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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바위와 바위를 감싼 녹지대는 갈색으로 채색되면서도
바위와의 밀착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길게 이어지는 계단처럼 안전을 위한 인공시설물이 꽤나 많은데도
순수한 자연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성주군의 경계에 자리한 가야산伽倻山이지만 합천 해인사의 명성이 워낙 커서 가야산 또한 합천에 있는 산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966년에 해인사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된 바 있고 1972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예로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가야산은 해동10승지 또는 조선8경으로 이름을 높여왔다.
선사시대 이래 산악신앙의 대상지이자 고려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민족생활사가 살아 숨 쉬는 명산이자 영산으로 존재해왔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 고령지방은 1~2세기경에 발원한 대가야국의 땅이었던 까닭에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도 하고, 인도 불교성지 부다가야Buddhagaya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설도 있다. 이 지역은 축복받은 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선후기 인문지리학연구의 선구를 이루었던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서 ‘가야산 바깥 가야천 연변은 논이 대단히 기름져 한 말의 씨를 뿌리면 소출이 120~130두나 되며 아무리 적더라도 80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밭에는 목화가 잘되어서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고 언급하였다.
37년 8개월 만에 개방한 불꽃바위 만물상
경북 성주군 백운리에 위치한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 버스가 도착한 건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탐방금지구역으로 묶여있던 절경의 만물상구간이 37년 8개월만인 2010년 6월 12일에 개방되었다. 많은 산악회들이 그 사실을 알리면서 산객들로 하여금 만물상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산객들 또한 만물상에 대한 구미가 당겨 가야산에는 탐방객들이 더 많아졌다.
개방이듬해 가을, 역시 들뜬 마음으로 만물상이 있는 가야산을 찾았다. 친구 동은이와 함께이다. 금요일 밤 11시경 서울에서 출발하는 산악회버스에 타서는 울렁이는 속을 쓸어내렸다. 네 번째의 가야산행이지만 미답지 만물상을 간다는 건 속을 울렁이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산은 늘 거기 있는데, 그 산은 차임벨을 울리며 내게 들어온다. 순간 산의 유전자와 나의 그것이 일치한다. 그리고 동화된다.
야생화전시관을 지나 탐방안내소 맞은편 들머리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이라 헤드랜턴을 착용한다. 아침식사를 챙겨먹느라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을 놓쳐버렸다. 덕분에 요란스럽지 않게 친구와 오붓한 새벽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두 군데의 탐방로입구가 있는데 용기골탐방로가 아닌 만물상탐방로입구로 들어선다. 초입부터 급한 돌계단오르막이다. 랜턴불빛에 가야산을 휘감는 가을기운이 어찌나 생기 넘치는지 형상을 지닌 물체처럼 비추인다.
“가야산은 새벽공기도 일품이지.”
처음 가야산을 방문한 동은이에게 아는 척을 하며 긴장을 풀어준다. 우측으로 어슴푸레 능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동편의 첩첩 산들 너머로 붉고 노란 서기가 깔리면서 가야산의 가을이 시나브로 지적이고도 섹시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 왼쪽 아래로 심원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헤드랜턴은 필요 없다.
둥글고 찬란한 태양이 머리부터 빛을 발하더니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온다. 산에서의 해맞이는 스위치를 올리면 바로 켜지는 불빛이 아니라 차분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품에 안기는 모습이다. 오늘의 해가 솟는 가야산에서의 일출광경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박동 심하게 울리는 벅차고도 벅찬 새벽이다. 일출의 끝을 보며 친구 동은이도 무언가 소망을 비나보다.
“하늘이시여! 친구의 소망이 무어든 꼭 들어주시옵소서.”
어둠을 거둬내는 가야산의 해가 솟아오른다
바위에 올라서서 크게 바람을 들이마시고 내려다보는 발아래 백운리 마을이 소담스럽다. 역시 산을 병풍삼고 바람막이 삼은 산 아래 마을들은 하나같이 안정감 있고 평온하다.
“이제부터 자네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겠네.”
수림사이로 많은 바위들이 줄을 잇고 반대편으로는 굴곡 심한 마루금이 선명하여 가야산은 이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하는 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만물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왼쪽으로 상아덤부터 요철凹凸 심하게 굴곡으로 이어진 암릉들이 하얀 구름 아래로 두꺼운 근육을 뽐내고 있다. 구름이 많아 햇살이 들락거리지만 가야산은 그래서 더욱 운치 있다.
설악산과 북한산을 버무려놓은 모습이랄까. 험준한 구간에 들어서면서 안전을 위한 데크와 긴 계단이 눈에 띄는데 가야산에서는 그러한 인위적 시설물마저도 주변풍광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만물상탐방로는 초입부터 경사도가 심할 뿐만 아니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일곱 번이나 반복해야하는 험준한 구간이라고 들었다. 더불어 가야산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구간이라고도 들었기에 더욱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만물상에 진입한다.
나아가는 길이 가파른 바위비탈이라 쉴라치면 그때마다 뒤돌아 곳곳을 둘러보게 된다. 앞만 보고 오르다가 언제 저 멋진 곳을 모르고 지나쳤나싶은 곳이 만물상이다. 만 개의 형상을 두루 살피려면 발만큼이나 눈도 바빠진다.
숱한 바위와 바위를 감싼 녹지대는 갈색으로 채색되면서도 바위와의 밀착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길게 이어지는 계단처럼 안전을 위한 인공시설물이 꽤나 많은데도 순수한 자연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에 처해서나 산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현실도피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도피처인 산속에서 생활하는 동안 새로운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게 되어 초월의 깨우침을 얻는 경우도 있고, 도피의식을 미화하여 탈속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경우가 어떠하든 산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람과 산이 서로 교감하면서 승화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현실도피와 은인자중의 장소로 산을 찾아 마침내 새로운 정신적 경계를 개척한 인물로 신라 때의 고운 최치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치원대 혹은 제시석이라고 칭하는 이곳의 바위에 남긴 시를 되뇌노라면 여기 가야산이 얼마나 심산유곡인지를 인식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나운 물결이 뭇 돌에 부딪쳐 산봉우리를 울리니
사람의 말은 지척이라도 분간할 수 없구나.
늘 세상의 시비가 들려올까 염려하여
짐짓, 물이 온통 산을 감싸 흐르게 하였도다.
신라 말,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친 최고의 문장가는 귀국해서도 엄격한 골품제를 따랐던 신라에서 6두품에 불과해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세상을 등지고 가야산으로 들어온 최치원의 마음이 짙게 배여 있는 것도 같다.
이후 최치원은 시 한수와 갓과 신만 남겨놓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당대의 천재가 신선이 되어 유유자적 가야산을 소요할 거라고 회자하기도 하였다. 해인사인근 여관촌이 있는 치인리도 최치원의 이름을 딴 치원리에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한다.
혹여 천재의 실루엣이라도 비칠까싶어 두루두루 멀리 내다보는데 그리움릿지 능선과 그 오른쪽으로 해탈바위가 아득하게 눈에 들어온다. 길을 이어 돌고 돌면 또 바위를 끼고 돌게 된다. 37년이 넘도록 감춰졌던 비경이다. 수고롭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한 비경을 접할 수 있겠는가. 현실을 도피해서라도 찾아와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 극히 높고 빼어나다.’
택리지에 우리나라의 산을 돌산과 토산으로 구분하고,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가야산 돌산봉우리를 예찬한 글이다. 이중환의 지리학은 오늘날 현대지리학적인 관점에서도 실생활에 손색없이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지리학에 대한 평생의 성과를 집대성한 택리지에서 언급하였기에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진 가야산의 바위들은 더더욱 그 형세마저 극도의 멋을 자아낸다. 그렇게 불꽃처럼 이어진 바위군락의 중심인 제단바위에 이르러 그 후방에서 보이는 곳곳을 마구 끌어당겨 카메라에 담는다. 일품의 전망장소이자 쉼터라 할 수 있다.
“어휴, 저길 오른단 말이야?”
저 절벽꼭대기의 바위에 사람이 있지 않으면 어찌 저길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할까. 산세나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설악산의 공룡능선처럼, 북한산 의상능선처럼 바위꼭대기마다 앞서간 사람들이 서있어서 반갑다. 우리 또한 거기에 발 디디고 설 수 있으므로.
뒤돌아본 만물상은 탄성과 함께 아쉬움을 고이게 한다
긴 계단을 올라 지나온 불꽃바위지대 만물상을 돌아보는 건 행복이자 아쉬움이다. 다 먹어버린 초콜릿처럼 여운을 남게 한다. 행복의 여운을 담고 상아덤으로 향한다. 가야산은 그곳의 경관이 눈에 띌 때마다 걸음을 빨리하게 만든다.
천하절경의 기암봉우리, 가망사백리 성봉 상아덤
지금까지의 바위군락과는 확연히 틀린 숲길을 통해 올라서서 바라본 상아덤일대 역시 멋진 풍광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칠불봉을 포함해 정상일대도 운무를 걷어내고 파란 하늘을 이고 있다.
돌아본 수석전시장 만물상은 거대한 바위열차처럼 끝도 없이 칸을 잇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만물상을 보지 못한 채 어떤 이유로든 산행을 중단했다면 그건 아쉬움을 넘어 불운이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상아덤으로 오르려면 봉우리를 두어 번 넘어야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계단을 오르게 된다. 올라와 숨을 고르면서 첩첩산중을 살피다가 실금처럼 가느다란 팔공산 마루금을 눈에 담게 된다. 가야산에서 팔공산을 가늠한다는 게 반갑기 그지없다. 멀리 지방에 와서 친숙한 지인을 만난 기분이다.
가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물상능선과 이어져 천하절경의 산행로를 꾸미는 기암봉우리 상아덤은 서장대라고도 불리는데 상아덤이 본래의 이름이라고 한다.
용기골에서 정상에 오르는 성터에 우뚝 솟아 400리를 내다볼 수 있는 가망사백리可望四百里 성봉聖峰이라고 안내판에 소개하고 있다. 이어지는 상아덤의 역사유래가 읽을 만하다.
상아孀娥는 여신을 일컫는 옛말이며 덤은 바위를 말한다.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인데 그 여신이 바로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라고 한다.
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가야국백성들이 우러러 받들었다는 산신 정견모주가 상아덤에서 밤낮없이 하늘을 향해 백성들을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빌었는데, 그의 기도에 감복한 천신 이비하夷毗訶가 오색구름수레를 타고 상아덤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신과 천신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난다. 큰아들은 대가야의 첫째 왕인 이진아시왕이고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다.
“여기가 그런 곳이었어? 백성의 평안을 위해 빌었는데 왜 애가 생긴 거야?”
“그 두 아들로 하여금 가야국이 평안하게 다스려졌겠지.”
천신과 산신의 밀회장소이자 가야산 최고의 능선에서 가야의 전설을 더듬고는 서성재로 향한다. 가야산성 서문에 해당하는 고개인 서성재로 내려서는 길은 커다란 바위들을 땅에 박아 걷기 좋게 정비했다.
널찍한 쉼터에 서성재 지킴터라고 적힌 작은 초소가 있다. 만물상코스와 용기골코스가 이곳 서성재에서 합류한다. 백운동 들머리에서 3.6km, 칠불봉까지 1.2km 남은 지점이다. 원점회귀 할 경우엔 지금처럼 만물상으로 올라 정상을 다녀와서 여기 서성재에서 용기골방향으로 하산로를 잡으면 수월할 듯하다.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경사 급한 너덜돌길과 가파른 철제계단을 오르며 보게 되는 경고문구들이 으스스하다. 낙뢰주의, 미끄럼주의, 추락주의, 근육경련, 탈진주의 등등. 그만큼 버겁게 올라왔음을 주지시켜 스스로를 재점검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산행은 언제 불시에 다가올지도 모를 1%의 불운에 대비해야 한다. 신체에너지를 잘 관리하여 상황에 맞는 체온을 유지하여야 하고 적절한 비상식량으로 허기가 몰리기 전에 행동식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땀 흘린 걸 보충할 수 있는 수분을 섭취하여야 한다. 여기서 물도 마시고 신발 끈을 조여 맨 다음 다시 출발한다.
역시 명산이요, 성산이로다
옆에서 보기에 바위절벽 같은 칠불봉에도 계단이 놓여있다. 계단끄트머리에는 벌거벗은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를 추켜올려 수고했다고 치하해준다.
가야국 김수로왕이 인도의 아유리국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열 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김 씨의 시조가 된 ‘거등’이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許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가야산에서 가장 힘차고 높이 솟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한 후 도를 깨달아 생불生佛이 되었다하여 그 밑에 칠불암 터가 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표기된 내용이다.
“형제가 열 명이나 되는데도 권력다툼이 없었을까.”
“동생들이 얼마나 너그러웠으면 생불이 되었겠어.”
당시에는 권력을 지니는 것 못지않게 수도의 길을 걷는 것에 생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 가야국 이후 삼국시대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산형은 천하에 절승 중 제일이다.’
고기古記에서 극찬한 표현에 수긍하게 된다. 오대산, 소백산과 더불어 왜적의 전화를 입지 않아 화재, 수재, 풍재의 3재가 들지 않는 가야산답다. 칠불봉에서 사방 둘러보니 역시 성산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다. 지리산을 맨 뒤로 첩첩 겹쳐진 산그리메의 조망은 덕유산이나 지리산에서 보는 풍광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가야산을 볼 때도 멋지기는 마찬가지다. 금오산, 팔공산 혹은 비슬산 어딘가에서 가야산은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이기도 하다가 겹겹 솟은 봉우리 아래로 하얀 구름이 깔리면 둥둥 섬이 떠있는 바다가 된다. 거기서 가야산을 보노라면 거대한 선박의 항해사가 된 기분이다.
주봉인 상왕봉이 소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우두봉牛頭峯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200m 떨어진 칠불봉에서 보니 그런 것도 같다.
칠불봉과 상왕봉이 마주서서 가야산 정상부를 지키고 있다
칠불봉에서 내려와 상왕봉으로 걷는데 성주에서 합천으로 건너가는 접점지역에 여기부터 해인사경내지이며 사적지, 명승지인 문화재구역이라는 팻말이 세워져있다. 대한불교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소유지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무리 봐도 칠불봉이 상왕봉보다 더 높은 것 같지 않은가 말이야.”
성주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서장이 가야산을 자주 산행하던 중 의문을 품었다. 가야산 최고봉은 성주군에 속한 칠불봉이 더 높다며 국토지리정보원에 실측을 요청하였다. 그동안 상왕봉이 더 높다는 전제하에 합천 가야산으로 불렸으나 칠불봉이 더 높다면 성주 가야산으로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밀측정에 나선 결과 칠불봉이 더 높은 것으로 측정되었다. 이로써 가야산은 성주의 소유로 기울어지는 듯했으나 경북과 경남, 성주와 합천 간에 논란이 지속되었어도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칠불봉이 고도상 가야산 최고봉이란 걸 확인하기는 했지만 상왕봉이 여전히 주봉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합천이 가야산의 주인명패를 달고 있다. 정밀한 과학계측도 이어져온 관행과 역사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성주경찰서장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가야산국립공원과 합천군에서는 상왕봉을 주봉으로, 성주군에서는 칠불봉을 주봉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실제최고봉은 칠불봉(해발 1432.4m)이지만 상왕봉(해발 1430m)을 가야산 주봉으로 보는 정설은 그예 깨지지 않았다. 성주는 최고봉의 소유권자임을 확인하고 만물상을 개방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정표나 지도에는 상왕봉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정상석에는 우두봉이라고 적혀있고, 이 지역이 합천군에 속하는 것임을 명백히 못 박았다.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의미하는데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신앙 및 불교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상왕봉꼭대기에는 움푹 팬 샘이 있으며 그 샘에 고인 물은 얼어붙었다. 건강한 소의 코에서 늘 땀이 흐르듯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가야 우비정牛鼻井이다. 가야19명소 중 하나인 우비정을 읊은 시구를 옮겨본다.
우물이 금우金牛의 콧구멍 속으로 통해 있으니
하늘이 신령스런 물을 높은 산에 두었도다.
혹 한번 마신다면 청량함이 가슴속을 찌르니
순식간에 훨훨 바람타고 멀리 날아가리라.
그리 청량해 보이지 않는 우비정의 샘물 대신 물병을 꺼내 갈증을 씻고 정상을 떠난다.
“상왕이시여! 다시 뵐 때까지 부처로서의 품격을 유지하시고 옥체 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겠네. 경도 조심해서 하산하게나.”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하도 많이 올라와서 그런지 하늘에서 내려서는 기분이다.
가야산 꼭대기에 신령한 곳 있으니
개울물은 차갑고 초목은 무성하도다.
혹 구름에다 지극히 정성을 다하면
패연沛然히 뇌우가 산봉우리에서 일어나도다.
정상 바로 아래의 봉천대奉天臺를 노래한 글이다.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던 암봉 봉천대도 가야19명소에 속한다. 정상에서 벗어나자 완만한 경사의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격하게 소란스런 마음으로 올라왔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내리막길을 딛게 된다.
가야산과 해인사의 각별하고도 엄청난 시너지
초라한 몰골의 석조여래입상을 보게 되는데 목 부분이 잘렸고 발과 대좌도 없어져 원형을 잃었다. 균형을 잃은 경직된 자세, 평면적이고 소극적인 조각수법 등 형식화경향이 현저한 여래상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럼에도 보물 264호이다.
가야산지킴초소까지도 무난하게 내려왔다. 해인사 앞에 외나무다리가 놓여있다.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시대 때 양반이 말을 타고 법당 앞까지 들어오는 행패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언제부턴가 이 다리를 건너야 극락에 도달한다는 속설이 사족처럼 붙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말 타고 들어가면 극락에 못갈까.”
“말도 극락에 가겠지.”
해인海印은 불교경전인 화엄경에서 진실한 세계를 의미한다. 해인사경내에 들어서면 이 큰 사찰의 수많은 이력 중에서도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몽골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고려조정은 평화를 소원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목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한 글자 쓸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하였으며 삼십 여명의 장인이 경판 8만 1258장에 무려 5238만 2960자를 거꾸로 새겨 넣었는데, 글자의 형태가 정교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치 한 사람이 쓴 듯 일정하며, 단 한 글자의 오탈자도 없다니 고려인쇄술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가를 인식하게 한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장경각은 목조건물인데도 벌레가 생기지 않고 습기가 차지 않아 지금까지 경판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어, 팔만대장경과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는 임진왜란이후 일곱 차례나 대화재를 겪어 50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 대부분의 건물들이 새로 중건되었지만 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거듭된 대화재를 피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불상도 여기 있다지?”
“보고 가자.”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상이 그것인데 경내 대적광전에서 볼 수 있다. 비로자나불상은 석가모니불상과 달리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 쥐고 있다. 이는 부처와 중생은 하나이며 혼란과 깨달음도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섬세하군.”
“우리조상님들 비상한 손재주는 알아줘야지.”
대적광전 앞 넓은 마당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스님과 신도들이 8만여 개의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사찰내부를 도는 ‘대장경 정대불사’라는 행사를 하는데 이때 대장경판을 직접 구경할 수 있다.
“아무튼 엄청난 절이야.”
“삼보사찰이잖아.”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부처님말씀인 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는 각각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스님,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 불교에서 귀히 여기는 이 세 가지 보물을 지닌 삼보사찰이다.
“해인사를 언급하면서 성철스님을 빼놓을 수는 없지.”
1993년에 입적入寂한 성철스님은 가야산 백련암에서 수도하는 동안 속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하였는데, 1981년 종정으로 추대되었어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만 내려줄 뿐 종단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000배를 안 할 바에는 만나지 않겠다.”
백련암에서 수도하던 중 자신을 만나러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며 끝내 큰절로 내려오지 않아 만남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분이셨어.”
“가야산호랑이로 불릴만한 분이셨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불교의 자존감을 되살리고자한 성찰스님은 입적한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종교여부를 떠나 우러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분으로 회자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거찰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에 둠으로써 명산에 영산으로 거듭났다.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아닐 수 없다.
해인사초입의 갱맥원부터 상왕봉의 우비정까지 19개의 가야명소가 있는데 합천군민들은 합천팔경 중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계곡을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가야산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하여 붙여진 홍류동계곡은 철마다 각기 다른 풍광을 보여 주변의 천년노송과 함께 제3경 무릉교부터 제17경 학사대에 이르기까지 십리 길에 걸쳐 수많은 절경을 접할 수 있다.
“어찌 딱 한 번 와서 이 많은 명승을 다 눈에 담을 수 있겠는가.”
다시 올 때는 넉넉하게 시간을 내어 합천호를 들러보겠다고 마음먹는다. 저수량 7억 9천만 톤에 연간 234백만k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합천호는 1988년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와 창리사이의 황강협곡에 높이 96m, 길이 472m의 다목적댐인 합천댐이 건설됨으로써 조성된 저수지이다. 짙은 산림으로 드리워진 깊은 계곡과 빼어난 경관의 호반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반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회암지구관광지와 새터지구관광지는 경남내륙지방의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합천에서 댐을 지나 거창까지 이어지는 호반도로는 춘천호나 충주호 못지않은 드라이브코스로 호수의 맑은 수면과 수려한 주변경관으로 낭만 가득한 자동차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다음번엔 벚꽃 만발한 봄에 오자.”
그때를 염두에 두고 가야산과 또 합천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때 / 가을
곳 / 백운동탐방센터 - 백운교 - 가야산성터 - 만물상 - 촛대바위 - 서장대 - 서성재 - 칠불봉 - 상왕봉(우두봉) - 봉천대 - 극락교 - 해인사 - 치인리 - 치인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