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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왕 칭호가 생긴 배경에 대하여
미천왕은 동천왕 이후 주춤했던 대외팽창정책을 펼침에 따라 화북의 강자였던 전연과 호각을 다툴 정도로 다시 일어나 전연이 고구려를 제어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성장하여 훗날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물론 국강상태왕의 전략적 실수로 후연에게 굴복하지만, 소수림태왕 때 내부를 정비한 후 고국양태왕 대에 다시 공세를 취하고 광개토태왕 대에 이르러 후연 등 주변 열국들을 굴복시켜 고구려를 동방의 그저 그런 강국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대국으로 건설합니다.
미천왕 때부터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하고 광개토태왕 대에 이루어진 대국적 위상을 바탕으로 장수태왕~ 안장태왕대의 고구려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5~6세기의 동아시아 4~5강 국가들 중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물론 안장태왕 사후~양원태왕까지는 내부적 혼란이 와서 왕권이 약해졌던 시절이 있긴 하나, 이는 주변의 북조나 남조 그리고 유목세계도 공통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평원태왕은 이러한 내부적 혼란을 극복하여 다시 왕권을 강화하고 수나라의 통일에 대비하고, 평원태왕대에 이루어진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아들인 영양태왕은 동서 6천리로 영토를 넓히고 주변의 말갈과 거란을 더욱 통제하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돌궐과 외교를 하고 결국 수나라를 4번이나 물리쳐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더 없이 높게 하여 고구려가 건재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줍니다.
평원태왕 때 부터 재강화된 왕권은 영류태왕이 연개소문에게 죽기 전까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황제나 카간 등이 생긴 배경 처럼 고구려도 내부적으로는 강화된 왕권과 대외적으로는 보다 높아진 국제사회에서의 대국적 위상으로 인해 기존의 왕 대신에 군주를 칭할 새로운 칭호가 필요했습니다. 일종의 시대적 요구입니다.
그래서 생긴 칭호가 태왕입니다.
2. 언제부터 칭태왕을 했는지에 대하여
요즘 주몽(종영)이나 바람의 나라에서는 고구려가 국초 부터 칭태왕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칭태왕은 고구려의 국력이 본격적으로 강해지는 시점에서 했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서는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으로 표기하여 태왕으로 표기 하지 않았으며 모두루 묘지명에서도 추모성왕이라 하였습니다. 비사인님의 말씀대로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은 정통성 상에서 파악하거나 태왕이라는 용어의 정립이 되지 않았을 시, 명칭이 정해졌다면,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기에 그렇게 서술된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을 봤을 때 대중적으로는 고국원왕으로 알려진 국강상성태왕이 가장 이른 시기이나, 아시다시피 국강상성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만한 배경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으로는 칭태왕 한 시기는 국강상성태왕~장수태왕 때 까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 봤을 때 입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 당할 때 소실 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구려 자체 기록에는 장수태왕 이후에도 꾸준히 칭태왕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유물들이 나오면 더욱 좋겠지요.)
일부에서는 안원~양원태왕 대에는 고구려의 왕권이 미약하여 태왕호를 일시 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주변의 북조나 유목세계를 볼 때 군주의 권한이 약해졌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황제라거나 가한 칭호를 버리는 경우는 없던 걸로 봐서 고구려의 태왕칭호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고,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보다 높아졌을 평원태왕~영양태왕 때에도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영류태왕대의 고구려는 국제적 위상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왕권은 강했으므로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이며, 보장태왕도 안원~양원태왕과 마찬가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안장태왕, 안원태왕, 영류태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았으므로 태왕이란 칭호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이 3명의 군주들은 장지명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시호를 제대로 받았으므로 태왕이라 불러도 무리 없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군주들을 ~왕, ~성왕, ~명왕, ~대왕으로 칭함으로 왕 앞에 붙는 글자들은 단순히 왕을 띄우는 미칭으로 보이나, 모두루 묘지명에서 보여지듯 최소한 국강상태왕 이후 태왕 칭호가 처음 쓰였고 이후 장수태왕대의 금석문인 중원 고구려비나 서봉총에서는 태왕 칭호가 고정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수태왕대에 완전히 고유명사화 되었다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태왕 칭호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고유명사화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SHaw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광개토태왕비에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왕을 그냥 왕(王)이라고 부른 것이 13번 이며 태왕(太王)이라고 부른 것은 3번,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부른 것이 4번입니다.
또한 太王의 준말로 王이라 썼다면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자국의 지배자를 王이라 불렀을 때 이미 그 안에는 타국의 지배자보다 높은 어떤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기에, 고구려에서 太王이 王의 상위 계서로 설정되었다는 스토리라인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王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또 太王을 만든 것이 아니라 종래에 王으로 불렀던-존재했다면- 국왕 이외의 다른 세력가를 격하시키거나 王자체의 격을 높여서-太王으로- 사용함으로서 기존 계서관과 새로운 상황을 합치시켰다고 하겠습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태왕과 왕을 혼용(태왕=왕)하고 있고, 타국 군주 호칭을 격하(대표적인 예로 百殘主) 시켰습니다. 그러나 장수태왕 대에서는 중원 고구려비와 서봉총출토은합호명 그리고 용성왕 풍군에서 보여지듯 태왕 칭호가 고유명사로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왕칭호는 고구려문명권에서의 최고 지도자 명칭으로 그 증거로는 고구려 문명권 안에 있었던 신라의 칭태왕을 들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법흥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다는 것으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의 제후가 다스리는 속국이 아니라 신라 또한 고구려의 태왕과 대등한 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구려의 태왕 칭호는 유목국가의 카간칭호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 듯 그리고 모즉지 매금왕(법흥태왕)에서 보여지 듯이 신라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王을 칭했다고 왕이 한 번에 신라 군주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 아닌 것 처럼 한 번에 고유 명사화 된 것이 아니라 국강상태왕~광개토태왕 까지는 왕에서 태왕으로 고구려의 군주칭호가 바뀌는 과정으로 혼용이 불가피하였으며 장수태왕대에 이르러서야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3. 태왕의 의미 - 인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김용만 선생님 글 인용)
중원인들은 천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였고, 황제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황제란 말은 진시황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인간 영웅들인 3황 5제에서 각기 글자를 따온 것이다.
황제란 말은 흔히 우리가 나폴레옹 황제, 로마 황제란 표현을 쓰듯이 왕중왕의 의미, 즉 제후국이 아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제국이란 것이 어찌 중원을 통치한 자만이겠는가. 북방 유목제국에서는 선우, 가한 등의 최고 통치자가 있었고, 이들의 위상은 황제와 같은 왕중왕임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좌현왕, 우현왕의 보좌를 받는 흉노 선우의 위상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흉노를 비롯한 유목제국들은 그들의 최고 지도자에 대해서 신의 아들이란 생각을 가졌다. 그것은 곧 중원인들이 말하는 천자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를 비롯한 동방지역에서는 이런 생각이 없었을까. 어찌 없었겠는가.
고구려의 왕실은 천자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황천의 아들 추모왕. 이것이 광개토태왕릉비에 보이지 않는가. 일월지자 하백지외손. 이것은 모두루묘지명에 보이는 것이다.
천손사상도 천자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 천자, 천손 사상에 대해서는 고구려연구재단에서 나온 고구려 개설서를 보면, 김일권 선생의 글이 있다. 참고 요망)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는 무엇을 최고 통치자라 불렀는가. 그것은 바로 태왕이다.
사기 봉선서, 회남자 등에 보면 천일, 지일, 태일이란 말이 흔하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세상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로 보았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태일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天一, 地一, 太一
이 가운데 천일은 하늘이다. 하늘의 왕은 곧 천왕이다. 천왕은 곧 신이요, 태일을 낳게 해주는 존재다. 고구려 사람들은 천왕을 바로 해모수라고 생각하였다. 해모수가 곧 천왕랑이다.
그리고 땅은 지왕이 아닌 地神이라고 보았다. 천왕과 지신. 이것이 바로 천왕지신총 벽화무덤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제 천왕의 아들인 인간의 왕은 곧 태왕, 즉 온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의 태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원식의 황제라는 짜집기 말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에서 나온 태일의 왕, 즉 인간 세상에 최고 존귀자라는 태왕이란 말은 쓴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태왕이란 말이 보이고, 모두루묘지명 등에는 聖太王, 好太聖王이란 말이 보인다.
태왕 가운데에도 가장 성스러운 왕. 그것이 고구려 사람 모두루 눈에 비춘 광개토태경평안호태성왕이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고구려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태왕이란 의미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왜 우리는 황제를 칭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자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바보인 셈이다. 우리 카페에 가끔 글을 남기는 김태식 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도교신학을 모르기 때문에, 태일이 뭔지 모르니까 자꾸 딴 소리를 하는 것이다.
나는 도교신학이란 말은 아직 쓰지는 않지만, 고대 동아시아 종교사상의 흐름을 한번 둘러보면, 왜 고구려인들이 태왕이란 말을 사용하였는지를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고구려의 발견]에서 광개토대왕이란 말보다는 태왕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나, 서길수 교수님이 계속해서 광개토태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우리식 관점을 제대로 갖추려는 첫 걸음인 것이다.
고구려가 황제국이냐, 제후국이냐는 문제에 집착하는 자들이 거듭 고구려왕을 황제라고 자꾸 주장하고 있고, 또는 열제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자. 고구려는 중원문명을 잘 알고 있고, 그 영향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문명이 본바탕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축적된 자기 사고방식에 의해서 천자사상, 태왕 개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에 나오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부디 아무리 익숙한 말이라도, 중원인들이 짜집기 해놓은 황제란 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태왕이란 말을 더 즐겨사용하기 바란다.
4. 고구려의 제후
1) 금석문
① 유주자사진 무덤명: (전략)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侯王)에 이르기를(후략)
② 고자묘지명: (전략)19대조는 고밀이니 후한 말에 연군을 격파해 본국을 보존하는 데 공로가 있어 왕(王)에 봉해졌으나 세 번이나 거듭 사양하면서 받지 않고 고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후략)
2) 삼국사기
① 다물국왕(혹은 다물후) 송양: 동명성왕조 2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왕은 그 곳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그 곳의 주로 삼았다.
② 낙씨왕: 대무신왕조 5년 7월 (전략) 이에 만여 명과 더불어 내투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낙문이 있으므로 낙씨란 성을 내렸다.
③ 양국군 추안: 신대왕조 2년 (전략) 왕은 곧 그에게 구산뢰, 누도곡의 두 곳을 주고 이내 그를 봉하여 양국군이라 하였다.
④ 안국군 달가: 서천왕조 11년 10월 (전략)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달가로 안국군을 삼고 중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겸하여 양먁의 여러 부족을 통솔케 하였다.
⑤ 용성왕 풍군 풍홍: 장수왕조 26년 3월 (전략) "용성왕 풍군이 이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사마가 얼마나 피로하겠느냐?"(후략)
3) 일본서기
① 대흥왕(大興王)?: 추고천황 13년 4월 (전략) 고구려의 대흥왕은 일본의 천황이 불상을 만든나는 것을 듣고, 황금 300냥을 바쳤다.
- 종례에는 일본서기의 대흥왕을 영양태왕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영양태왕이 아니라 영양태왕의 동모제일 수도 있다는 추정도 조심스레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름 근거를 제시하자면 영양태왕의 이름은 大興이 아니라 大元으로 元과 興의 생김새가 비슷하지도 그렇다고 한자의 뜻도 혼용될 정도로 비슷하지도 않기 때문에 大興이 단순히 大元의 오기라 보기 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와 왜국은 외교관계가 어느 정도 친밀해진 상태였기에 상대국 군주의 이름을 아주 틀리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적다고 생각하기에 일본서기의 대흥왕은 보장태왕의 아버지인 대양태왕(고대양)과 더불어 영양태왕의 동모제로 추정됩니다.
4) 신찬성씨록(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발췌)
① 호태왕(好台王): 손연전왕과 고려조신의 선조
② 손연전왕(孫延典王): 호태왕(好台王)의 7세손으로, 고려조신의 선조
③ 원나군(元羅郡)의 저왕(杵王): 연나왕(延拏王)과 저왕의 선조
④ 연나왕(延拏王): 고구려 원나군(元羅郡)의 저왕(杵王)의 9세 손으로 고사의 선조
⑤ 안유왕(安劉王): 하내민수의 선조
⑥ 능기왕(能祁王): 도기사의 선조
⑦ 안강상왕(安岡上王): 박수의 선조
- 안원태왕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원태왕과 관계가 있다면 김용만 선생님께서 일본서기에 나온 대흥왕은 영양태왕일 가능성 크다라고 하신 것 처럼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있어야 할 텐데 없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물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⑧구사기왕(久斯祁王)- 산성국제번 황문연의 선조
⑩부련왕(夫連王)- 박조의 선조
⑪여안기왕(汝安祁王)- 추모왕의 20세손으로 고정조의 선조
⑫일토복귀왕(溢土福貴王)- 대박련의 선조
⑬보륜왕(寶輪王)- 대화국 원사공의 선조
⑭수모기왕(須牟祁王)- 대박련의 하내국 박염부, 박인의 선조
이렇듯 고구려에도 금석문과 사서에 나오듯이 분명 제후가 있습니다. 사료들에 나오는 제후들 말고도 분명 다른 제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다양한 명칭을 한 제후들이 확인 되는데, 특히 다물국왕 송양이나 용성왕 풍홍은 양국군이나 안국군 등과는 다르게 지명(혹은 국명)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중원의 국가들(진, 제, 연등등)과 백제(면중, 도한, 팔중, 아착, 매로, 매라등등)에서도 확인 됩니다.
어쩌면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은 고구려의 지명에서 유래 한 제후들 중에는 부여, 옥저, 낙랑, 행인, 개마등등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예를 들어 행인왕, 옥저후등등...)
4세기 말 부터 국제적 위상이 커진 고구려에서 王의 상위개념의 고정 된 칭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5. 일부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와 새로운 제도에 관하여
고국천왕(故國川王): 국양왕(國襄王) 혹은 국양왕(國壤王)
동천왕(東川王): 동양왕(東襄王)
중천왕(中川王): 중양왕(中壤王)
서천왕(西川王): 서양왕(西壤王)
미천왕(美川王): 호양왕(好壤王)
고국원태왕(故國原太王):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
고국양태왕(故國壤太王): 국양왕(國壤王)
광개토태왕: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안원태왕(安原太王):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향강상왕(香岡上王) 또는 안강상왕(安岡上王)
양원태왕(陽原太王):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
평원태왕(平原太王):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평강왕(平岡王), 평국왕(平國王)
영양태왕(嬰陽太王): 평양왕(平陽王), 양강왕(陽岡王)
1) 고국천왕~미천왕 때의 시호 즉 장지명을 보면 川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군주들을 일명 XX양(壤, 襄)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내 川을 뜻 하는 순수 고구려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광개토태왕의 아버지인 고국양태왕도 고국천태왕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정리하자면
壤, 襄(고구려 어)=川(한자)
- 미천왕(美川王) 경우는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는데, 美자와 好에는 공통적으로 좋다, 아름답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2) 고국원태왕, 안원태왕~평원태왕 때의 시호 즉 장지명을 보면 原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군주들을 일명 XX강상(岡上)태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근원 原을 뜻하는 순수 고구려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정리하자면
岡, 崗, 岡上, 崗上(고구려 어)=原(한자)
- 온달열전에서는 영양태왕을 양강태왕이라고도 합니다. 흔히들 이것을 오기로 보지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국강상태왕이나 광개토태왕처럼 같은 곳에 묻힌 것 처럼 영양태왕도 양원태왕과 같은 양강상이라는 곳에 묻혔기 때문에 그리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3) 故國某王
고구려에는 고국천왕, 고국양태왕, 고국원태왕으로 시호에 故國이 붙은 군주가 세 명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루 묘지명에 고국원태왕을 국강상성태왕이라 했듯이 처음부터 國자 앞에 故자가 붙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 시호에 들어간 國자에는 수도라는 뜻도 내포되어있기 국내성을 의미합니다. 모두루 묘지명이나 광개토태왕비의 국강상(국원: 국내성 언덕)앞에 없던 故자가 붙은 이유는 장수태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내성은 옛 수도가 되므로 國 앞에 故자가 붙은 것입니다. 따라서 고국천왕, 고국양태왕도 평양성 천도 전에는 고국원태왕이 국강상성태왕이는 시호로 불렸듯이 국천왕, 국양태왕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4) 고구려는 고국양태왕~장수태왕 중 어느 시기에
장지명+업적+치세+(미칭)+태왕
이라는 새로운 시호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고국양태왕 9년에 국사를 건설하고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새로운 시호제도는 고국양태왕 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소수림태왕의 율령반포 때 새로운 시호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고국원태왕의 정식 시호가 국강상태왕인 것으로 보아 소수림태왕 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호 제도의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태왕의 정식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혹은 광개토지, 대개토지)+평안 +호(혹은 성)+태왕입니다. 고구려의 이러한 시호제도는 영류태왕(영류산이 장지명) 때 까지 쓰였을 것이나, 기록의 부재로 광개토태왕 이후 군주들의 완전한 시호는 알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21대 군주를 문자왕 혹은 명치호왕(삼국유사에서는 명리호왕)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새로운 시호제도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서 나온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고구려 21대 군주의 정식 칭호는
미상(장지명)+문자(업적 혹은 외치)+명치 혹은 명리(치세 혹은 내치)+호(미칭)+태왕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문자명치호태왕으로 불 수도 있습니다.
추신: 예전에 제가 썼던 글들 붙여넣기 해서 살짝 보강, 수정, 짜깁기하였고, 더불어 김용만 선생님, 비사인님, SHaw님 글 인용하였습니다. 컴퓨터 상태(어떻게 된 게 학교 컴퓨터나 여친 컴퓨터에서도 읽히지 않네요.ㅠ 연이 닿질 않는 건가...;;)가 많이 안 좋아서 시노하라 히로카다의 박사님 논문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포멧할 때도 됐으니, 조만간 포멧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첫댓글 태조왕때도 태왕칭호를 이야기할수 있지 않습니까? 고대국가 기반 혹은 중앙집권화를 가장 먼저추구하면서 강력한 왕권으로서 나오면서 급속적인 팽창주의적으로 가던 시기이니 말입니다???
태조대왕 때 분명 급발전을 하지만서도 대외적으로는 대국적 위상은 없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후한 입장에서는 동쪽의 손 쓰기 힘든 약탈국가 정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수태왕 시기의 고구려는 남제와 버금가는 대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태조대왕 시기의 고구려와 장수태왕 시기의 고구려의 위상 차이는 큽니다. 또한 아직 진위여부가 있는 금석문들이지만, 수성왕10년명문과 동천왕 벽비에서는 태왕칭호가 전혀보이질 않습니다. 칭태왕은 고구려가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시점 즉 미천왕 때 부터 쓰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