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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세미나: 2019년 1월 8일 / 발제자: 김선미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청하, 49-88쪽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짜라투스트라의 서설
1.
짜라투스트라의 나이 서른, 그는 고향과 고향 호수를 버리고 산중으로 들었다. 십 년간,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어느 날 아침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 거대한 천체여! 너에게 만일 네가 비춰 줄 것이 없었더라면, 너의 행복이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려, 너로부터 넘쳐흐르는 것을 취하고, 그 댓가로 너에게 축복을 보냈다.
이제 인간에게로 내려가고자 하는 나는 너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듯, <몰락해야만> 한다
축복해다오 넘쳐흘러 내리고자 하는 이 잔을, 그로부터 황금빛 물이 흘러나와 거기 비추인 너, 태양의 기쁨을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실어 나르도록,
보라! 이 잔은 다시 비워지고자 하고,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리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2.
도대체 이럴 수가! 저 늙은 성자는 자신의 숲속에서 <신은 죽었다>는 것에 대해선 아직 듣지도 못했구나!
3. 초인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너희의 의지는 말해야만 한다. 초인이란 대지의 의미<이어야만> 한다고!
초인은 바다이고, 그 속에서 너희의 커다란 경멸은 가라앉을 수 있다.
너희가 살아 마주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커다란 경멸의 시각이다. 너희의 행복도, 또한 너희의 이성과 너희의 덕도 혐오스러워지게 되는 시각이다.
자신의 혀로 너희를 핥아줄 번개는 어디 있는가? 너희에게 접목되어야만 할 광기는 어디 있는가?
보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그 번개이며, 그가 바로 그 광기이다.
4. 몰락(흘러넘침)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심연 위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파도>이며 <몰락>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덕이란 몰락에의 의지이며 동경의 화살인 까닭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언자이며, 먹구름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리고 그 번개가 초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5.
저들이 말하는 <최종인간>=<교양속물>
6. 줄광대의 죽음
당신은 위험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았고, 거기엔 아무것도 경멸할 게 없다. 이제 당신의 천직으로 하여 파멸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내 손으로 손수 묻어 주겠다.
7.
짜라투스트라가 오늘 참으로 멋진 고기잡이를 했구나. 사람은 하나도 낚지 못했지만, 그러나 송장을 하나 낚았으니.- 짜라투스트라가 속으로 한말
인간 실존이란 섬뜩한 것이고 그러면서도 또한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 실존에겐 한 명의 어릿광대까지도 운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니.
8. 배고픔
배고픔이 나를 기습하는 구나, 마치 강도처럼.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숲과 늪 가운데서 배고픔이 나를 기습하는구나,> 그것도 깊은 밤중에.
누가 와 나의 편찮은 잠을 깨우는가?(은둔자)
한 명의 산 자와 한 명의 죽은 자요.(짜라투스트라)
헌데 당신의 길동무에게도 먹고 마시도록 하게나. 그가 당신보다 더 지쳐 있으니(은둔자)
나의 길동무는 죽었소. 그러니 그에게 먹고 마시라고 권하긴 어렵소(짜라...)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일세(은둔자)
내 집 문을 두드린 사람은 또한 내가 내주는 것도 받아야만 한다네. 먹고서 잘들 가게나(은둔)
9. 아침놀/새로운 진실
오랫동안 짜라투스트라는 잤고,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숲속과 숲속의 정적을 바라보았고 놀라서 그는 자기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급히 일어나 환성을 올렸다. 새로운 진실을 봤기 때문이다.
한 줄기 빛이 내게 떠올랐다. 길동무를 나는 필요로 한다. 그것은 죽은 길동무나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길동무가, 죽은 길동무나 시체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내 자신이 메고 가야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게 아니고 또한 짐승의 무리나 신도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나는 너로부터(시체) 떠난다. 때가 되었다. 아침놀과 아침놀 사이에 새로운 진리가 내게 왔던 것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지는 않으리라. 내가 죽은 자와 이야기 한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찬미하는 자와 나는 한 패가 되리라. 나는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초인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을 모두 보여 주리라.
10. 정오(뱀과 독수리)
짜라투스트라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 태양은 정오에 멈춰있었다.
한 마리의 독소리가 허공을 헤치며 넓은 원을 그리고 있었고, 한 마리의 뱀이 먹이처럼이 아니라 친구처럼 그 독수리에게 매달려 있었다.
태양 아래서 가장 긍지 있는 짐승과, 태양 아래서 가장 영리한 짐승-저것들이 정찰을 하러 나왔구나.
이리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짜라투스트라의 설교
세 가지 변용에 관하여
정신의 세 가지 변용 –내가 너희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용을 들겠다. 곧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변용
정신이 낙타가 되는 변용
정신에게는, 경외심이 깃들어 있는 강한, 잘 견디는 정신에게는, 많은 무거운 것들이 있다. 정신의 강함이 무거운 것을, 가장 무거운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가장 무거운 짐이란 자신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것, 자신의 지혜를 조소하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등등
잘 견디는 정신은 그 모든 무거운 것을 맡아진다. 짐을 싣고 사막으로 서둘러가는 낙타처럼, 그렇게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간다.
낙타(정신)가 사자(정신)가 되는 변용
그러나 가장 외로운 그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용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그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고, 자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자신의 최후의 주인, 자신의 최후의 신의 적이 되고자 하며, 승리를 위해 그 거대한 용(너는 해야만 한다)과 싸우려는 것이다. 그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 싶다) 라고 말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 그것은 사자도 아직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해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는 것-그것을 사자의 힘은 할 수 있다.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포획하는 것, 하나의 약탈이며, 약탈하는 짐승의 일인 것이다.
사자(정신)가 어린아이(정신)로 되는 변용
어째서 약탈하는 사자는 어린아이로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움직임이며,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나는 너희에게 세 가지 변용을 들었다. 곧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지막으로 어린아이가 된 변용을.
덕의 강좌에 관하여
현자의 잠과 덕에 대한 설교-잠자는 것은 결코 가벼운 기술이 아니다. 잠자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낮 동안 열 번을 자기 자신을 초극해야만 한다. 열 번을 자기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모든 덕을 갖고 있어야 한다.
너의 열 가지 초극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열 가지 타협, 열 가지 진리, 내 마음을 즐겁게 해준 열 가지 웃음은 무엇 무엇이었는가?
짜라투스트라는 생각했다. 그 마흔 가지의 생각을 가진 이 현자는 바보 같다. 하지만 그가 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지혜란, 잠을 잘 자기 위해 깨어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찬양받는 강단의 현자들에겐 지혜란 꿈 없는 잠이었다.
그들은 삶의 더 나은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누워 있는 것이다.
배후세계론자에 관하여
* 배후세계론자-세계의 배후에 형이상학적 혹은 종교적인 무엇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칭
나 역시 이전엔 모든 배후세계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안으로 환상을 던졌었다. 그러나 정말로 인간의 피안으로였던가?
아 너희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했던 이 신은 인간이 만든 작품, 인간의 광기였던 것이다. 모든 신들과 똑같이!
그 신은 인간이었고, 그리고 인간과 자아의 초라한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것은 결코 피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배후세계론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배후세계를 창조한 것은 괴로움과 무능력이었으며, 가장 괴로워하는 자만이 체험하게 되는 저 짧은 행복의 광기였다.
대지에 절망했던 것은 육체였다. 저 세상, 천상의 無인 그 탈인간화된 비인간적 세계는 인간으로부터 잘 감춰져 있고 그리고 존재의 배腹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면 결코 인간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그래도 가장 잘 증명되는 게 아니겠는가? 이 자아와 이 자아의 모순과 혼란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장 정직하게 얘기한다.
창조하고 의욕하고 평가하는 이 자아, 그것이 만물의 척도이며 가치이다.
그리고 이 가장 정직한 존재, 자아, 그것이 육체에 관해 얘기한다. 시를 짓거나 몽상에 빠지거나 부러진 날개로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는 때에도 육체를 원하는 것이다.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들과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낸 것은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었다.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라. 그것이 보다 정직하고 보다 순수한 목소리이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관하여
「나는 육체이며 영혼이다」-어린아이는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말하면 안 된단 말인가?
육체는 하나의 큰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복합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양떼이며 목자인 것이다.
감각이 느낀 것, 정신이 인식한 것, 그것은 결코 그 자체 안에 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자신들이 모두 사물들의 목적이라고 너를 설득하고 싶어 한다.
육체의 경멸자들에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경시하는 것, 그것은 그들의 중시가 만든 일이었다. 중시와 경시, 그리고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 창조하는 자신이 스스로 기쁨과 슬픔을 창조해냈다.
희열과 열정에 관하여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상적인 덕이다. 그 덕 속엔 영리함은 적게,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이성은 가장 적게 들어 있다. 너는 더듬거리며 너의 덕을 찬미해야만 한다.
창백한 범인犯人에 대하여
그려진 한 선線이 암탉을 묶는다 범인이 가했던 일격의 행동이 그 자신의 가난한 이성을 묶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행위<이후의> 광기라 부른다.
이 가난한 육체를 보라! 그 육체가 괴로워하고 열망했던 것을 그 가난한 영혼이 저 혼자서 해석하였으니,-- 그것을 살인의 쾌락과 검의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독서와 저술에 관하여
씌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산맥 중에서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까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경구는 산봉우리어야 한다.
그 경구를 듣게 되는 자는 몸이 크고 키가 큰 자라야 한다. 희박하고 순수한 공기, 가까운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 찬 정신. 이런 것들은 서로 잘 맞는다.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달렸다. 나는 날으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내가 움직여 나가도록 나를 떠밀어 주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나는 가볍고, 지금 나는 날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보고, 지금 나를 통해 한 神이 춤을 춘다.
山上의 나무에 대하여
자신을 피하는 청년에게- 짜라투스트라가
「내가 이 나무를 내 손으로 흔들려 한다 해도, 내겐 그런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바람은 이 나무를 괴롭히고, 이 나무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굽어지게 한다. 우리를 가장 심하게 구부러뜨리고 괴롭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나무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구름이 거처하는 곳과 아주 가까운 데서 살고 있다. 이 나무는 아마도 최초의 번개를 기다리는 거겠지?
청년이 짜라투스트라에게
「내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했을 대 나는 몰락을 갈망했고, 그리고 당신은 내가 기다리던 번개입니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관하여
죽음의 설교자들이 있다. 이 지상은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라는 설교를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런 다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지혜란 이런 것이다. 계속 살아가는 자는 바보이고, 우리는 그러한 바보들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삶이 갖고 있는 가장 바보스러운 점이다.
삶은 괴로움일 뿐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좀 끝내버리도록 하거라! 괴로음일 뿐인 삶을 좀 끝내버리도록 하거라! 그
리고 또한 너희들의 덕이 가르침이란 것도 이런 것이다. 너는 스스로 자살해야만 한다!
육욕은 죄다. 죽음을 설교하는 어떤 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비켜가며 아이를 낳지 말자!
전쟁과 전사에 관하여
나는 너희의 가장 훌륭한 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진실을 말할까 한다!
너희가 인식의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인식의 戰士는 되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적을 찾아야 하고, 너희는 전쟁을 해야 하며 그리고 너희의 사상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좋은 명분은 전쟁까지도 신성화시킨다고 너희들은 말하는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좋은 전쟁은 어떤 명분이라도 신성화시키는 것이다.
선한 것이란 무엇인가 너희는 묻는다. 용맹스런 것이 선한 것이다.
삶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너희의 최고의 희망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너희의 최고의 희망이 삶의 최고의 사상이 되게 하라!
너희의 최고의 사상을 그러나, 너희는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명령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의 복종과 전쟁의 삶을 살아라!
니체 세미나: 2019년 1월 22일 / 발제자: 김선미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청하, 91~94쪽
시장의 파리 떼에 관하여(배우와 군중들)
달아나거라, 나의 친구여, 너의 고독 속으로!
고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또한 위대한 배우들의 소음과 독파리 떼의 윙윙거림도 시작된다.
상연하는 자들을 군중은 위인이라 부른다.
-- 수많은 배우(어릿광대들이며 시절의 주인들)에 우리는 눈멀고 귀먼다. 거리는 저마다 잘난 이웃들, 인간떼들, 국회에서는 정치인들이 광장이나 역 근처에는 신을 믿으라는 신들이...sns에서는 좋아요를 누르라는 배우들, 어디를 가도 우리의 눈과 귀를 혹하게 하는 배우들은 차고 넘친다, 그들은 위인들처럼 큰소리로 공연을 하고 화려함으로 치장을 한 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들의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는 것들...그들은 우리가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적으로 불안을 만들고 당연지사인 듯 우리는 꿀통에 빠진 사람들처럼 꼼짝도 못하고 독파리떼에게 피를 빨린다. 군중은 스스로 또 다른 배우가 되고자 하고 서로가 서로의 배우이며 서로가 서로의 군중이 된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도 군중의 한 사람이었다(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한 사람의 군중은 배우가 될 수도 있고 가치를 창조하는 자도 될 수 있다.
--질문 : 짜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군중 속에서 달아나라고 외친다. 그는 독파리떼를 쫓을 필요도 없이 그들로부터 달아나라고. 그것은 자유(어린아이)를 찾기 위해서인가? 그러나 그것이 가치 창조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며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자유로워질 수 있겠으나 결국은 개인을 위해서 달아나라고 하는 것인가?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생각이 아닐까? 보들레르처럼 진흙 속에서 나를 찾을 수는 없는가. 달아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알맞은 때에 죽어라!
알맞은 때에 살지 못하는 자라면 어떻게 알맞은 때에 죽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죽음은 제전이 못되었다.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제전을 올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훌륭하게 죽는 법을 배워라
첫번째로는 죽어가는 자가 살아있는 자의 맹세를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제전은 있어서는 안 된다.
두번째로는, 훌륭한 죽음은 싸우다가 죽으며 커다란 영혼을 아낌없이 소진시키는 것이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로 오는 나의 자유로운 죽음을 나는 너희에게 권한다. 그것은 언제일까? 목적과 상속자를 가진 자는 목적과 상속자에게 알맞은 때에 죽음을 원한다.
너무나 많은 자들이 살아 있고 너무도 오랫동안 그들은 가지에 매달려 있다. 폭풍우가 와서, 이 썩은 것들 벌레 먹은 것들을 모두 남에서 흔들어 떨어뜨리기를!
--죽음은 우리 살아있는 자들에겐 영원한 화두이다. 죽음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수많은 종교가 태어나고 또 그 종교 때문에 서로 죽이고 서로 사랑하고...온갖 가식과 진실과 도덕이 난무한다.
혹자는 우리 현대인들이 불안해하고 정신질환을 앓는 것은 모두 그 죽음 때문이라고도 한다. 니체도 여기서 죽음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죽음에 알맞은 때가 있는가?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그의 답은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는데 그 삶이란 초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열매가 완전하게 익어 가장 맛있을 때 그때가 죽을 때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맛을 갖게 되지도 못하고 일찍부터 썩게 되는데 그런 삶은 비겁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죽음 속에서도 너희의 정신과 너희의 덕은 대지를 에워싼 저녁노을처럼 타올라야 한다. 라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실패한 죽음이라고...
이 말은 활활 타올라 흘러넘치며 재가 되라는 것이리라. 덕이란 몰락에의 의지이며 동경의 화살인 까닭에...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1.
얼룩소 마을에서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제자들은 짜라투스트라에게 선물을 하였다. 그것은 황금 손잡이에는 한 마리의 뱀이 태양 둘레를 휘감고 있는 장식이 있는 지팡이었다.
금에 대한 최고의 가치에 대한 가르침-금은 흔치않고, 무용한 것이며, 반짝반짝 빛나고 그 광채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시 스스로를 선사한다.
금은 오로지 최고의 덕을 나타내는 하나의 像으로서만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스스로 제물이 되고 선물이 되려는 것, 그것이 너희의 갈망이다.
육체는 역사를 헤치며 간다, 생성하며, 싸우며, 그리고 정신은—육체에게 무엇인가? 육체의 전투와 승리의 전령이며, 동반자이며, 메아리인 것이다.
너희가 칭찬과 비난을 초월하고, 너희의 의지가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서 모든 사물에 대해 명령하려 할 때, 그때야말로 너희의 덕이 비롯되는 것이다.
2.
날아 가버린 덕을, 나처럼 도로 지상으로 데려오라. 그렇다, 도로 육체의 삶으로 데려오라. 그리하여 그 덕이 대지에 의미를 주도록, 인간적인 의미를.
아,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에게서 육체가 되었다.
수천 년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수천 년간의 광기도 우리에게서 돌연히 나타난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너희의 정신과 덕이 대지의 의미를 받들기를, 그리고 모든 사물의 가치가 너희들에 의하여 새롭게 제정되기를!
3.
내 너희에게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가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그리고 보다 좋은 것으로는 짜라투스트라를 부끄러워하라. 어쩌면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학생으로만 남아 있는다면, 스승에게 그릇되게 보답하는 것이다.(청출어람)
이제 나는 너희에게, 나를 잃고서 너희 자신을 찾으라고 명한다. 그때 너희와 함께 위대한 정오를 축하하기 위해 돌아오리라
위대한 정오라는 것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노정의 한 중간에 서고 그리고 저녁을 향해 가는 자신의 길을 자신의 최고의 소망으로서 축하할 때이다. 저녁을 향해 가는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가는 길인 것이다.
<신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바란다>--이것이 언젠가는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최후의 의지가 되게 하라!
제 2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거울을 가진 아이(산중, 동굴의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 살던 중)
나는 나의 행복에 의해 상처받았었다. 모든 고뇌하는 자들은 나의 의사가 되어달라!
나의 사나운 지혜는 고독한 산상에서 배태되었고, 험한 암석 위에서 나의 지혜는 새끼를, 가장 어린 새끼를 낳았다.
이제 나의 지혜는 굳은 사막을 헤치고 미친 듯 달리면서, 부드러운 풀밭을 찾고 또 찾는다, 나의 늙은, 거친 지혜는
친구들이여, 너희의 사랑 위에 나의 지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눕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至福지복의 섬에서
신은 하나의 가정假定이다.
신은 곧은 모든 것을 휘이게 만들고 서 있는 모든 것을 어지럽게 만드는 하나의 사상이다.
창조한다는 것-그것은 괴로움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의 가벼워짐이다. 그러나 창조자가 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괴로움과 많은 변신을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또한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의 산고를 겪으려 해야 한다.
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인간에게로 몰아쳤다.
돌 속에 하나의 상像이 잠들어 있다. 나의 상들 중 한 상이! 아, 그것이 가장 딱딱하고 가장 보기 흉한 돌 속에 잠들어 있어야 하다니....이 상을 나는 완성시키려 한다.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묵묵하고 가장 가벼운 것이 일찍이 내게로 왔던 것이다.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실로 나는, 자신이 동정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자비로운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너무도 수치심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게 된 이후로, 인간은 너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의 원죄이다!
모든 큰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큰 사랑은 용서와 동정까지도 초극하는 것이다.
언젠가 악마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에게도 그의 지옥이 있으니, 그것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라고. 또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인해 신은 죽었다.>
큰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까지도-창조하려 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에 대하여
그릇된 가치와 잘못된 말의 멍에!
성직자들일 지은 저 오두막집을 보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그 동굴을 그들은 교회라고 부른다.
이 변조된 빛, 이 탁한 공기여! 여기서는 영혼이 자신의 정점까지 날아오를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말고는, 자신들의 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들은 시체로서 살려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의 시체를 검은 옷으로 둘렀다.
유덕한 자들에 대하여
덕의 행위, 덕이라 부르는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아, 나의 친구들이여! 어린아이 속에 어머니가 있듯이 행위 속에 <너희의>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이 덕에 대한 <너희의> 말이 되게 해다오.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파도가 와 아이들의 장난감을 깊은 바다속으로 잡아채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이제 울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파도가 아이들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가져다주고 그들 앞에 새로운 다채로운 빛깔의 조개들을 쏟아놓으리라.
천민에 대하여
삶은 쾌락의 샘이다. 그러나 천민도 같이 마시는 곳에서는 모든 샘물에 독이 들어간다.
나는 오랫동안, 눈멀고 귀멀고 벙어리가 된 불구자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권력의 천문, 문필의 천민, 쾌락의 천민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하여...
진실로 쾌락의 샘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나는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타란튤라에 대하여
타란튤라(영혼을 어지럽게 만드는)의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맹세한다.
동등에의 의지- 그것 자체가 이후로는 덕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가진 모든 것에 대항하여 우리의 함성을 높여라.
이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이러한 동등의 설교자들과 뒤섞이거나 뒤바뀌길 원치 않는다. 정의는 <나에겐>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동등하지 않다>고
저명한 현자들에 대하여
너희는 민중과 민중의 미신에 봉사해 왔다.
참된 자들, 자유로운 정신은 예부터 사막의 주인으로서 사막에서 살았다. 그러나 잘 먹어 살찐 저명한 현자들은 도시에서 산다-그 짐수레 끄는 짐승들은
밤 노래
춤 노래
만가
나와 내 안의 너희들과의 대화 - 노래와 춤
세상 모든 만물은 각자의 몸짓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춤이고 노래이다.
“나는 최고의 것에 대한 비유를 오직 춤으로만 얘기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위대한 비유는 나의 사지四肢 말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니체는 밤 노래, 춤 노래, 만가輓歌(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라는 3개의 챕터에서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부분들은 나와 내 안의 너희들과의 대화체로 풀어내고 있다.
어둠을 노래하고 춤을 노래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노래 만가를 부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는데 바로 만가이다..
밤은 곧 무덤이고 죽음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들을 통해 창조해내는 일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밤이어야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노래가 이제 비로소 깨어나고”
춤을 추고
죽고
“무덤이 있는 곳에만 부활이 있는 것이다.”
밤 노래 - 나와 내 안의 너희들/ 어둠과 빛
춤 노래 - 나와 내 안의 너희들/ 삶과 지혜(여자)
만가 - 나와 내 안의 너희들 /의지(권력에의 의지)
자기 초극에 관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나는> 너희의 의지를 그렇게 부른다.
살아있는 자들의 본성
첫 번째, 모든 생명 있는 자들은 복종하는 자들인 것이다
두 번째, 자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자는 명령받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명령한다는 것은 복종한다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나는 생명 있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희생, 봉사, 사랑의 시선이 있는 곳 또한 주인이 되려는 의지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악은 언제나 다시금 스스로를 초극해야만 한다. 너희의 가치와 너희의 선악에 대한 말씀으로써 너희는 위력을 행사한다. 너희, 가치 평가하는 자들이여, 그리고 그것이 너희의 숨겨진 사랑이며, 너희의 영혼의 반짝임이며 떨림이며 넘쳐흐름이다.
너희의 가치로부터 보다 강한 힘과 새로운 초극이 자라나오고 그것에 의해 알과 알 껍질이 깨진다.
고고한 사람들에 대하여
친구들이여 너희는 내게 말하는가, 맛과 맛보기를 둘러싸고는 싸울 게 없다고? 그러나 모든 삶은 맛과 맛보기를 둘러싼 싸움이다!
맛, 그것은 저울추이며 동시에 저울대이고 계량자이다.
고고한 자, 그가 자신의 고고함에 지칠 때 그때, 비로소 그의 아름다움이 솟아오르리라.
권력이 공손해져 가시적인 것으로 하락할 때, 나는 그러한 하락을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속물 교양)
진실로 너희는 너희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 없으리라.
온몸에 과거의 기호로 잔뜩 써놓고 그 기호들 위에 새로운 기호로 덕지덕지 칠을 하고, 이렇게 하여 너희는 모든 기호 해독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잘 숨겨놓았던 것이다.
너희가 어찌 신앙을 가질수 있겠는가, 너희 잡다한 색깔로 얼룩진 자들이여! 너희는 이전에 신앙되었던 모든 것들을 모사한 채색화일 뿐이다.
결백한 인식에 대하여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소리 내어 말한다.
고양이는 바닥 위로 몰래 지나가버린다. 보라, 달(남자)은 고양이처럼 그리고 정직하지 못하게 다가온다.
<순수한 인식자-달이며 남자>들에게 너희를 나는 음탕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너희들은 펑퍼짐하게 배가 불러 지평선 위에 떠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결코 낳지 못하리라. 그것이 너희의 저주가 되리라. 너희 결백한 자들이여ㅡ 너희 순수 인식자들이여(달)- 음탕한자를 비꼬는 말)
결백한 인식이란- 내 자신이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울처럼 만물 앞에 누워있는 것 말고는 내가 만물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순수함은 어디에 있는가- 생식에의 의지가 있는 곳에, 그리고 내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고자 하는 자가 가장 순수한 의지를 가진 자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 나의 모든 의지로 <하고자 하지 않을 수 없는>곳에, 하나의 상像 다만 하나의 상으로 머물지 않도록 내가 사랑하며 몰락하고자 하는 곳에.
학자들에 대하여
나는 학자들의 위엄과 존엄 위에서 자느니 차라리 소가죽 위에서 자고 싶다.
학자들은 차가운 그늘 속에서 차갑게 앉아 있다.
그들의 지혜에선 종종 냄새가 풍긴다.
나는 여전히 그들 위에,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있으리라,
왜냐면 인간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의는 말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바를 <그들은> 원하지 못하리라!
시인에 대하여
누군가 아주 심각하게 시인들이란 너무 지나치게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한다면, 그의 말은 옳다-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바도 별로 없거니와, 배우는 데에도 시원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늘 <위에선>특히 그러하다. 모든 신들은 시인들의 비유이며 시인들의 궤변이니까 말이다!
실로 그 비유의 궤변은 우리를 위로 끌어 올린다-말하자면, 구름 나라로, 우리는 그 구름들 위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우리의 헛 껍데기를 앉혀놓고, 그리고서는 그것을 시이며 초인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그 모든 신들과 초인들은, 그 자리에 앉혀 놓기 딱 알맞게 가벼운 것이다.
진실로, 시인들의 정신 자체가 공작 중의 공작이며 허영의 바다인 것이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내가 보았던 수수께끼와 가장 고독한 자의 환영 그것은
위로 위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또 다른 나이다
중력의 영靈이라 부르는
반 난장이 반 두더지인데다가 절름발이인 사상, 그것은 개이며 목자이기도 하다.
그 미로 속에서
그 지혜의 돌을 던지고 또 던졌지만 중력으로 인해 그것은 자기에게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에겐 용기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 용기는 가장 훌륭한 살해자이다, 난장이도 살해하고 심연의 현기증도 살해하고 죽음까지도 살해하는
그 용기는 <그게> 삶인가? 묻게 되고 다시 한 번! 이라고 말하는 용기인 것이다.
그렇게 초극을 하게 되고 몸이 가벼워지며 난장이(장애)가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영원회귀
그곳에 출입구가 있었다.
출입구-두 개의 얼굴, 두 개의 길이 여기에서 합쳐지는
되돌아가는 기인 길-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나아가는 기인 길-그것은 또 하나의 영원이다
이들은 서로 모순된다. 이 두 길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이 두 길이 함께 만나는 것은 여기 이 출입구에서이다.
이 출입구의 이름이 <순간>이다.
이 순간이라는 출입구로부터 하나의 기나긴 영원한 길이 뒤로 달린다. 우리 뒤에 한 영원이 놓여있다.
모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이미 언젠가 일어나고 행해지고 달려 지나가버렸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면, 난장이여 너는 이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출입구 또한 이미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사물들은, 이 순간이 장차 올 모든 것들을 뒤에 끌고 오게 되도록 서로 단단하게 매듭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끌고 오게 되도록?
달빛 속에 기어다니는 이 느린 거미, 달빛 자체, 그리고 함께 속삭이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 속삭이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 속삭이는 출입구에서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회귀하고, 저 다른 길을 앞으로 달려가고-우리는 영원히 회귀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수수께끼를 즐거워하는 자들이며 목자...또한 또 다른 나이며 내 절규(의지)로써 헤쳐나가...
더 이상 목자도 아닌, 인간도 아닌-변신한자, 빛에 둘러싸인 자, 그(나)가 <웃었다>
중력中力의 영靈에 대하여
중력의 영이란 날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말한다.
중력을 떨치고 날아가는 법을 배워라
1. 무거운 것들의 예)
1) 이웃사랑은 기만과 위선이다.
오히려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술들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가장 노회하고 가장 참을성 있는 기술인 것이다.
2) 인간은 너무 많은 것-다른 사람의 무거운 말씀과 가치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 것인 많은 것-들을 자기 어깨에 메고 힘겹게 나가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사막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날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사랑하라.
나와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고집 세고 까다로운 혀와 위장을 나는 존경한다.
순진한 것들로, 그리고 얼마 안 되는 것들로 양분을 섭취하고서 날아갈, 날아가 버릴 태세로 조바심하는 그것이 지금 나의 본성이다. (새의 본성)
그리고 가벼워지고 싶고 새가 되고 싶은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기다리는 법은 다른 게 아닌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데에 써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서고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올라가고 춤추는 법을 배웠다.
이와 같이 갖가지 길과 갖가지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실에 이르렀다.
나는 마지못해 길을 물었을 뿐이다. 차라리 나는 길 자신에게 물어보았고 그 자체를 시도해 보았다.
나의 나아감 전체가 하나의 시도였으며 하나의 물음이었다. 그리고 물음에 답하는 것조차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러나 누군가 너희의 길은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 다면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 스스로 질문을 찾고 답을 찾아 걷고 달리고 날고 춤추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리라. 위의 예를 든 것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