문> : 秦漢間說 蚩尤 耳? 如劒戟 頭有角 與軒轅鬪 以角觸人 人不能向。
청구 배달국의 문화를 일명 용산문화(龍山文化)라고 하는데, 청구 배달국의 용산(龍山) 문화도 또한 신시 배달국의 홍산(紅山) 문화처럼 나중에 중국의 문화가 출발하는 모태가 된다.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나라의 문명은, 동방의 배달국과 고조선(古朝鮮)에서 전파된 것이라는 역사적 실증자료가 속속 발굴되고 있다.
치우(蚩尤) 천황은 주전 2,700년에, 백두산 아래 신시(神市)에서 요녕성의 요하강 서쪽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긴 후, 황제 헌원(軒轅)과의 결전을 치렀으며, 산동반도의 태산(泰山) 아래와 황하강 유역에 배달국의 청동기 문화를 보급하였다.
이 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의 동쪽에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용산(龍山)지역이기 때문에「용산문화(龍山文化)」라고 한다. 용산문화 유적지는 요녕성, 산동성, 하남성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지역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
이 지도는 한국인의 저서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외국인의 고대 아시아역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1. 환국(Hwan-gook), 2. 배달국(Baedal), 3. 고조선(Old Joseon), 이렇게 경역이 표시되어 있다.
청구(靑丘) 배달국의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시작이다. 치우(蚩尤) 천황이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청동기 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돌입하였음을 나타낸다.
용산문화 유적지에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 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 등의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난 후부터는 청구(靑丘) 배달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의 하(夏)나라 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중국의 지나(支那)족은 자기네들이 용의 계승자(傳人)라고 하며,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한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용의 후손이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용을 새긴 벽, 용 조각의 지붕, 금실로 수놓은 용, 용 모양의 배, 용 도안, 용을 그려 넣은 티셔츠, 용을 상호로 하는 각종 회사들이 수두룩하다. 용춤(龍舞)은 지나(支那)족 및 중국 소수 민족들의 민간에서 행해지던 춤이며, 용춤(龍舞)을 통하여 용이 중국인 한족의 초강력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지나(支那)족은 본래 동남아 같은 남방계의 뱀을 신성시하였다. 뱀토템 사상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일찍 광범위하게 퍼졌던 사상이다. 뱀토템 사상이 황제 헌원(軒轅)의 시대에 이르러 청구(靑邱) 배달국의 용 문화를 수입하여 업그레이드 일반화 되었고, 그로부터 중국 지나(支那)족은 용을 신성시 하였던 것이다.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는 신물(神物)이요, 황하(黃河) 속에서 꿈틀대던 물귀신 곧 수신(水神)으로 중국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중국 황하강(黃河江)의 사진을 보면, 구불구불 굽이치는 황룡 한 마리를 보는 듯 하다. 황하(黃河)는 중국 지나(支那)족에게는 어머니의 강이요 민족의 젖줄이었으며, 그런 영향으로 중국인들은 더욱 용을 신성시하였다. 동이족을 상징하는 영물은 봉황이었고, 황하족을 상징하는 영물은 용이었다.
─ 중국의 신화와 전설 가운데 중화민족 창조와 관련하여 가장 보편적인 신화는 여신 여와(女?)씨와 남신 복희(伏羲)씨의 이야기이다. 혼자 지내기에 심심했던 여신 여와(女?)가 황하의 황토 진흙으로 인형처럼 사람을 빚어내었는데, 땅에 내려놓자마자 살아 움직이며 그녀 주위에서 즐겁게 뛰어 놀았다. 여와는 너무 기뻐 매일 쉬지 않고 사람을 빚었는데, 하루는 너무 지쳐 묘책을 궁리하다가 넝쿨을 잘라 진흙탕에 담가 두었다가 휘두르니, 넝쿨에서 떨어진 진흙 방울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천지간에 사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여신 여와(女?)는 나중에 사람들을 위해 나쁜 괴물도 물리쳐 주고, 결혼제도를 만들어 남자와 여자가 후손을 생산하도록 돕기도 하였는데, 그 모습은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여신이었다. 얼마 후, 여신 여와(女?)에게 배우자가 생기는데, 그가 바로 남신 복희(伏羲)이다. 복희는 인류에게 사냥을 가르치고 팔괘와 문자와 음악 등 중국문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고, 중국에서 국가적으로 숭배하는 중요한 신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복희 역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로 전해내려 온 여와(女?)와 복희(伏羲)의 그림은 서로 뱀꼬리를 휘감고 있는 남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중국 지나(支那)족이 오래 전부터 뱀 토템 사상을 숭상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뱀 꼬리를 휘감고 서로 꼬여 있는 모습은 남녀의 결혼을 상징한다. 참고로, 태호(太昊) 복희(伏羲)씨는 인류 최초로 혼인제도를 제정하여 인륜의 푯대를 세우신 분이며, 문자를 제정하였고, 역(易) 철학을 창시하였으며,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서 인류 문명을 처음 개창하신 분이다.
얼굴은 사람이요, 몸둥이는 뱅의 형체인 여와씨와 복희씨 그림
중국인이 저술한《고사변(古史辯)》은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소호씨는 동이계다. 동이사람이다.” (小昊氏東夷系也 東夷之人也。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昊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신화나 설화 속의 신(神)과 영웅은 대개 이처럼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주가 혼돈 덩어리였을 때 자신의 몸을 바쳐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고 천지를 창조했던 반고(盤古)가 그렇고, 수신(水神)으로서 신들의 전쟁에 참여했던 공공(共工)과 그의 신하들이 그렇다.
중국신화의 보물창고인《산해경(山海經)》에는 사람과 동물을 합성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특히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신(神)들이다.
서구인들은 뱀과 용을 주로 악마나 사악한 존재로 인식하여 왔다. 아담(Adam)을 유혹한 뱀을 공격적이고 위험한 동물로 상징화시켰고,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켰다. 헤라클레스(Herakles)와 같은 고전 영웅들의 신화는 용을 물리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구하는 왕자도 또한 먼저 용과 싸워 이겨야 한다. 중국의 뱀과 용이 수신(水神)으로서 존귀함의 상징이었음에 반해, 서구의 뱀과 용은 입에서 불을 뿜는 악마의 상징이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말세에 될 일을 기록하였다.
─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에덴의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개역개정판 계 12:8)
한편, 우리 민족을 일컬어 동이족이라고 부른다.《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동이족은 동방의 큰 활을 잘 쏘는 어진 민족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궁(洋弓)에서 석권하는 이유가 그래서인지 모른다. 동이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활을 잘 다루어야 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기마술과 궁술(弓術)의 달인이었다. 이렇게 동이족은 중국 문화의 뿌리요, 문명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인류문명의 뿌리와 중국 지나(支那)족 문화의 뿌리가 모두 동방 배달국과 고조선에서 전해진 고대 신교(神敎)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동이족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와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까지는 지나(支那)족의 존재가 중국에서는 없었으므로 중국의 상고사(上古史)는 동이족의 역사였고, 뱀을 숭배하는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역사서인《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황제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책에서는 황제헌원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봉황과 용과 관련해서 복룡봉추(伏龍鳳雛)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새끼라는 뜻이다. 초야에 숨어 있는 훌륭한 인재를 말하며, 제갈공명(諸葛公明, 181 ~ 234)과 같은 인물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제갈공명이 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제갈공명제갈공명(諸葛公明, 181 ~ 234)은 산동반도 랑야국(琅?國) 양도(陽都)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의 집에서 자라면서 숙부가 원술(袁術)에 의해 예장(豫章) 태수로 임명되자, 숙부를 따라 남쪽으로 왔다. 제갈공명은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이고, 도교(道敎)에서는 관우와 함께 신(神)으로 추앙되고 있다.
제갈공명의 제갈(諸葛)은 본디 갈(葛)씨가 본성(本性)이고, 지금의 산동반도인 랑야국(琅?國)의 제현(諸縣)이란 곳에서 살다가 나중에 양도(陽都)로 옮겨 살았으며, 제현(諸縣)에서 온 갈(葛)씨라는 뜻으로 제갈(諸葛)씨가 되었다. 따라서, 제갈공명은 산동반도에 살았던 동이족이었으며, 지나(支那)족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산둥반도는 동이족이 살던 곳이다.
한편, 동이족인 강태공(姜太公)은 나중에 제(齊)나라의 왕이 된 후에도 배달국의 신교(神敎)의 문화를 중국의 지나(支那)족에게 전수해 주었고, 배달국의 신교(神敎)와 삼신관(三神觀)을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중국 제(齊)나라에서는 팔신제(八神祭) 풍습이 있었는데, 팔신제(八神祭)는 팔신(八神)에게 제사지내는 제천 의식이다. 여기서, 팔신은 삼신(三神)과 치우(蚩尤)천황, 천지일월을 말하고,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도읍지를 청구(靑丘)로 옮기고, 동방 최초로 청동기 국가 문명을 내놓은 치우 천황(蚩尤, 주전 2,707년 즉위)을 말한다.
그 후, 900년간 중국은 배달국의 신교(神敎) 문화와 치우천황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셨다.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2002년 2월부터 추진하고 향후 5년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쪽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동북지역,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의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에 있다. 중국은 이러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하여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고, 과거의 역사적 은혜를 저버리고 있다. 중국은 과거에 한반도를 침략하고자 시도했다가 번번이 패망했던 뼈아픈 역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가 살수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대패하여 패망의 길을 걸었고, 당나라 태종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안시성에서 고구려 양만춘에게 대패하여 막대한 국력 손실을 입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가 조선에 대한 극심한 수탈과 착취를 하였고, 7년 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었으며, 여진족에게 왕조를 빼앗기는 운명을 맞았다.
청나라는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일본보다 먼저 조선을 장악할 욕심에 조선 파병을 결정하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청나라 왕조가 붕괴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 때 왜놈들은 간도(間道) 일대를 중국에 넘겨주는 댓가로 만주철도를 장악하여 거기 살던 우리 동포가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는 비극을 낳았다.
또한, 중공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개입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의 피해를 입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용문화의 뿌리가 청구(靑邱) 배달국의 동이족이었으며,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하(夏, 주전 2,205~1,766), 은(殷, 주전 1,600~1,046), 주(周, 주전 1,046~771)의 문화의 뿌리가 사실 알고 보면 동방 배달민족의 배달국(주전 3,898 ~ 2,333)과 고조선(古朝鮮, 주전 2,333~238)에서 기원했음을 알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중국인들은 배달민족 국가인 우리 한국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데, 요즘, 그들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파렴치한 역사적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한국의 봉황과 중국의 용의 싸움이 바로 동북아 역사 전쟁의 실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 왜곡 사업을 통하여 자신들의 스승을 배반하는 배사율(背師律)을 범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이 과거에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들의 스승이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지금 그들은 역사적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계속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적 만행을 지속화 한다면, 배사율(背師律)의 냉엄한 역사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