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튤립
바람의 기침 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곳
빛도 어둠도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꽃밭
채도와 명도가 너무 선명해 눈길을 주고 싶은 꽃
어떤 외압도 비굴도 용납하지 않겠다며
직립만 고집하는 꽃대
실패와 패배가 번갈아 찾아오는 날엔
꽃에게 위로를 받는다
봄날의 햇살과 대광해변의 청순한 바람이
불모지가 아니어서 좋다
꽃은 오늘도 번식의 꿈을 꾸고 있는지 몰라
오늘 봤던 그 꽃이 울고 있던 나를 기억할지도 몰라
사람은 사람이어서 좋고 꽃은 꽃이어서 좋고…
향기가 없어도 멀리 갈 수 있어
실연, 아픔이라는 꽃말
내 안에서 이미 만개했으니까
2 튤립
알뿌리에 생각을 은닉하면
바람의 참견쯤이야,
달의 몰락이
언 땅 위에 내려앉는다 해도
바람을 먹고
햇볕을 먹고
봄의 슬하가 되려고
심장을 데피고 있을 테야
흙의 피붙이의 근성을 알고 있다면
당신도 간절기쯤이야,
꽃샘
봄샘
마음샘
그리고 당신샘
시샘하는 것들 모두 등 뒤에 남을 거야
3 튤립
음표로 표현한다면 아다지오다
꽃들의 감성이 건반 위에서
싱싱하게 피어오른다
색색의 건반을 누르는 건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동자
오늘의 주제곡은 화해다
일렬종대로 호명 당하고 싶은 표정들
뭔 꽃이라요?
물어도 대답 없는 아버지는
깊은 도를 눌렀을 거다
참말로 오지게 이쁘요
화색이 도는 어머니는 솔을 눌렀을 거다
베토벤의 운명은 몰라도
운명 따라 모질게
팔순 근처까지 왔으니 고마웠을까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는다
누군가는 결말이라고 하겠지만
이건 절정이다
때마침 노을이 깔린다
손을 빼지 않는 어머니나
남사스러운 꽃들
그 부끄러움이
황홀 속으로 침몰한다
4 튤립
바람이 흔들어도 미동도 없다
사람들은 꽃들의 시간을 훔친다
훔친 시간이 사람들 주머니에 있다고 꽃들은 믿는다
꽃 같은 꽃처럼 꽃다운으로 바뀌고 있을 거라고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꽃들의 안색이 대담하다
보라색은 보라색대로
붉은색은 붉은색대로
요염하지 않아서 좋다
훔쳐도 훔쳐도 줄어들지 않는
꽃의 본색
꽃의 치사량은 무죄다
5 튤립
아마 지금쯤 무지개 꿈을 꾸고 있을지 몰라
어느 행성에서 길을 떠나와 막 도착한 기분
언 땅이 파실파실 흩어지고 있을 때
요정처럼 짠하고 나타날지도 몰라
세포가 마구마구 분열을 일으키면
결국 스파크는 터지는 거야
줄탁동시
스스로 부리로 찍어대는 거야
촉은 닿을 촉인 동시에
봄 밝힐 촉인 거야
이제 튤립, 하고 속삭이기만 하면 돼
이미 당신도 직전이야
프로필 : 박선우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이후 시집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 『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섬의 오디세이』를 발간했다. (2010)년 제주기독문학상을 수상했고 (2019)년 전북문인협회주관 해양문학상을 수상했고 (2019)년 목포문인협회주관 목포문학상 남도작가상을 수상했고 (2020)년 계간 열린시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 『섬의 오디세이』 시집이 아르코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23)년 전국계간지 우수 작품상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