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기운으로
/ 요한복음 20장 19-21절
샬롬! 부활
축하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아름다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의 은유적 고백입니다.
1990년대 감리교에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감리교를 대표하는
두 신학자 변선환 홍정수 교수님이 교단으로부터 출교(OUT)되셨습니다.
한 분은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분은 포스트모던 사상을 가르친다는
이유였습니다.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는 괘심죄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부흥사들의 말을 안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선환 교수님은 생애 말년에 불교와의 대화를 많이 시도하셨고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무제약적이고 무차별적인 사랑 이것은 붓다의 자비와도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이 곧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하시면서 종교간의 상생과 평화와 서로 배우고 함께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정수 교수님은 기독교를 광주 망월동 기독교와 동작동 기독교로 구분하시면서 결국은 역사에서 옳은 일을 위해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역사속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이 옳았음을 증언하는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임을 고백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그의 삶이 옳았고 그래서 그가 죽음과 함께 역사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옳았음을 증언하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사건이
부활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간의 상생과 평화를 지향하며 이시대
성서의 문자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예수의 삶과 그의 고뇌와 영혼있는 사랑의 부활을 꿈꾸며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동녘교회는 / 아니 동녘교회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당시 종교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시대의 종교적 담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부활의 증거입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했던 일들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역사속에서 죽임의 세력은 그를 역사 밖으로 몰아냈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계시고 여전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람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이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실의에 빠져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 길을 가던 중 말씀을
나누고 초청해서 떡을 떼고 빵을 나누면서 뭔가 뜨거움을 경험하고 그안에서 비로소 눈이 뜨이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닯아 하면서 그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우리 삶의 더 깊은 곳을 향해 그물질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새날을 도모했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몸은 없지만 초대교회 공동체는 삶의 곳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이전보다 더 강열하게 느낀겁니다.
뉴욕 맨해튼에 있던 리버사이드 교회를 가보았습니다. 사업가 존 록펠러가 지은 교회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한지, 교회 구석 구석 얼마나 화려하고 현란한지 모릅니다. 교회
내부에 들어가면 서양의 전통적인 고딕양식의 건축물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리버사이드
교회는요, 관광객들에게 그 건축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1964년에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이 이곳에서 행해집니다. 그곳을 방문했더니 입구에서부터
교회안으로 들어가는 곳까지 그 연설을 했던 때의 사진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느낀 게
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 현란한 양식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 교회가 아직 교회일 수 있는 건 건물이 아닙니다. 그 정신 때문입니다.
바로 그옆에 유니온 신학교가 있어요. 유니온 신학교는 진보신학교를 대표하는 학교입니다. 폴틸리히,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로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 폴니터(변선환 학장님의 스승), 본회퍼,
70-80년대 남미의 해방신학의 담론(지금으로 따지면 페미니즘격의 사상적 담론을 이끌어갔던)을 이끌었던 진보신학교입니다. 저는 굉장히 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건물 딱 하나 있어요. 그 작은 신학교가 한 세기의 진보적
신학의 담론을 이끌었어요.
여러분! 이
계란이 부화할까요? 백날 첫날을 품고 있어도 부화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죠?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건, 권력은 그분을 죽였고 역사 밖으로 추방했지만 그의 삶이 시대와 역사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상상력을 주고 삶의 곳곳에서 시대의 양심으로, 진리의 화신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건 그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과
진정성이 없는 곳에 부활은 없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높고 화려하고 수 없이 많은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고
장식해도 존엄을 잃어버린 생명은 삶이 허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픔 없이 피는 꽃은 없다. 모진 겨울 지나서야 피어난다
돌덩이 땅바닥을 위대로이 헤쳐 나와
연하디 연한 꽃잎
펼쳐 곱디 고운 색으로 물들인다
꽃이 아름다운 건
지독히 슬펐던 지난 겨울을 온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사한 낯 빛으로 나비와 벌에 온 몸을 맡긴다.
사람들은 그 아픔 모른채 색만 곱다 한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진 겨울 속에서도 지독하게 슬펐던, 힘들었던 그 순간에도
우주를 품은 생명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아름다운 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겨울에 모든 것이 죽은 듯 사라지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건 새롭게 대지의 봄으로 부활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와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길러낸 평화의 기운으로
삶의 곳곳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힘차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