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결에 큰고니가 다가왔다. 코 앞에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부리의 뿌리에 뚫린 콧구멍과 윗눈썹까지 물든 노란색을 확실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큰고니의 목소리는 이중으로 들렸다. 가령 넌 순수해!라고 할땐 마치 짧은 메아리처럼 넌넌 순수해순수해순수순순순... 그리고 잠을 깼다.
새벽의 푸른 강가는 그믐달과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 세상에.
이른 아침에 움직이는 큰고니들이 새벽 안개 어스름한 갈대 숲 아래서 부지런히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고니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수천킬로를 날아왔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서 하얗게 백조답게 자란다.
새끼들은 흑갈색 혹은 회색의 몸통에서 목부위를 갈수록 진하다. 노는 모습도 성체와 달리 잽싸고 빠르다. 반면에 성체들은 언제나 유유하다.
애같애애같애같애같애애애..... 큰고니가 새벽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누구보고 한 말이었을까.
이곳 강변생태공원은 집 앞 고가도로를 타고 서낙동대교를 지나서 내리면 15km 거리. 새벽시간에는 주차까지 15분 걸린다. 그러니 마띠 키울 때 주말이면 그렇게 자주 다녔던 집 앞 놀이터였다.
십여년 지나니 묘목이던 메타세콰이어가 가로등 높이로 자랐다. 자랄수록 명물이 될 것이다.
반평생 까만 옷을 입던 마눌이 흰바지랑 하얀 자켓을 입고 더욱 가벼워졌다. 실로 획기적인 변화를 기념 촬영! 여명의 붉은 기운이 하얀색에 분홍빛으로 물을 들인다.
고니는 왜 전래동화나 설화에 나타나지 않을까?
이곳은 생태공원 내, 낙동강 본류와 연결이 없는 늪지, 말하자면 소류지沼溜池다. 내 위치에서 약 150m 거리.
철새들이 돌아오자 공원에서는 강쪽으로 가는 산책로와 데크 입구를 모조리 막아버렸다. 조류 인플루엔자와의 접촉을 막는다는 경고문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지나치고 일방적인 통제와 다투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다.
인간과 철새를 분리시켜야한다는 의지에는 공감하지만, A.I(조류 인플루엔자)를 막기 위해서라면 헛짓인 거는 피차 아는 사실.
오랜 세월, 고니가 우리 설화와 옛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저들의 지나친 회피성과 은둔성 때문이다. 그들은 깊고 은밀한 어떤 자연이다. 그런 큰고니가 나의 애착이 되었다.
야생늑대 6-7년, 큰고니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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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생육생존의 조건이 확연한 수명의 차이를 보여준다. 혹독한 겨울과 위험천만한 사냥의 전제는 늑대의 평균수명을 5년으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천적이 거의 없는 툰드라와 시베리아의 봄 여름 초가울을 지내고 수천킬로 거리의 각인된 이동을 버텨내면 풍족한 서식지에서 늦가을과 겨울을 나는 고니는 의외로 수명이 길다.
긴 수명은 개체의 경험이 교육되는 과정도 길어져서 큰고니는 몸체나 모가지가 회색빛 돌고 부리도 까만 어린 시기를 적어도 3년 이상 걸린다.
수명에 비해 독립개체로 키우는 기간이 인간의 경우, 자꾸만 길어진다. 애 키우다가 영감할매 다 되가는 현실도 출산률 저하와 관련있다. 그러긴 싫으니까.
집에 빨리 가야해.
출근하는 것을 학교에 가야한다고 실언하는 것은 최근까지도 종종 있던 일이다. 학교라는 당위성과 억압성은 평생 무의식의 큰 부분의 빛깔이 되어버린 탓일게다.
그건 뭐 워낙 착하고 성실했던 탓이라고 좋게 봐 줄 수 있지. 그런데 오늘 새벽에 나도 놀래자빠질 실언이 튀어나왔다.
- 왜 서둘러?
- 응. 빨리 집에가서 운동하고 밥 무야지. 월요일인데.
- ...?? ㅋㅋㅋ 정신차리세요. 당신 집은 여기야. ㅋㅋㅋ
아침해가 엄광산 능선에 솟아 둥근 머리를 내밀었으므로 온통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이곳 소류지에서 강의 본류까지도 온통 늪으로 약 이삼백 미터.
퇴적지는 수변식물, 수초의 부드러운 줄기나 뿌리가 주식인 이들에겐 천혜의 서식지야. 물론 작은 물고기나 새우도 먹지만 주로 야채식을 즐기다니 좀더 우아해 보여.
퇴적된 뻘이 둑을 이뤘는데 거기도 갈대의 뿌리가 지천이고 이제막 자맥질을 끝내고 부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곱기도 하시다.
저곳까지 150m. 허튼 욕심을 내면 더 큰 망원렌즈를 꿈꾸겠지. 하지만 고니의 콧구멍과 눈빛을 살펴서 뭣에 쓸려고.
그리움없는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만 혼자 바라보는 큰고니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