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런 마음을 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호연 100주년 탄신 기념 국제문학포럼을 열며 축사할 분으로 대한민국
예술원 이근배 회장과 김남조 선생을 생각했습니다. 연로하나 정정하시고
기억력 여전히 최고인 선생이 오라 하시어 최근 다섯 번 댁에서 뵈며
'나는 여왕 대접을 받아왔는데 외로이 시를 써온 손 선생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 그런 훌륭한 시인이 계셨다는 걸 글로 써서 후배 문인들에게
알리려 한다' 고 매번 하셨는데 갑자기 입원하시더니 그렇게 가셨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눈물을 닦고는 떠오른 분이 이인호 선생입니다.
불과 며칠 전인데 '하지' 즉답이어 놀랐고 내용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제 일 외에도 손호연 프로젝트 해온지 귀국 후 30여 년, 자주 듣는 소리가
효녀라는 말입니다. 감사한 말이지만 효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계속
그렇게 말합니다.
그 차원이기보다는 정부에 아무리 말해도 모르고 각 대학 전문가들에게 일본의
반응이 상상 이상이니 연구하시라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아 할 수 없이 저라도
하는 것이라고 여기저기 글도 썼습니다.
고대 일어는 물론 사회환경으로도 어려운 작업이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
이요 사랑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시비 제막식 날에는 몇몇 신문에 나가며 이런 최고 효녀는 없다 라는
문자가 더 많이 왔습니다.
이인호 선생을 안 지 25년은 됨직 한데 그 테마로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근데 마치 제가 그런 생각을 표한 듯, 워낙이 어떤 테마든 멋진 스피치를
하는 분이지만 제 마음을 읽은 듯이 전개하시어 놀랐습니다.
구구절절 애국의 시를 쓴 어머니를 생각할 때 첫 번째 손호연 상은 한국인
에게 가야 하는 게 아닌가 머뭇거리기도 했는데 나카니시 선생에게 가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씀에도 놀랐습니다.
학술 발표 토론 질의와 박정자 배우의 멋진 손호연 시 낭송 직전에 하신
대한민국 대표 엘리트 이인호 선생의 만나보지 못한 손호연 시인에 대한
스피치를 전합니다. 또랑또랑한 그 음성으로 들어야 제 맛이 납니다 만.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글이요 각국 최고 학자들을 모신 문학포럼에
그렇게도 딱 맞는 인사말일 수가 없습니다.
이승신
손호연 탄신 100주년 기념
국제문학포럼 - 손호연의 평화와 화해
이승신 이사장님, 멀리서 오신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님, 내빈 여러분 반갑습니다.
허나 민망스럽기도 합니다. 손호연 단가 시인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 시 세계에 입문도 못한 제가 축사를 한다는 게 주제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평화와 화해 같은 주제나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짐작하여 따님 이승신 시인이 제게 이런 걸맞지도 않은 요청을 한 듯 하고 제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응락한 것은 단가 명인 어머니에 대한 이승신의 자부심에는 효성을 넘어 어떤 공익적 관점에서의 절실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여성으로 일본의 전통시 인 단가의 명인으로 인정받아 천왕의 초빙을 받고 그 나라에 시비까지 높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나라에선 손호연 시인에 대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자랑스러워하며 기리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1945년 이후 오랜 동안 소원했고 싫었건 좋았건 역사의 명령에 따라 35년 간 서로 얽혀 살았음에도 문화적 정서적 상호교감 능력이 거의 생겨나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따님 이승신이 어머니 손호연 시인의 대변자로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일본에서 명인이 된 손 시인의 그 독특한 아름다운 시들은 한국에서는 완전히 묻혀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일 뿐 아니라 우리가 크게 자축해야 할 일은 명인 어머니의 정신적 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TV 방송인으로 생애를 시작한 따님은 자기 스스로 문인의 자질 시인의 자질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는 모국어가 아닌 일본말 밖에는 쓸 수 없던 서글픈 상황에 하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본 고급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단가의 명인이 되었듯 따님은 일본 문화를 배척하는 분위기와 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본을 깊이 공부하게 되고 자신의 문학적 자질을 십분 발휘하게 되는 행운의 역설이 빚어진 것입니다.
어머니는 양국 간의 평화를 노래하는 단가의 명인으로 일본의 인정을 받음으로서, 따님은 쓰나미로 수만의 목숨을 앗아가 고통 당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아름다운 위로의 시를 선물하고, 일본 전통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교토를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한국 사회에 소개함으로서 역사의 구렁텅이 속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두 나라 간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승화시키는데 남다른 기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멋 옛날로 돌아가면 단가 자체가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백제 유민들이 탄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해방 후 모국어를 다시 찾으며 고민에 빠지게 된 손호연 시인이 단가 쓰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 주신 나카니시 스스무 선생께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오시어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큰 영광이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를 평화와 화해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일에 손호연-이승신 모녀의 공헌이 얼마나 큰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나카니시 선생께서 이번에 새로 제정되는 손호연 평화문학상을 받으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축복받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이 학술회의는 손호연 시인의 탄신 100주년 서거 20주기를 기리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 간의 문화적 교류와 협동관계가 평화와 화해의 노트로 쓰여진 서곡으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희망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학술 대회 관계자 모든 분들, 특히 불철주야 애쓰신 이승신 시인과 나카니시 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울대 명예교수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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