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주지 법전 하루가 저물면 새날이 밝아오고 묵은 해가 지나면 또 새해가 온다. 이렇게 하여 세월은 자꾸만 흘러서 나이를 먹고 나중에는 늙어 죽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말하자면 흐르는 세월 속의 삶인데, 저 지는 해를 나무 가지에 묶어두고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장사는 과연 없는 것일까?
산중에서 지내다 보면 날짜 가는 것도 잊기가 쉽고 책력 넘기는 일마저 아예 생각지 못하고 살다가, 세모(歲幕)가 되어 떡, 음식, 과일 등을 준비하여 부처님께 올리고 설을 맞을 차비를 하는 걸 보고 “아, 한 해가 또 지났구나. 나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나 …?” 하고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람마다 가는 해를 아쉬워하고 다음 새해에는 무슨 홍복(弘福)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부푼 희망을 안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해에는 금년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더 행복해야 마땅한 것이며, 지평선처럼 궤도를 달리는 듯한 나날의 생활 속에서 새해를 맞으면서 보다 더 나은 삶과 지혜로의 도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해는 묵은 해대로 지나가 버리도록 놓아두고, 다가오는 새해는 보다 더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부처님께 용맹스런 신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세상살이는 하루 한시도 영일(寧日)이 없다. 계속되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공중에서는 비행기를 폭파시켜 죄없는 목숨들을 앗아가고, 서로 찌르고 죽이고 속이고…그야말로 아비규환인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삼계는 불난 집과 같다(三界猶如火宅)”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 불난 집으로부터 벗어나서 대환란을 모면할 안식처란 어느 곳인가? 알고 보면 밖으로 훨훨 타는 저 불길은 바로 내 마음 속의 탐•진•치 삼독(三毒)의 업화가 불타는 것이요, 걷잡지 못하도록 소용돌이 치는 대환란은 바로 나의 마음 속의 어지러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우리 마음 속의 불을 끄기만 하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안식처요 대휴헐처(大休歇處)인 것이니, 본래로 청정하여 안온한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 말고는 다시 밖으로 구할 피난처가 없는 것이다.
맹렬하게 타는 불길을 잡아 끄는 방법은 오로지 부처님의 바른 법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깨치는 길이다. 우리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순간 삼계에 타는 불은 큰 소나기에 꺼지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므로, 이 마음이 바로 내가 귀의할 부처님이요, 대의지처인 것이다. 이는 곧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고구정령히 중생을 위해 말씀하신 바이다. 자성을 확철히 깨치게 되면 대지혜의 광명이 발현하여 그 지혜의 빛은 온 우주 법계를 비추고도 남는 것이니, 만고에 꺼지지 않은 이 빛 속에 사는 우리는 길이 안락하지 않겠는가.
그리 되면 우리는 저 지는 해를 아쉬워하여 나뭇가지에 동여 메어 둘 필요도 없는 것이며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는다고 안타까와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은 것이어서, 무한한 겁을 통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한 이 법은 나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요 누구나 모두 자신의 자성을 깨치면 다 같은 부처요 대자재인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당나라 중엽 천태산 국청사에 깃들던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인 한산자(寒山子)는 그가 남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인생은 티끌에 파묻혀 있나니
마치 그릇 속에 우굴거리는 벌레와도 같다.
종일토록 돌고 또 맴도나
그 그릇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도다.
신선(부처)일랑 아예 될 수도 없어
번뇌 헤아리기 한량 없어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깐 사이에 늙은이 되고 마네.
오래 살기를 바라고 한평생 버둥대고 애써 살아 보았자, 인생 백년을 보장하기 힘들다. 재리(財理)에 밝은 이는 평소 푼푼이, 적은 돈을 저축해 두었다가, 궁색하고 곤란할 때 그것을 요긴하게 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있는 이는 평소에 부처님의 법을 닦아서 다음의 삶을 위해서 지혜를 예비해 두는 것이다;
무량겁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우리의 자성을 깨치지 않고서는 멈춰지지 않는다
새해에 우리 해인가족 여러분은 부처님의 정법을 닦아서 자신의 마음을 활연히 깨달아 대지혜 광명이 온 누리를 비추어, 나와 이웃과 그리고 겨레와 온 세상에 함께 기리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나무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