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마다 그 마을의 규모에 따라 적당한 공터가 있다. 공터는 시장이나 우시장 혹은 넓은 방천 뚝, 아니면 집 주위에 그늘이 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를 말한다. 공터 주변에는 느티나무나 미루나무, 수양버들 나무가 있어 수시로 그늘이 지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간이 나는 대로 공터에 모인다. 이곳은 아이들 놀이터인 동시에 어른의 휴식 공간이다. 공터는 아이들 놀이로 항상 시끌벅적하다. 어른은 나무 그늘에 멍석을 깔아놓고 아이들 놀이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진실이 반이고 허풍이 반이다. 이따금 터무니없는 허풍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밤에는 모깃불을 피워 아기를 무릎에 뉘어놓고 이웃과 담소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는 장소다. 공터는 동네 사랑방 구실을 겸하므로 정보도 주고받으면서 이웃의 흉까지 보는 장소다.
공터에서는 절기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정월보름에는 농악놀이와 윷놀이대회가 열리고 단오 때는 씨름대회가 열린다. 이따금 무료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도 한다. 이런 날에는 면 소재지 사람들이 다 모인다. 활동사진이 상영되면 변사(辯士)가 무대 옆에서 영화 장면에 맞추어서 혼자 영화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해설까지 곁들인다. 변사(辯士)의 목소리에 따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웃고 울고 한다. 그리고 가설극장이나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서커스 공연은 몇 날 며칠을 두고 공연을 하므로 면 소재지가 시끌벅적하다.
부모가 들에 나가 있으므로 아이들 일상은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도 딱히 누가 반겨 주는 사람이 없다. 가장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집에서 기르는 개다. 동구 밖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동네 개들이 주인을 찾아와서 혓바닥을 빼물고 꼬리를 흔들면서 반긴다. 부몬들 매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는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개와 장난을 치면서 집으로 간다. 아침밥을 먹고 아무런 간식도 먹지 않았으므로 배가 고프다. 학교에서 물로 배를 채우면서 공차기도 하고 장난을 쳐 뱃가죽하고 등가죽이 맞붙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노랗게 현기증이 난다. 책보를 마루에 던져놓고 점심부터 찾는다. 할머니가 동생을 보고 있다가 밥을 챙겨준다. 그것도 할머니가 있는 집의 형편이고 그저 저도 없으면 혼자 부뚜막에서 보리밥 한 덩이를 챙겨 먹는다. 쌀보다 보리쌀이 더 많이 섞인 밥에 된장을 듬뿍 떠 놓고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벼 먹으면서 이따금 반찬으로 무짠지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밥 한 사발을 해치운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일거리를 찾아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다. 소를 몰고 들판에 나가 풀을 먹이든가, 꼴을 베로 가든가, 아니면 부모님하고 들에 나가 있는 동생을 데리러 간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아이들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공터가 있다. 소를 자유롭게 풀을 뜯게 한 다음 씨름이나 닭다리 싸움을 한다. 그도 지루하면 칡뿌리를 캐거나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든가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 구워 먹는다. 소가 풀을 뜯든 말든 놀이에 분주하다. 저물녘에 소를 끌고 오면 아버지는 소의 배를 보고는 풀을 먹이지 않고 놀기만 했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듣는다. 동생을 돌보는 여자애들은 공터에서 동생을 업은 채로 놀이를 한다. 동적인 놀이보다 정적인 놀이를 하는데, 이따금 고무줄놀이할 때 자기 차례가 되면 업은 동생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고무줄을 넘다가 탈락이 되면 동생을 업는데, 그 사이 땅바닥을 기어 다녀 흙투성이가 되어 있고 어떤 애는 흙을 집어 먹어 입가에 흙이 묻어있다.
한집에 보통 다섯 혹은 여섯 명의 자식들이 있으니 공터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고 싸움질도 간혹 일어나 부모들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다반사다. 서로 마음에 맞는 또래들끼리 무리가 되어 놀이가 진행된다. 주로 공놀이, 자치기, 오자미, 때기치기(딱지치기), 공기놀이, 고누놀이, 땅따먹기, 비석치기, 말뚝박기, 실뜨기, 사방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를 한다.
아이들 개성에 따라 놀이 종류도 달라진다. 대체로 여자애들은 정적인 놀이를 주로 하고 남자애들은 활동적인 놀이를 한다. 남자애들은 오색이 영롱한 구슬치기가 단연 으뜸이고 다음이 자치기와 말뚝박기다.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가 인기가 많고 오자미 놀이와 나무 그늘에 앉아 공기놀이나 땅따먹기, 실뜨기를 한다.
나무그늘 아래서는 소곤소곤 수다를 떨면서 여자애들이 땅따먹기 놀이에 열중이다. 식구들의 호구 줄을 농사에 두고 있다. 벌이줄이 농사밖에 없으니 농토는 가족의 생사가 달린 땅이다. 이렇다 보니 땅에 대한 집착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유달리 각별할 수밖에 없다. 특히 소농이나 소작을 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땅에 대한 집착이 더 각별하다. 이러다 보니 땅에 대한 집착은 아이들 놀이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된다. 비록 놀이지만 아이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따려고 동작 하나하나에 신중함이 묻어난다. 자신의 땅이 넓어짐에 따라 부모의 욕구를 대신하는 것 같은 희열이 얼굴에 나타난다.
할머니가 손자를 보면서 아이들 놀이 구경에 흠뻑 빠져든다. 놀이에서는 아이들이 선수가 되고 심판도 된다. 놀이를 하다가 의견이 엇갈리면 삐치고 아옹다옹하지만, 서로가 한발씩 물러서서 해결을 한다. 이럴 때마다 새로운 놀이 규칙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권모술수가 없는 아이들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순진무구한 행동이다.
간혹 놀이를 하다가 서로 자기의 규칙이 맞는다고 옴니암니 따져 쉽게 해결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어른에게 심판을 의뢰한다. 어른은 어릴 때 놀았든 일을 상기해서 놀이 규칙에 대해서 심판 노릇을 한다. 아이들은 어른의 판정에 불만을 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수긍을 한다.
집집 굴뚝마다 사리 사리 피어오르던 연기가 저녁 어스름에 묻힌다. 이집 저집에서 저녁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하나둘 빠져나가면 놀이도 끝이 난다.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배를 깔고 호롱불 아래서 꾸벅꾸벅 졸면서 숙제를 한다. 요즘처럼 시간표대로 책을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공부하는 책이 같았기 때문에 책을 일일이 갈아 끼울 필요가 없다. 책이 책보에서 다 나오는 날은 책보가 더러워서 빨래를 할 때뿐이다. 숙제를 끝마치면 책을 싸서 윗목에 놓고 잠을 잔다. 낮에 놀이에서 진 것이 분한 아이들은 잠을 자면서 잠꼬대까지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 잠자리를 봐주고 난 후 공터로 모인다. 공터는 어른들 차지가 된다. 세상사 고단함을 두런두런 풀어내서 해결책도 얻고 스트레스도 푼다. 자식 자랑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남의 자식 자랑을 들으면서 자기 자식과 비교를 하면서 한숨까지 쉰다. 자랑거리도 아닌데도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의 언행 하나하나가 팍팍한 인생사를 적셔주는 단비다. 자식 자랑을 하면 서로가 맞장구를 쳐주는데, 별 자랑거리도 아닌데 자랑한다고 한마디 했다가는 곧바로 공터가 떠나갈 정도로 말다툼이 벌어진다. 자식 자랑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부모의 희망을 꺾어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하므로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간혹 남의 흉을 봤다가 그 흉이 돌고 돌아 침소봉대가 되어 공터가 몇 날 며칠이 시끄러워지는 날도 있다. 공터는 밤낮으로 조용한 날이 없다. 공터에 있는 수양버들나무 밑동이 비비 꼬여져 있고 둥치가 울퉁불퉁한 이유는 동네 사람들의 희로애락이나 비밀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1940년 1950년도를 살았던 아이들의 일상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