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백작, 윤강로 詩人
I. 글을 쓰기에 앞서
II.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III. 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추억
IV. 詩人이라기 보다 人間으로서의 혜화동 백작
V. 혜화동 백작의 작품세계
I. 글을 쓰기에 앞서
윤강로 시인님은 나의 글재주를 처음으로 인정하여주신
서울 보성중고등학교 때의 은사님이다.
물론 그 당시의 우리에게 가르치신 과목은 국어였다.
35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 스승과 제자가 우리나라의 원로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다시 만났지만, 감히 내가 어찌 스승의 글이나 시를
평하고 논할 수가 있겠는가?
이 글에서는 단지 선생님과의 추억, 그분의 시적(詩的) 창작 배경,
그분의 인품이나 명성에 비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사이버 공간의
무수한 자료의 범람 속에 아직도 바르게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나
일화를 중심으로 선생님과의 추억을 더듬어 보며, 단편적이나마
그분의 멋지고, 참된 詩들을 감상하여 보기로 한다.
II.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서언(序言)에도 이미 밝혔듯이, 발간 시집 제목이 특이하여 그런지
의외로 인터넷 상의 선생님의 저서 등이
시집의 Title, 펴낸 곳, 발간 년도, 등이 정확치 못하여,
이례적이지만, 그분의 약력을 별도의 지면 빌어
여기에 소개하여 보기로 한다.
시인 윤강로(尹崗老)
1938년 6월 5일 중국 훈천시에서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0年代부터 서울 보성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1970年代 初 {분수} 동인을 결성하여 그들의 주축이 되어, 동인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 발표하여 이미 詩人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셨고,
그 결실이 시집 [다섯 사람의 분수(噴水)] (1975, 관동출판사)를
발간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문단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시 "발성법", "불꽃놀이", 등이 박목월, 김종길, 박남수 세 분의
심사로 당선되어 월간시집 [심상]신인상으로 정식 등단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 後에 보성중고등학교에서 36년간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다가
교직 생활을 마감하시고, [문학저널]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 심사위원,
문예 강좌, 등으로 아직도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선생님의 작품 활동은 아래 발간된 시집으로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제1 시집 ~ 불꽃놀이 (1979, 심상사 )
제2 시집 ~ 피피피 새가 운다 (1985, 민족문화사)
제3 시집 ~ 오늘도, 피피피 새가 운다 (1990, 청하)
제4 시집 ~ 먼 천둥 피피피 새야 (1994, 혜화당)
제5 시집 ~ 비어 있음의 풍경 (2001, 모아드림)
제6 시집 ~ 서사시집 별똥전쟁 (2001, 청년정신)
제7 시집 ~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 (2005, 도서출판 엠아이지)
제8 시집 ~ 작은 것들에 대하여 (2011, 문학아카데미)
III. 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추억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많지만, 내가 느낀 선생님은
첫째, 학생들에게 무엇을 심어주고 가르쳐야 될지 아시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모든 담당 과목 선생님들이 그러하였듯이 시험 위주의
교육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에게 문학적인 심성을
느낄 수가 있게 강의를 하셨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우고 알려고 하는
성의를 보이면 선생님의 특유한 걸음걸이 때문에 나무로 된 강의 발판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칠판에는 갓 깨우친 초등학생들이 한글 연습이라도
하는 듯 타이프 치듯 칠판에 콕콕 찍어 누르는 듯한 백묵 소리가 요란해진다.
그분이 우리에게 심어준 것은 누구나 훌륭한 글을 쓸 수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의 동기부여는 그분의 애교(?) 있는 칭찬으로 생겨난다.
자료: 일전에 보내주신 콕콕 찍어 누르는 듯한 선생님의 친필
둘째, 어떤 정신으로 교직을 수행하여야 할지 아시는 분이었다.
그분 당신은 훌륭한 선생은 되지 못할지라도 "선비 선생"은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박봉에 쪼들리는 생활에 도움이 될까하여
많은 선생님들이 입시 학원 강의나, 과외수업을 방과 後나 휴일에 하셨다.
강의 시간에 "선비 선생"과 대비하여 교육자로서 분에 넘치는 분들을
"걸레 선생"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그분은 흔한 과외수업 한번하지 않고
끝까지 "선비 선생"으로 하늘에 향해 부끄러움이 없이 우리 학교에서만
외골수로 36년간의 교직을 마감하셨다.
셋째, 아담하신 체구이지만, 행동이 민첩하시고, 힘이 세신 분이었다.
어느 미술 선생님의 결혼식 후에 피로연에서 야회용 가스레인지에서
폭음이 들리자 "모두가 나온 것 같은데, 윤 선생만 안 보이시네." 하자,
이미 제일 먼저 피로연 장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딱딱한 수업 시간을 즐겁게 하여주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유도계의 거봉
9단 김덕수 체육선생님 덕분에 유도수업 지정 학교였는데, 때마침 두 분이
학교 정문과 후문이 모두 잠긴 밤에 일이 있어 김덕수 선생님이 먼저 날렵한
몸으로 담을 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씀도 우리에게는 의외의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 육중한 유도 9단인 김 선생님을 업고 병원까지 모시고 가신 분도
윤 선생님이었다.
넷째, 선생님으로서 자존심은 대단하셨다.
우리 학교의 평범한 심아무개 선생님이 갑자기 장학사로 발탁되어 가신 분이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우리 학교를 검열 나오게 되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사열대에 올라 전교생의 경례를 받으며, 훈시를 한 적이 있었다.
잠시 후에 긴 복도를 따라 수업을 참관하는지 장학사가 움직이니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선생님들이 머리를 숙여가며 그 분의 뒤를 따라 가면서
보고하듯 상세한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들 사이에도
힘을 발휘하는 보직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그런데, 윤강로 선생님은 다르신 것 같았다.
우리 1년 선배 중에 "민병찬"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탁월한 아이스하키 선수였고, 그 선배의 아버님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교육계의 수장이신 민관식 문교부장관이었다.
그 선배 아버님의 영향력은 심아무개 장학사의 영향력에 비할 수도
없을 만큼 교육계뿐만 아니라,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 대단한 힘을 갖춘 문교부장관도 자기 아들의 일에는
어쩔 수가 없는지 마침 아들이 챙기지 못 한 학교 일로 인해
우리 학교 후문에서 비서진을 멀리한 채 기웃거리면서
그 선배에게 무엇인가 전해주려는 차에 마침 담임선생님이던
윤강로 선생님이 그분을 보았다.
대번에 나온 말이 "병찬이 아버님이 여기 웬일이십니까?"였다.
이런! 동료로 있던 선생이 장학사가 되어 우리 학교에 와도
교장 선생님이나 올라가서 연설하시던 사열대 올라 훈시를 듣는데,
그 당시 문교부 장관을 보고, 병찬이 아버님이라니...
아마도 다른 선생님들 같았다면 言行을 달리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놀란 것은 그 당시 최고 권력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민관식 문교부장관의 답변이었다.
"윤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철없는 자식이 과제물을 챙기지 못하였는데
집사람이 몹시 아파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그 녀석을 집에서 본지도 오래되어서...
아무튼 선생님 너무 죄송합니다. 그럼, 선생님에게 전해 드리고 갑니다."
그 당시 윤강로 선생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고,
민관식 문교부장관님의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IV. 詩人이라기 보다 人間으로서의 혜화동 백작
우리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로마 후기 때부터 귀족의 등급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그 첫 번째 작위인 공작을 필두로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으로 나누어 불려 진 것을 볼 수가 있다.
서열이 첫 번째 공작이 아닌 세 번째인 백작으로 불려 진 것에는
지역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붙여진 Nick Name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즉, 그분이 36년간 줄 곳 교편 및 詩作 활동을 한 곳이 혜화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요즈음 표현으로 어울릴지 모르지만, 혜화동에서 제일 높은
동장님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아무튼 백작은 아무나 하는 것인가.
우선 혜화동에서 덕망이 높으신 분이어야 한다.
그리고 洞民을 사랑하여야 한다.
내가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만난 곳은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엘빈이란 카페였다.
그 전신이 보헤미안 다방이었는데 혜화동에서 꽤나 글재주 있는 분들의 모이는 아지트였다.
그 카페에는 두 분의 시인님의 방이 따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 하나는 창가에 따로 꾸며져 있는 윤 선생님의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시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고등학교의 국어 교사 출신이신
현재 생존해 계시는 시인들 中에 가장 원로이신 황금찬 시인님의 방이었다.
자료: 엘빈 카페에 꾸며진 윤강로 시인님 방
자료: 엘빈 카페에 꾸며진 황금찬 시인님 방에서 황금찬 시인님, 윤강로 선생님과 필자
이 두 분의 시인님께서는 카페 주인이 바뀌면 두 분의 시인님도
프리미엄이 붙어 함께 새로운 주인에게 이전된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다.
이젠 우리도 익히 들어서 알지만 그 주변이 "동숭동 대학로"로 변해
문화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하여 요식업의 사장님들이 혜화동 백작을
모시고 그 식당의 맛난 음식을 대접을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모셨지만
한 번도 실제로 대접한 경우가 없다고 한다. 항상 선생님은 음식 값을
계산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 백작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는 洞民(?)들에게 언제나 사랑스런 칭찬을 하며 용기를 주신다.
이런 분이 혜화동 백작이 되어야지 누가 되겠는가?
자료: 선생님의 시비(詩碑) ~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개화예술공원 소재
V. 혜화동 백작의 작품세계
"옛날에는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 씨, 이 씨, 박 씨 중에
한 사람이 돌을 맞았는데, 지금은 시인이 맞습니다."
亞細亞 文藝 발행인이신 송병훈 시인님이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많은 시인들 중에 국어국문학과를 전공으로 하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분은 국문과 출신답게 작품의 전반에는 모국어의
특성을 완전히 소화하여, 깔끔한 어휘의 선택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모든 시인들이 詩題로 많이 사용한
바람에 관련된 시제의 내용을 살펴보며, 그분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로 빠져 보자.
사람들이 쿨럭인다
세상의 호흡이 답답하다
우린 서로에게 황사바람
우린 서로 때문에 숨이 답답하다
봄꽃이 지고
봄꽃이 피는
봄날이 쿨럭인다
詩集 비어 있음의 풍경(2001, 모아드림)에 수록된 "황사바람" 中에서
빨래가 춤을 춘다
옥상 빨래줄에 널린 빨래가
구름떼 몰려가는 하늘 배경으로
바람의 춤을 춘다
어디에 가고 싶은 춤이냐고 묻지 마라
훠어이 훠어이 맨손 빈몸의 가벼움으로
놓여나고 싶을 뿐이다
詩集 비어 있음의 풍경(2001, 모아드림)에 수록된 "흐리고 바람 센 날" 中에서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
돛을 올려 어딘가로 흘러가는 바람이 분다
사십 년 이 거리 떠돌아 나의 돛폭이 남루해도
정든 오랜 출항지
詩集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2005, 도서출판 MIG)에 수록된
"혜화동 바람 부는 날" 中에서
허전하게 살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늘어가네
너, 그리고 너, 또 너, ... 하나 더 보태기
진짜 너
나의 목마름과 고뇌가 낮은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네
詩集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2005, 도서출판 MIG)에 수록된
"낮은 바람 이야기" 中에서
고향이란 말은
나에게 모국어가 아니다
떠돌아다니는 바람의 언어다
고향이 없는 야생이 되어
잠꼬대도 바람의 언어로 우우 짖으면서
가끔 바람의 혀로 '고향'이라고
발음하면 뜨거운 가슴속 무인지대
텅 빈 하늘에
주르륵 흐르는 몇 개의 별똥
詩集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2005, 도서출판 MIG)에 수록된
"바람의 혀" 中에서
위에서 보듯이 "바람"이란 詩題의 의미가 (1) 인간 서로에게 답답한 벽이
될 수도 있음을, (2) 또는 현실을 도피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훌쩍 가 버리고 싶은, (3) 심지어 그것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도, (4) 외로움에 사무쳐 마음 깊은 곳에 흔들리는,
(5) 단 하나 밖에 없는 나의 거짓 없는 절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분의 시에 나타나는 바람의 의미는 위와 같이 국문과 출신답게
모국어의 특성을 잘 소화하여 어휘의 선택이 세련됨을
독자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던 간에 쿨럭이고, 춤을 추고, 흘러가도,
정녕 펄럭이고 흔들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거짓 없는
절실한 詩를 쓰기 위한 바로 선생님 자신이었다.
(글쓴이: 재미 시인, 멀티 시문학 평론가 ~ 박만엽)
(NOV/28/2009)
Last Update (APR/08/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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