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코 만지기보다 더 쉬운 일 1989 년 1 월(83 호) 신년사
일찍이 본사(本師)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을〔三界〕 불타는 집에〔火宅〕 비유하시고 어찌 불붙은 집에서 오래 머물러 있으려 하느냐고 경책하셨습니다.
요즘 저자거리에 나서보면 연말연시다 세모다 새해다 하고 제법 무슨 별난 의미를 붙여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불타는 집인 이 사바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도무지 묵은 해니 새해니 하는 말들이 사치스럽게만 들리고 우리 승가에는 그런 말들이 걸맞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옛스님들은 하루 해가 지면 덧없이 시간 가는 것을 원통히 여겨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또 부질없이 한해가 갔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사(世事)가 한바탕 꿈이요 실(賣)답지가 않아서 믿을 만한 것이 없음은 부처님 경전에서도 간절히 말씀하셨거니와 세월가는 것이 마치 물고기 사는 못의 물이 점점 줄어듬과 같아서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율문(律文)에서도 지적했는데 연말연시다 무엇이다 하여 흥청망청하는 것은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부터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끼는 데에서 도(道) 닦을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무상을 느끼는 마음이 곧 도심(道心)이라 했거니와 만약 아무 소득없이 한해를 보냈다면 참으로 시방삼세 부처님과 일체 단월과 사바의 여러 중생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제 그믐과 별다름 없지만 새날이 밝았습니다. 가야산색은 옛과 다름없고 어제 듣던 쇠북종 소리도 변함없이 울리고 큰 법당 부처님의 은근한 미소도 변함없지만 오늘 아침에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짐은 차라리 중생의 분별심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해마다 새해 새아침에 마음 가다듬으며 부처님께 발원을 올리고 촛불을 켜고 향불을 올릴 때 그 정성스러운 마음 그대로 한해를 살고, 다짐 그대로 실천하여서 이 사바가 곧 불국토가 되었으면 하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조사스님들은 도를 깨치기가 세수하고 코 만지기보다도 쉽다 했으며 자신의 성품만 돌이키면 곧 부처라고 하였으니 아무쪼록 올해에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는 도를 부지런히 닦아서 크게 한번 깨쳐 봅시다.
우리 스님네가 참답게 은혜 갚는 일은 도 닦는 일 밖에는 다른 일이 없음을 명심해서 올해에는 이 가야산에서 여러 부처님이 출현하도록 노력하고 해인가족 여러분은 가정과 사회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기사년(己巳年)에는 바로 이 땅이 안락정토가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