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堂하야 三下柱杖云)
有一物於此하야 生時的的不隨하고 死去當當在目前하여
在迷而不滅하고 在悟而不增하며 行住坐臥 語默動靜之中하야
能善是非分別하며 歷歷孤明不昧하니 時會大衆은
還可會得這個一物 아(법성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세 번 울리고 말하되)
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 난 때도 분명히 나지 않고
죽음도 당당히 눈 앞에 있는데 미혹 할 때도 멸망하지 않고
깨달아도 더 하지도 않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중에
시비분별하며 분명히 홀로 밝어 능히 어둡지 아니 하니
여기 모인 대중들은 이 한물을 알았는가?
若也寶得이면 郞與三世佛祖로 把手共行이어니와
其惑未然이면 日月不到에 別有乾坤하니
無碍四時節하고 照破晦月明하야사 始得다.
만일 알게 되면 삼세의 불조와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가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면 해와 달이 이르지 않는 곳에
따로이 한 세계가 있어서 사시절에 아무 걸림이 없으나
그믐 밤에 밝은 달이 비쳐야만 알게 되리라.
一月이 普現一切水하고 一切水月을, 一月攝이로다.
水中明月은 見得不難이어니와 月落渴水時에 가하오
速道一句來하라.
한 달이 모든 불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물 속의 밝은 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거니와
달도 지고 물도 없어질 때에는 어떠 한가?
속히 일러 보시오.
(頌曰)
日月不來別乾坤은 古今佛祖未尙臻이로다.
莫道此時玄妙旨하라. 茶煎分事本來人이로다.
해와 달이 뜨지 않는
별유천지 그 곳에는 고금에 불조도
찾아오지 못한다네.
이 때의 현묘한 뜻 말하지 말게.
차 한 잔 마시는 일이 본래 소식이라네.
(頓悟와 宗旨와 體用)
問此頓惜門은 以何爲宗이며 以何爲旨며
以何爲體며 以何爲用고 答無念으로 爲宗이요
妄心不起로 爲旨며 以淸淨爲體요 以智爲用이니라.
이 돈오문은 무엇으로써 종취를 삼고
무엇으로써 참뜻을 삼고 무엇으로써 본체를 삼으며
무엇으로써 활용을 삼는 것입니까?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뜻으로 삼으며 청정을 본체로삼고
지혜로서 활용을 삼느니라.
*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떨어졌다는 그 생각까지도 떨어진 것이 무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멸심의 분별 망념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멸이 아닌 제팔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또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제팔아뢰야식이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니 무념과 그 내용이 똑같습니다.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무념이 되면 자연히 청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므로 청정을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 되니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지혜를 활용으로 한다는 것은 자성이 청정해서 일체가 모두 서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단멸뿐인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일체 만법의 항사묘용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정은 정으로 쌍차를 말하고 지혜는 혜로서 쌍조를 말함이니 본체와 활용이 원융무애하여 차조동시하니 이것을 중도라 하고 돈오라 하고 무념이라 하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종 정통에서 주장하는 돈오라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제팔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무념무심을 말하는 것이지
객진번뇌가 여전무수한 해오를 돈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주스님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종 정맥의 조사들이
구경무심을 깨친 구경각을 돈오라고 하였지
중간의 해오를 가지고 돈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종의 정통 사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大衆들이여 此株花는 諸佛도
不敢以正眼으로 著이니
天下諸老가 還會夢見也未아.
대중들이여 이 한 그루 꽃은 모든 부처님도
정안으로 보지 못하니 천하 노스님들이
어찌 꿈엔들 보았으리오.
若也頂門에 具一隻眼하면
千聖이 立在下風이어니와 一等是弄인댄
直至彌勒이 下生하야도 也摸索不著이라 還會 아?
만일 정수리에 한 개 눈을 갖추면 일천 성인이
다른사람의 아래에 서 있거니와 일반으로 헤아린다면
미륵보살이 하생할 때까지라도 또한 더듬어 찾을 수 없다.
알겠습니까?l
(頌曰)
雲在嶺頭閔不徹이요 水流澗下太忙生이로다
구름은 재 위에서 한가로이 떠돌고
물이 산골 아래로 흐르니 몹시도 빠르구나.
喝一喝(遂下座)하다.
佛紀 二五四十年 陰 六月十五日
方丈 慧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