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뭔가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질 때,
아이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그게 또 마음이 좀 위안이 될 때가 있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해환양의 유치원 생활과
아빠가 없을 때 해윤양은 집에서 뭐 하는지
관심있는 척 하며 애들에게 물어볼 때가 있어.
이상하지... 그게 왜 위안이 될까?
"쌀 떨어졌지?
주말에 새로 쪄서 택배로 보낸다는 게 깜빡했다"
"애들 감기는 좀 어때?
글카고 넘 꽁꽁 싸매지만 말고”
"용돈 안 떨어졌간디?
마늘캐서 장에 내다 팔믄 곧 부칠께"
몇 달 전,
환갑도 안된 남편을 간암으로 먼저 보내고
청상이라 하기엔 얼굴에 주름이 너무 많지만
앞으로 홀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을 것 같은
여사장님...
근데 이걸 어찌해야 할까요?
이 소 말이죠..수술 안하면 죽을텐데,
이 수술 솔직히 성공 확률이 너무 낮아요.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그리고 나의 경험상...
나는 말이죠.. 이 수술 권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한 번 더 상의해보세요.
'근데요... 누구랑 상의해 봐야할까요?'
'이제 사장님은 혼자시잖아요'
늦은 오후 피곤함이 몰려오는 데
성공확률도 낮은 수술을 앞에 두고
아 씨부랄 것! 왜 이런 게 걸리고 지랄이야.
오늘 연극도 보러가야 하는데...
혼자 투덜투덜 대고 있는 찰나.
여사장님,
수의사의 차가운 말을 가만가만 듣다가
축사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서
첫째 딸, 둘째 딸, 막내 아들에게 전화를 했어.
이런저런 걱정과 잔소리와 넋두리와 위안과
엄마 괜찮어 라는 말로 왕왕히 전화를 끊었어.
"이제인 수의사! 수술해줘"
"아직 숨 붙어있는 걸 어찌 포기해"
"수술하고나서 잘 못 된다케도 내 뭐라 안할께,
수술해줘. 대신 거시기 뭐냐! 잘 좀 해줘"
객지에 나가 있는, 자길 닮은 자식새끼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하고는 우리 여사장님,
조금 전의 근심어린 얼굴은 어데가고
씩씩하게 웃으며 아픈 소의 수술을 부탁하셨어.
내가 아직도 프로가 아닌가봐.
정말 프로라면 이 수술은 안하는 게 맞거든.
땀은 비오듯 하고 목은 마르지만,
이 수술 마치고 나면
내가 또 완전히 방전될 것을 알지만,
그래서 몇 달을 기다린 연극을 보러 못 갈 수도 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한끗의 실수도 나오지 않도록 집중해서 집도를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두시간동안 쏟아부었어.
이래서 나는 아직도 프로가 아니가봐.
프로라면 수술하는 동안엔 수술만 생각하고
그저 나중에 받을 수술비에 만족해야 하는데,
수술 하는 동안 나의 해들을 생각했고
돈보다도 나의 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에
더 기분이 좋았거든.
오늘 내가 참 열심히 진료를 했어.
몸은 정말 피곤하지만 기분이 참 좋았거든.
그리고 조금은 슬프기도 했어.
그런 날이면 보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도
괜히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해.
파도가 겹겹히 쌓이는 머언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새끼섬 하나 만들고 싶었어.
아무도 모르는 내 부끄러움 하나 숨겨놓을.
오늘 극단 새벽에 그 부끄러움 하나
심어놓고 왔어.
가을쯤 또 새로운 공연이 올라가는 날,
오늘의 부끄러움이 예쁜 꽃으로 피어나 주길 바라.
첫댓글 올해 들어 첫 감상평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일상이 담긴 일기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했답니다. 아무쪼록 이번 공연이 즐거움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다음 공연에 또 뵙길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