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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3.11.16 00:22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사진)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 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평전』(들녁, 2019), 『군주론』,『삼국지』, 『플루타크 영웅전』(2023), 등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
이우근
영화 '천국의 아이들'
아홉 살 소년 알리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인 자라의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길에서 신발을 잃어버린다. 알리와 자라는 알리의 신발 한 켤레를 둘이서 번갈아 신으며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자라는 자기 신발을 신은 소녀를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신발을 찾으러 소녀를 따라갔다가,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몹시 가난하게 사는 소녀의 집안 형편을 알고는 차마 신발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선다.
알리는 어린이마라톤대회에서 3등에게 운동화를 상품으로 준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오빠가 꼭 3등을 해서 새 운동화 타다 줄께.” 알리의 말에 동생은 뛸 듯이 좋아한다. “오빠 꼭 3등 해야 돼. 다른 거 하면 안 돼.”
알리는 1등이 아니라 3등을 목표로 달린다. 그런데 앞선 선수들이 점점 뒤쳐지면서 뜻밖에 알리가 1등으로 골인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데 알리의 표정은 어둡기만하다. 1등 상품인 운동복을 받아든 알리는 3등 선수의 손에 들린 운동화를 힐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잔잔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던지는 이 영화는 이란에서 제작됐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산유국(産油國)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빈민계층의 현실은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불평등과 부조리의 현장이다.
그 지옥 같은 가난 속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평화의 숨결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만들어간다. 문득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자라의 신발을 가져간 소녀가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집 아이라는 것을 알고 말없이 돌아서는 어린 오누이의 모습은 그대로 천사의 모습이다. 가진 것 없어도 베풀 줄 아는 고운 마음씨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다.
3등을 향한 알리의 전력 질주는 1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의 표피적이고 경박한 삶을 엄숙히 꾸짖는다.
3포·5포 세대의 절망감이 ‘헬 조선’이라는 은어(隱語)까지 만들어낼 만큼 젊은이들의 분노가 치솟는 시절, 그 절망과 분노를 치유하는 것은 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아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아이들의 순결한 영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했다(마태복음 11:25). 우리 삶 속에 천국을 이뤄가는 길... 그것은 마음 가난한, 저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예수와 어린이
<변호사/숙명여대 석좌교수/(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서울중앙지법원장, 국회공직자 윤리위원장 역임/서울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국제PEN 한국본부 회원(인권위원장)/경기고~서울대 법대 졸>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수필가 데뷔!
임철순
임종건 전 사장님이 종합문예지 <삼강문학> 2023 가을호(통권 2호)를 통해 수필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선작은 ‘거미야 나오렴’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부른 사연’(이상 자유칼럼의 글), ‘추억의 서천 탐방’ 3편입니다. 축하합니다.
책은 10월에 발간됐는데,
제가 뒤늦게 우연히 알게 돼 널리 고지합니다.
삼강문학회 장석영 회장은 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이며
한국문학신문 대표, 서울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언론인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12년전 오늘 (2011. 11. 17)
글방에 실린 몇 칼럼 중 하나
거상(巨象) 천관우의 분노
김승웅
시대의 ‘언관(言官)’ 천관우 선생에 관한 글의 속편(續編)입니다.
글이나 말로 전해 듣지 않고 제가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던 상황이라서
제가 판단해도 좀 생생한 글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열흘 전 이 글방에 소개한 황경춘 선배의 ‘언관 천관우’의 글 뒤에 바로 붙일까 싶었습니다만, 당시 제 입지가 황 선배의 집필을 위한 찬조출연이었던 만큼, 저 혼자 알고 묻어두려던 내용이었는데... ‘쟁이’출신의 직업병은 숨길 수 없네요. 그냥 묻어두려니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일보 옛 중학동 사옥 근처에 (원조)해장국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흘 도리 야근을 끝내면 으레 단체로 찾아 소주잔과 뼈다귀를 쪽쪽 소리 나게 빨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사 써 넘긴 후 혼자서 늦점심을 하러 그 집에 들렀습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리 많았는지
자리마다 꼭꼭 손님이 찾고, 다른 때보다 우선 시끄러웠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왜 이리 시끄러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즉, 안쪽 방석 깔고 먹는 자리에
7~8명의 식객들이 모여 앉아 마시며 질러대는 소리때문이었습니다.
그 손님가운데 제일 목소리가 높은 분이 계셨습니다. ‘거상’ 천관우 선생이었습니다. 그 분이 한국일보의 고문으로 와 계실 때였습니다.
84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천관우/사진:야후
얼굴이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당시 제 또래 젊은 기자들한테 천관우는 거상(巨象/큰 코끼리)으로
불리었습니다. 한국일보 초창기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옛 한국일보 선배들한테는 자랑스런 ‘수장(首將)’으로 통했습니다만,
기자란 세월과 함께 잊혀지는 존재라서 저희또래의 기자들에게 천관우는
구전(口傳)의 인물로만 남을 뿐, 한갓 ‘흘러간 인물’로 머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거상’이 질러대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그가 거느리며 술잔을 나누던
(그들의 대화를 귀로 취재한 즉 신분이 대충 잡혔습니다만) 문리대 사학과출신들로
대선배의 위세에 눌린 듯 조금은 아첨 기 그득한 얼굴로 거상의 호통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거상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그때마다 거상 쪽에 시선을 던지는 저의 횟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 자연스런 귀결 아닙니까?
그러기를 15분 남짓, 드디어 문제가 터졌습니다.
소주병을 거꾸로 든 거상이 방석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험한 욕설과 고함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 “니놈이 그러고도 기자냐?”,
“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대충 이런 욕설의 연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는 저대로 기절초풍했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욕은 제가 못 참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다른 건 참아 넘기는 편이지만 남한테 모욕당하는 거 하나만은 참아지지가 않아요. 막판에는 저 역시 피가 거꾸로 돌아, "x팔, 좋다! 한 번 붙자!" 싶어
해장국을 뜨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거상을 노려봤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상의 대학 후배 하나가 득달같이 끼어들더니
제게 연신 고개를 숙여대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주세요”소리를 발하며...제발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눈으로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한국일보 4층에 있는 천관우 고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상’ 비서실 직원이 건 전화였습니다. 거기서 거상과 첫 대면했습니다.
그날 해장국집에서 두 사이를 떼어 놓던 사학과 후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거상’... 저의 소속신분을 확인 후 비서를 통해 좀 올라오라고 기별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파리로 떠나기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1주일을 저라고 거저 지낸 건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거상을 취재하는데 투자한 것이지요.
취재의 핵심은 ‘거상’의 눈이었습니다.
해장국 집에서 제게 고래고래 호통 치던 당시의 거상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저랑 한국일보 입사를 함께 한 후 얼마있다 동아일보로 튄 대학동기 이부영을 그 때 불러냈습니다.
75년 동아사태로 해직되어 '동아투위'의 핵심멤버였던 그 이부영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천관우에 관해 물었습니다. 힐난(詰難)조로 물었습니다.
“야, 니들, 왜 그 모양이냐? 천관우 선생한테 니들이 어찌 했기에
그토록 실성한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x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구!”
“ ....... ”
영문을 모르는 이부영한테 그날 해장국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한 참을 침묵하던 이부영이 괴로운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동아투위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추대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너도 잘 알지?
천관우 선생이었어! 문제는 얼마 있다 전두환이 그 분을 공직 비슷한 자리에 임명한데서 사단이 생겼던 거야. 극열성을 띈 몇몇이 천 선생 집에 밤이고 낮이고 전화 걸어 욕하고 협박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당시 천관우 선생, 집에서 꽁초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난에 찌들릴 때였고...”
그렇습니다.
이부영과 헤어진 후 그 날 해장국 집에서 호통 치시던 천관우 선생의 욕설을 곰곰이 되살려봤습니다.
“너 이 못된 놈!”, “이 비겁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너 이 못된 놈들!”, “이 비겁한 놈들!”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저대로 화가 난 나머지 (당시) ‘~놈!’과 ‘~놈들’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해장국집에서 자기를 몇 차례 빠~안이 쳐다보는 저의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불쌍한 천관우...옛 악몽에 다시 빠져, 옛날 그때로 패~액!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낮술까지 폭음 했겠다, 당시 밤이고 낮이고 때 가리지 않고 전화질 해
욕하고 협박에 협박을 퍼부어 온 후배 언론인들의 악몽을 천관우가 무슨 수로 떨쳤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면 사랑하던 사람한테 배신당할 때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들로부터 저주와 따돌림 받고 광야에서 뒹굴던 리어왕(王)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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