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맺음말
정사 배삼익과 서장관 원사안이 중심이 된 진사사(陳謝使) 일행은 선조 20년(1587년) 3월 13일에 서울를 출발하여 그해 가을 9월 13일에 돌아와 선조 임금에게 사행 임무 완수를 보고했다. 본래 앞 사신단인 동지사 성수익과 하절사 윤자신이 방물을 도둑맞고 회동관에 불을 낸 사건에 대해 사죄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단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건 명분은 진사사였지만, 실제로 배삼익 일행은 명나라 조정에서 종계변무를 위해 진력했다. 이들은 명나라 예부에 두 차례 정문을 올리고 관계 부처 및 요로의 인물들과 접촉하여 종계변무 해결에 망외(望外)의 성과를 올렸다. 이들의 노력으로 당시 명나라 신종 황제는 칙유를 내려 조선 태조의 종계가 들어있는 《대명회전》 개정판 정고를 등서하여 갈 수 있게 허락하고, 이후 책을 반포하는 날 명나라 사신에게 그 책을 조선으로 싣고 가서 먼저 알리겠다고 허락했다.
실제로 명나라에서는 선조 20년(1587) 조선 주청사 유홍(俞泓)에게 《대명회전》 개정판 중에서 〈조선국〉 항목이 포함된 1책(冊)을 가져가게 했으며, 이어서 선조 22년(1589년)에는 성절사 윤근수(尹根壽)에게 《대명회전》 개정판 전질을 가져가게 했다. 이로써 거의 200년에 걸친 종계변무 외교 현안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배삼익의 《조천록》 일기에는 그가 종계변무 해결을 위해 애쓴 자료가 담겨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배삼익은 그의 사행 과정에서 발생한 방물 도난 사건 때문에 선조 23년(1590년) 종계변무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책봉한 광국 공신 명단에 들지 못했다. 당시 배삼익이 대동한 노비 양승개가 도적 이산과 공모하여 방물을 도적질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에 이미 세상을 떠난 배삼익에게 삭탈관직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선조 27년(1594년) 배삼익의 아들 배용길이 〈신원소〉를 올려 부친의 복관작 처분은 받아냈지만, 공신 책봉 처분은 허락받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해결하지 못하여 결국 그의 가문에서 배삼익이 사행 활동을 하며 종계 변무를 위해 노력한 자료를 모아 일제강점기에 《임연재선생조천록臨淵齋先生朝天錄》을 2권 1책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배삼익이 남긴 사행시는 모두 113제 134수로 확인되며, 거의 모든 한시 형식을 포괄하고 있다. 특히 그는 송나라 강서시파 3종의 하나인 진여의 시에 차운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는 그가 중국 시인 중에서 진여의를 애호한 결과로 추정된다. 진여의는 강서 시파 중에서도 특히 당시의 운미(韻味)를 느끼게 하는 자연스럽고 진솔한 감정을 자신의 시작 특성으로 삼았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진여의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두보를 배우기에 힘썼다. 배삼익의 사행시에도 당시의 자연스러운 풍격과 송시의 세밀한 이치가 잘 어우러져 있다.
《국역 배삼익 조천록》 p32 ~ 33,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