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 평 = 손호연의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불빛 하나'

[kimyoungkyo]

시간이 좀 지났지만 다시 보아도 탁월한 해석이어

손호연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한 행사 중 하나인 '국제문학포럼'에서

한국 팀 발표자 중 유명 문학평론가이자 한양대학 교수인 유성호 선생의 

샤프하고도 훌륭한 발표문을 참석한 분이나 못 오신 분들 위해 보내드립니다

모녀시인의 집

이승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불빛 하나




손호연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인문대학장






  손호연(孫戶姸 1923~2003)은 단가短歌의 나라 일본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균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낸 대시인이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와카和歌’라고도 불리는 ‘단가’는 ‘하이쿠俳句’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정형 양식이다. 이는 한자 문화권의 ‘한시漢詩’ 한국의 ‘시조時調’와 더불어 동아시아 정형 미학을 이루는 핵심적 구성원이다. 
영미 문화권에도 ‘소네트 Sonnet’라는 정형시가 있어서 정형 양식은 민족 언어를 가진 문화권에 최상, 최량의 언어적 결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흐름 안에서 창작되고 전파된 손호연의 단가는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공존을 은은하고도 든든하게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지남 역할을 하고 있다 할 것이다.


  화해와 용서와 친화의 미학으로 충일한 이 아름다운 단가들은, 정형 미학의 정점으로도 읽을 수 있고 서정시의 한 첨예한 실레로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손호연의 단가에는 날카로운 긴장 관계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단순한 공존보다는 서로 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모두가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융화해가는 어떤 길목을 예비하는 데 큰 의미가 숨겨져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손호연 단가의 저류底流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분열보다는 통합, 미움보다는 사랑, 배제보다는 포용, 간극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그걸 이어주는 정서적 브릿지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손호연은 해방 전과 1980년대 이렇게 두 번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해방 전 그는 단가를 배우다가 예술의 거장인 단가의 시성詩聖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信綱를 사사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열심히 단가를 쓰던 그는 1980년 다시 도일하여 만엽집萬葉集 연구의 대가인 나카니시 스스무中西 進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가 “더 깊은 단가를 지으려면 부여의 백마강을 보고 오시라. 단가는 오래 전 거기에서 온 것이니” 라고 하는 순간, 그는 단가가 이곳 한반도에서 건너간 양식이라는 선언을 접하게 된다. 그 떨림과 울림의 잔영은 크고 깊었다. 한꺼번에 미학적 소명감과 함께 사사키 선생과 했던 약속이 견고하게 결합하면서 손호연은 일본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단가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모어母語를 못 쓰게 한 억압을 넘어서, 어쩌면 제국-식민지를 가로지르던 장치적 경계도 넘어서, 손호연은 한국 유일의 단가 시인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천 년 전 사라진 우리의 시를 원형으로 하고 있고, 자신은 그걸 계승하고 확산한다는 믿음으로 해방 후에도 일생 단가를 썼다. 타계 후에는 따님 이승신李承信 시인이 어머니의 시집과 저서를 펴냄으로써, 국내,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 손호연의 단가 미학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승신 시인은 다년간 손호연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강연, 칼럼, 저서, 영상, 행사 등으로 20 년 이상 알려왔다. 그 노고가 결국 오늘 이렇게 탄생 100주년이라는 거대한 기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축하와 경의를 동시에 드린다.


  일본이 사랑한 한국 시인 손호연은 언제나 조용한 성정으로 살았다. 1999년 동경 모교 대학 백주년 기념관에서 한 특강에서 그는 “강연이 다하자 서울서 함께 졸업한 소학교 일본 동기 동창들이 다가와서는 예전에 잘못한 걸 사죄하려 먼 곳에서 왔다며 공손히 절을 했다. 차별 당했던 그들에 대한 수십 년 전의 의식이 눈 녹듯 녹아내리며 그간의 민족 대립도 활짝 문을 열게 된 듯한 순간이었다” 라고 그때의 진솔한 소회를 남겨주었다. 그의 이러한 해맑고 천진성에 가까운 품성이 단가에 담긴 화해 지향의 물결을 이루었던 것임은 췌언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이어령李御寧 교수 또한 일본 사람들이 거꾸로 한국말로 썼으면 한국인의 정서를 몰랐을 텐데, 자신들이 가장 잘 아는 언어로 한국인의 정서를 전달하니까 더 큰 감동을 받은 것이라며 손호연이 일본말로 썼지만 뛰어난 한국의 시인이고 한국 시 흐름의 큰 줄기를 이룬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한국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단가의 시인인 손호연은 탄생하여 우리 문학의 변경邊境을 아름답게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지극한 인생론적 전언과 사랑의 미학
 
  우리는 단가가 구유하고 있는 ‘정형’이라는 속성이 자유로운 시상詩想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애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적 특성을 통해서 만 성취가 가능한 어떤 불가피한 ‘존재의 집’ 임을 강조할 수 있다. 손호연의 작품이 그 첨예한 사례들일 것이다. 이러한 불가피한 정형의 울타리를 통해 우리는 스케일이 크나큰 우주적 상상력으로부터 작고 미세한 사물들의 움직임에 이르는 다양한 서정적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중하고 파장이 큰 내러티브와 함께 이른바 ‘충만한 현재형’에서 구축되는 순간적 정서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 상상력과 정서가 정형의 조건 안에 잘 갈무리 됨으로 우리는 이러한 해체 지향의 시대에도 잘 짜인 고전적 감각과 인식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이고 미분화된 정서와 통합적인 삶의 이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최대치로 실현하고 있는 작품들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국경을 언어의 벽을 뛰어넘고
끈질기게 피는
나라의 꽃 무궁화'


 
'국경과 언어의 장벽까지 뛰어넘어
나는 피우려네
무궁화 꽃을'
 
  이 작품은 손호연 단가 미학의 핵심을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확연하게 세워주고 있다. 흔히 나라를 대표적으로 표상하는 상징인 ‘국화國花’는 모두 ‘국경’과 ‘언어’의 벽에 갇혀 있기 쉽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뛰어넘어 끈질기게 피어나는 “나라의 꽃 무궁화”를 그려내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경계와 장벽을 부수면서 그것을 견고하게 설치했던 근대의 폭력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스스로도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무궁화 꽃” 피우려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고백의 형식이지만 일견 다짐에 훨씬 더 가깝게 들리는 이러한 의지는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단가를 쓰게끔 한 원초적 에너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손호연 단가 미학의 심층적이고 궁극적인 주제가 되어준 것이 바로 이러한 ‘경계 너머’에 있는 셈이다. 그렇게 무궁화 꽃은 한반도를 넘어 그가 유학했던 일본에까지 아름답게 필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대는 가진 자 아니었어라
모은 재산 돌려 드리오니
목숨 돌려 주소서'


 
'해마다 매듭짓는 꽃이라면
이 봄에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대여'
 
  또 하나 손호연 시인이 그려내는 핵심적 주제 권역은 ‘사랑’에 있다. 물론 그것은 대상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그리움의 경우일 때가 훨씬 많다. 열렬한 상호적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를 애절하게 그리는 그리움으로서의 언어는 ‘그대’를 향해 모은 재산을 돌려드리면서 그 대신 “이 봄에/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대”를 향해 목숨 돌려 달라는 애잔한 서정의 노래로 이어져 간다. 아마도 시인은 목숨이 이어지는 동안 그리움의 노래를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만나는
그 짧은 시간의 행복을 기대하며
날마다 기다려지는 밤'


 
'그대인 줄 늦게사 알고
뒤쫓아 갔으나 놓치고 말았네
꿈속에선 목소리도 안 나왔는데'
 
  다음에는 꿈이다. 행복이라는 상태는 “꿈속에서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 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니 시인의 나날은 “날마다 기다려지는 밤”으로 대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밤의 잔영이 그대인 줄 늦게야 알아채고 열렬히 뒤쫓아 갔지만 꿈속의 그는 온 데 간 데 없다.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꿈의 형식이 바로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사랑의 원리가 되어준 셈이다.


  이처럼 손호연의 단가에는 자연스럽게 견고한 언어적 절제와 긴장이 수반되고 있다. 이때 절제와 긴장이란, 요설이나 해체보다는 훨씬 더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에 핵심적으로 다가가는 방법적 기제들이다. 이러한 절제와 긴장이 구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단가일 터인데, 그래서 손호연 미학의 요체는 이러한 미학적 정화精華에서 대체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손호연의 단가는 정형이라는 현저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원초적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서정 양식의 본래적 지향을 가장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시적 형식의 단호한 절제에서 오는 효과를 풍부하게 생성하고 있다. 그의 단가는 이러한 형식적 특성 위에 국경을 넘고, 누군가를 소환하고 꿈속에서 그를 부르는 미학적 효과를 풍요롭게 지니고 있는 세계라 할 것이다.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는 인생
다투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로 다투었네' 


 
'나란히 같이 가던 길
갑자기 좁아져
그대 손 놓고 한 줄로 갔었지'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방법적 존재론은 기억 혹은 회상에 있다. 그것은 그야말로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는 인생”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바로 그 순간, “다투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는 사실에 상도想到한다. 그때 바로 나란히 가던 길도 갑자기 좁아져 “그대 손 놓고 한 줄로” 가지 않았던가. 시인은 그러한 다툼의 세월에 대한 성찰을 통해 아름다운 화해 지향의 시학을 건설해간 것이다.


우리가 읽어온 손호연 단가에 대해 편운 조병화 시인은 “엄격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와카가 이승신의 번역으로 우리말로 됨에 그 음수율이 매우 리드미컬하고 그 내용이 잘 전달되어 있어 매우 좋은 번역이라 생각된다” 라고 한다. 훌륭한 번역으로 전달되는 그의 단가가 보란 듯 한국 문학의 필드로 들어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듯, 근본적으로 단가를 비롯한 서정 양식은 시간 경험에 대한 회상 형식으로 씌어지고 읽힌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 양식과 시간성이 불가피한 서로의 원질原質임을 확인하게 된다. 손호연 단가의 미학적 근간은 이러한 지난 시간에 대한 섬세한 회상 형식에 있다. 그만큼 우리는 원형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시간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조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이러한 깊고도 지속적인 시인의 치유와 긍정의 미학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 형식에 대한 탐구 작업으로 끝없이 이어져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짧고도 강렬한 노래에 담긴 서정적 위의威儀를 담은 손호연 단가에 그러한 기율과 지향이 잔잔하게 출렁이고 있는데, 은은하고 융융하게 빛을 발하는 언어적 섬광이 우리를 감동으로 데려가 준다. 
결국 손호연 단가는 삶의 궁극적 이치를 직관하고 해석하는 힘과 연관되어 펼쳐진 예술적 실체이다. 우리는 그의 지극한 인생론적 전언과 사랑의 미학을 그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3. 국경을 넘어서 꿈을 꾸는 평화의 마음




우리가 알고 있듯 삶의 보편적 속성이나 원리나 징후는 한동안 개별적 사물과 현상을 일정하게 규율하다가 천천히 변형되거나 소멸되는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변형과 소멸 과정이 어떤 다른 차원으로의 존재론적 생성을 예비하는 역설의 흐름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모든 변화 내지 사라짐의 과정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만남과 헤어짐, 빛과 어둠, 진취와 퇴영, 충일과 결핍 같은 의미론적 대립항들은 하나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순의 속성이나 원리나 징후일 뿐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 스스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단독자가 아니라 숱한 생멸의 과정을 통해 서로의 몸에 각인되는 호혜적 존재자 임을 차분하게 깨닫게 된다. 국가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손호연의 미학은 그러한 경계로 숱하게 나누어진 곳들을 잇고 묶고 통합해간다. 다음 시편들은 어떠한가.




 이웃해 있어 마음에도 가까운 나라 되라고 
 무궁화를 보다듬고 벚꽃을 보다듭네




양국이 다투지 말고 가까웠으면 하는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드러냈다. 불화不和를 멈추고 사랑하라는 전언이 그 안에 담겼다. 이웃해 있으니 마음도 서로 가까운 나라끼리 ‘무궁화’와 ‘벚꽃’을 호혜적으로 사랑하자고 시인은 권면하고 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게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눈 코 입 다를 게 하나 없네 친구와 나, 다른 건 오직 국적 하나 뿐'




시인은 “절실한 소원” 하나를 이렇게 말한다.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어라” 는 것으로. 놀라운 조국 사랑과 그 사랑이 한반도에 갇히지 않기를 희구하는 마음이 잘 전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눈 코 입 다를 게 하나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친구와 나 사이에 다른 건 오직 국적 하나일 뿐이고, 우리가 나누는 언어와 정감은 그걸 넘어 다툼 없는 상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사명을 새로이 하네 시에 국경 없는 세상인 것 알게 되어'






'백제인 후예로 단가를 읊어 마침내 궁중 단가 낭송의 반열에 서다'




그렇게 국경 없는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살아가는 사명”을 새로이 하는 일이 되고, 시인은 그런 마음의 심연에서부터 노래를 불러 “백제인 후예로 단가를 읊어 궁중 단가 낭송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무겁지만 소중한 “짊어진 짐 무겁지만 이 목숨 살아 있어 그 무게를 느끼네” 라고 시인은 노래할 수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의 가집歌集 제목이 ‘무궁화’인데 권두에 ｢비원悲願｣이라고 제목을 붙인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동아시아 끝자락에 살아온 나, 오로지 평화 만을 기원했네'






'위로하고 싶은 진심이 내 시에 녹아있어 그대 마음 녹일 수만 있다면'
                                                          (이승신 단가^)




평화를 늘 잃고 살았던 “동아시아 끝자락”에서 “오로지 평화 만을 기원”하고 살아온 ‘손호연’의 마음이 아름답게 번져온다. 그러한 험난한 역사를 “위로하고 싶은 진심”으로 그는 일관되게 ‘시=단가’를 써갔다. “그대 마음 녹일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이고 심미적인 단형 서정을 일관되게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손호연 단가는 서정시의 정예적 속성을 지켜온 사례에 속한다. 그 안에는 단아하고도 조요로운 정형 미학의 극점이 오롯이 담겨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단가의 완결성은 압축과 여백을 중시해왔던 전통을 적극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짧은 형식을 통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의 명료성을 부정하려는 노력을 통해, 단가 미학은 압축과 여백에 대한 지향을 견고하게 지켜왔던 것이다. 물론 이는, 언어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언어가 과잉되는 걸 경계하려는 방법적 전략을 함의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언어 과잉을 경계하는 미학적 선택 행위가 손호연 단가 미학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명료한 분별과 이성적 경계를 지우고 그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기는 과정을 통해 고전적 사유와 서정적 표현을 만들어낸 것이기도 할 터이다. 국경을 넘어 꿈을 꾸는 평화의 마음이 그렇게 확장되어간다.






4. 손호연 단가의 미학적 의미




앞에서도 암시하였듯, 손호연 시인은 동경제국여자대학 유학 중에(가정학 전공) 시인인 기숙사 사감을 통해 단가를 만났다. 귀국 후에도 5 남매를 키우며 일본어로 단가를 썼다. 일본의 전설 사사키 노부츠나가 약속시킨 “나에게 배우려면 중도에 절대 포기하지 마라. 일본 단가를 흉내 내지 말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쓰라”는 가르침은 그에게 항구적 나침반이 되었다. 시인은 “흔히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제가 택한 단가의 길에는 국경 아닌 국경이 앞을 가로막아 어두운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한국인으로서 단가를 지어온 고뇌를 고백한 바 있다. 


동경 굴지의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호연가집' 에 이어 '무궁화' 라는 시리즈로 6권 출간되었고 1997년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록가쇼무라에 노래비詩碑가 높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그 뿌리가 백제와 신라의 향가로 우리 나라에서 전해준 것으로 보고 일생 서울 서촌의 3백 년 된 한옥에서 우리 정서를 시에 담아내었다. 1998년 궁에서 일왕이 주재하고 NHK에 종일 생중계 되는 단가 낭송회인 신년어전가회新年御前歌會에 외국인으론 처음 대가의 자격으로 초청받아 한복을 입고 참석하기도 했다. 보편적 인류애가 국경과 언어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단가와 나의 운명적인 만남은 쉽게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노래 씨앗을 나의 생명이 있는 한 소중히 가꿔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새삼 불타게 됩니다. 고난이 연이어진 내 모국 동족의 마음의 등불이 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활짝 피어나는 무궁화처럼'  (손호연 시인의 글에서)




이러한 단가와의 운명은 결국 한일 간 모두에 유명한 시인이 되게 하였다. 마침내 한국에도 시비가 서서 이제 손호연의 모뉴멘트는 그 자체로 한일 간의 장벽을 넘어서게 되었다. 1997년 일본 아오모리 2023년 서울이 그 목록이다. 아오모리에 설 때는 무학여고 유일 한국인 교사였던 시인의 한 일 제자들도 모였는데 2023년 탄생 100주년 기념인 국제문학포럼과 동시에 열린 서울의 시비 제막식은 더욱 의미가 깊다. 기념비 주소는 ‘서울 필운대로 17 시인의 집 앞’이다. “활짝 피어나는 무궁화처럼” 오늘 세워진 그 시비는 영원할 것이다.




손호연 단가 미학의 의미는 삶의 궁극적 이치를 직관하고 해석하는 힘과 연관된다. 물론 손호연의 단가는 소소한 인생 세목까지 담아내기에는 절제된 언어 양식이지만, 삶의 원리나 이치를 직관으로 포착하여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경을 암시하는 데 오히려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직관적 깨달음은 일종의 돈오頓悟에 가깝게 되어 그러한 깨달음까지의 구체적 과정이나 계기는 생략되고 은폐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략과 은폐를 통한 직관의 단호함이야말로 단가 미학이 가질 법한 촌철살인의 장치임을 손호연의 사례에서 환하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부르는 ‘호연연가戶姸戀歌의 빛나는 주인공이자, 국경과 시공까지 초월해버린 한 아름다운 시인을 우리가 이렇게 기억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지금 국경과 시공을 넘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빛 하나> 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