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2월은 절기상으로 가장 추운 소한과 대한이 들어 있는 달이기도 하지만, 옛날 음력 섣달은 유난히 추워 지금의 날씨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 달라붙고, 얼굴은 얼얼하다 못 해 따끔거린다. 귀를 에는 뜻한 추위와 바람과 전깃줄의 만남에서 윙윙거리는 소리, 먹는 것과 입을 것이 부실한 아이들은 추위와 그 소리만 들어도 몸이 움츠려 들었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이라 혹독한 그 추위는 옷 속을 헤집고 다녀 몸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러나 추위도 아이들의 놀이를 이겨내지 못했다. 마을로 냇가로 들로 산으로 쏘다니면서 추위와 맞장을 뜨면 스스로 꼬리를 내린다. 아이들 이마에 땀이 비쭉이 배어 나오면서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폴폴 나온다.
그날도 어머니는 한 끼라도 느루 먹으려고 찬밥에 김치를 썰어 넣고, 갱식이를 끓이고 있었다. 하늘이 얕게 내려앉고 굴뚝의 연기가 곱게 올라가는 날, 바람도 불지 않는 하늘에서는 탐스러운 하얀 눈이 펄펄 내린다. 불을 때다 말고 어머니는 눈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계셨다. 그 때 어머니는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고 처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 올렸을까? 아니면 쌀이나 밀가루로 생각했을까? 만사 걱정거리 다 내려놓고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 풍경 속에서, 잠시라도 처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낭만을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그 때는 탐스러운 눈을 바라보면서 저 눈이 쌀이나 밀가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없다. 아이들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고, 삼시세끼 끼니꺼리 때문에 고심하던 부모님은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눈이 쌓이면 끼니, 옷, 땔감 등, 걱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눈이 오면 낭만이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고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눈 내리는 풍경은 잠시나마 내릴 때 어른 아이 모두 가난했던 마음을 상상으로나마 풍족한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덩달아 개도 좋아서 따라다닌다. 아이들이나 개들이 눈 좋아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내린 눈을 가래로 밀어 길옆 한곳에 싸 놓으면, 마땅히 놀이 기구가 없던 아이들은 그 곳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눈 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눈이 녹아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먹기도 하고, 칼싸움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마당에 있는 눈을 다 치운 후 집 앞에 있는 눈을 쓴다. 집 앞을 쓸 때 이웃집도 같이 쓸면, 자기 집 앞만 쓸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이웃집 앞 삼척三尺정도 만 쓸어 준다. 이것을 '이웃삼척'이라고 한다.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려니 서로 정이 없는 것 같았고, 다 도와 주려니 힘이 부친다. 그래서 그 이웃사촌이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삼척三尺만 쓸어주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것이다. 이웃삼척이란 낮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사촌하고, 세상을 사는 방법이자 생활의 지혜라고 조상님들은 생각했다.
음력으로 12월을 납월(臘月)이라고 부르며 보통 섣달이라고 한다. 섣달에는 다양한 세시 풍속이 있다.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은 농사형편과 여러 가지 집안일에 대하여 신에게 고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인데, 이 날을 납향(臘享)이라고 한다. 제사는 남자들이 지내는 의식이고 고사는 여자들이 지내는 의식으로 집안에 있는 신에게 지내는 것이다. 그 집의 가장을 수호하고 대들보에 산다는 성주신을 비롯해서 안방에 있는 삼신, 부엌에 있는 조왕신,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신, 창고에 살면서 집안의 재물을 지킨다는 업신, 변소에 사는 측신, 그 밖에도 집안에 살고 있는 모든 신에게 손을 비비면서 한 해를 무사히 넘긴 것을 감사해 하고 또 복을 달라고 비손하는 게 고사다.
어머니는 집안이 두루 편안하면서 장사도 잘 되게 해달라고 시루떡을 해놓고 비손을 한 후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가 한 번에 깨끗하게 타면 재수가 좋다고 소지 올릴 때, 어머니의 온 신경은 소지 불에 집중이 되어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엄숙하다. 고사가 끝나면 이웃집하고 떡을 나눠 먹는다. 이날 참새를 잡아먹으면 몸보신이 되고, 아이들이 새 고기를 먹으면 마마(天然痘)를 가볍게 한다고 해서 참새를 잡는 풍습이 있다. 어둠이 내리면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손전등을 들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초가집 처마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참새를 잡아 구어 먹었다.
1년의 가장 마지막 날을 섣달그믐 또는 제석(除夕), 제야(除夜)라고 부른다. 요즘은 제야의 종소리, 제야의 밤이니 해서 제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냥 섣달그믐 종소리, 섣달그믐 밤이라는 우리말에 더 정감이 간다.
섣달그믐은 새해를 맞기 위하여 한 해를 반성하는 날이다. 부녀자들이 정초에 쓸 세찬을 장만하고, 남자들은 액을 물리치고, 잡귀의 접근을 막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 정초를 맞이하려고, 집 안팎 곳곳에 묵은 한 해의 그을음을 거두고 대청소를 한다. 그리고 황토 흙을 집안의 후미진 곳, 마당, 대문 앞에 뿌려 깨끗하게 다듬어 단장을 한다. 일보다는 막걸리 마시는데 더 열중하다 보니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었든 기억이 났다.
대청소가 끝난 남자들은 묵은세배(舊歲拜)를 하러 다닌다. 묵은세배의 의미는 이 해도 조상이나 어른들이 잘 보살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지냈다는 감사의 인사를 1년의 마지막 날에 드리는 것이다. 세찬 음식장만을 마친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놓고, 집안의 안녕과 자식들이 건강하게 공부 잘 하게 해 달라고, 조왕신 앞에서 비손을 하면 그믐날의 행사가 끝이 난다.
밤에는 잡귀가 못 들어오게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켜 대낮같이 밝힌다. 야광귀(앙괭)라는 귀신이 내려와 아이들 신발을 훔쳐 간다고 한다.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마루나 혹은 높은 장대에 어레미(체)를 걸어 놓는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신발을 방안에 두고 잠을 잤다.
이슥한 밤에 할머니는 원일소발(元日燒髮)을 한다. 여자들이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모은 후, 빗 상자에 보관한다. 1년 동안 모아두었던 머리카락을 삽짝 밖에서 태운다. ‘머리카락 사름’이라고도 불리는 이 풍속은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믐날 복을 팔고 사는 풍속도 있다. 동네 형들은 밤새도록 집집마다 복조리를 팔로 다녔다. 복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면, 복이 들어온다는 풍속인데, 복조리는 조리로 쌀을 일듯이 한 해의 복을 복조리로 일어 얻는 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은 동짓달 하늘로 올라간 ‘조왕신’이 그믐날 밤에 내려오는데, 자고 있으면 지난해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조왕신이 그 집안 식구들의 눈썹을 희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날 밤 자지 않으려고 밤늦도록 윷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밤에 무를 깎아 먹으면 부스럼이 없어진다고 무나 배추 뿌리를 깎아 먹었다. 하루 종일 기름기 있는 음식만 먹다가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속이 시원해진다. 시원하면서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지금도 입안에서 맴돈다.
섣달 그믐날 집안에 기름 냄새가 풍기고, 막걸리 한잔에 얼굴이 붉어진 남자들의 호기스러움에 집안이 떠들썩하고 생기가 넘친다. 설빔으로 받았던 운동화를 머리맡에 놓고 행여 없어질까 봐 몇 번이고 잠에서 깬 기억은 지금도 가슴이 설랜다. 모처럼 먹은 기름진 음식 때문에 변소에 들락거렸든 기억들이 새삼스럽고 그런 일을 해결해주는 것은 누나 밖에 없었다. 일 년 내내 누나를 골탕 먹이고 말 안 들었던 일이 그믐밤에 두 번 세 번 누나에게 내년에는 잘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풍요롭고 가슴 설레는 섣달그믐 밤이 지나고 설빔을 곱게 차려입은 후, 정초차례를 지내면 일 년 중 가장 풍족한 시절이 다가온다. 일 년 내내 용돈이 없다가 세뱃돈을 받을 때, 온 세상을 다 얻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세배를 다닌다. 그날 하루는 용돈도 생기고 음식도 푸짐하게 먹으면서 짓궂은 행동을 해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어릴 때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이런 다양한 세시 풍속이 있어서 추운 겨울철에도 마음만은 부자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끼면서 살았다. 요즘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게 없다. 그러나 섣달그믐이 다가오면 무엇이 하나 빠진 것 같이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 시절을 생각 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