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은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127*193,
■ 책소개
라디오 드라마와 음악극 등의 대본작가로, 수필가로, 글쓰기 강사로 활약해온 작가 이경은의 독서 에세이. 살아온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이어져온, 읽고 쓰는 일의 다양한 순간들을 포착해 앨범처럼 엮은 책.
불빛이 새나갈 새라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책을 읽던 어린 시절부터 창 넓은 카페에서 원고를 다듬으며 창밖의 세상과 악수하는 자신을 유리창에 비춰보는 지금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녀 영혼의 네모난 창문이었던 책과 함께한 시간의 풍경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숨가쁘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중단 없이 걸어온 읽고 쓰는 삶의 여정 속 보석같은 순간들을 나누려는 그녀의 지극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작가 이경은
수필가. 27년째 글을 쓴다.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에 이어 2023년 제16회 한국문학백년상을 수상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에세이, 포토에세이, 라디오드라마, 극본과 연재물을 쓰고 있다. 수필가, 방송작가, 극작가, 웹진 에디터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그저 글 쓰며 사는 사람일 뿐이다.
인생에 결핍의 시기가 있어 책에 집착하는 습이 붙었다. 삶에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책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당장은 읽지 않을 책도 무모하게 사들이곤 하지만 결국엔 다 읽고 내 생각을 글로 남긴다. 무언가에 매혹된 가슴과 그것을 붙잡으려는 손끝에서 언어가 부풀어오르는 과정을 즐긴다.
아홉 번째 책을 쓰고 있다. 사람과 무대가 함께하는 소통과 축제의 책을 쓰려고 한다. 새 책이 도착할 날을 향해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 출판사 서평
책이라는 창을 통해 내내 바깥을 내다보았으나
읽은 것은 결국 내 마음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많은 부분 책과 그림,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여정은 잔잔하지만 뜨겁고, 험난하지만 아름다우며, 형이상학적인 듯하지만 일상과 밀착되어 있다. 어느 날 문득 세상에 던져져 경험한 세상을 '나'라는 프리즘을 통해 통과하여 새로운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삶이다. 자신이 읽은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창조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바쁘게,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상을, 이경은 작가는 자꾸 붙잡는다. 난 이제 틀렸어, 하고 주저앉지 않고, 나랑은 상관없는 세상이라며 외면하지도 않고, 계속 들여다보고 말 걸고 대화를 시도하며 사귀려 노력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미술과 음악을 즐기고, 후배들과 부지런히 소통하며, 무엇보다 무식하게, 책을 읽는다. 작가 이경은의 책 읽기는 일상이다. 누군가 슬쩍 알려준 낱말 하나를 디딤돌 삼아 낯선 세계로 건너가고, 여행길의 방문지에서 알게 된 작가의 전집을 무턱대고 사들이는가 하면, 남의 하소연을 듣다가도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려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간다. 은퇴한 남편이 취미로 하는 사진에 단상을 붙여 두터운 포토에세이집을 만들어내고 서점을 찾아다니며 책이 이어준 인연과 수다를 떤다. 세계관에 대한 폭넓은 탐구는 그녀를 과학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과학자의 실패담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과학자의 문장에 심취하며 추상적인 관념으로 가득찬 자신의 머릿속을 물리적인 사실과 과학적 증명의 공기로 환기시킨다.
늘 새로운 콘텐츠를 발견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가의 힘이 오롯이 담긴 이 책은 항상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실천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무한대의 긍정성이다.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세상이 어떤 험악한 모습을 보이든 자신의 공간을 깊고 넒은 앎에의 추구와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의 수없는 반복으로 채워넣는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일상의 모든 순간을 예술적 경험으로 승화하려는 자기만의 방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조각조각 나누어주려는 그녀의 지극한 나눔은 독자에게 책 읽는 순간의 행복을 선물처럼 건네줄 것이다.
■ 책 속으로
내 방의 문에는 작은 유리창이 끼어 있었는데 불빛을 가리느라 늘 까만 천을 대었다. 그 조그만 네모 유리창은 책의 세계로 가는 비밀의 문이었고, 새어나갈까 두려워했던 불빛은 내 영혼의 타오르는 심지였을 테지만 그때는 작가를 꿈꿔서라기보다는 그저 책 읽는 게 좋았다. -6쪽
톰 골드의 말처럼 인간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할 때에만 제 존재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때론 책 속에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현실에까지 뛰쳐나와 사랑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그냥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으며 웃었으면, 빵 냄새가 폴폴 나는 그런 따스한 오후였으면….
하루쯤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아름답고 행복한 오후’여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을 텐데. 그렇지 않나. -93쪽
또 잡힌다. 결국 잡히고 만다. 말뚝처럼 콱 꽂혀버린다. 겨우 한 줄의 문장에, 푹 빠진다. 두 줄도 아닌 한 줄에 온통 정신이 나간다. 문장의 막강한 힘에 나는 맥이 풀리고 만다. 내 심장은 아마 힘들 것이다. 주인장이 잘 놀라고, 저리 절망하고, 미친 듯 행복하니 불행하니 탄식하고, 잘 생긴 문장 하나 보고도 이렇게 난리를 치니 참 귀찮고 유난스런 존재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오늘, 저 한 문장에 몸을 떤다. -105쪽
글을 쓰다가 잠시 쉬느라 쳐다봤던 그 창들. 창은 생각을 펼치기도 하고 모아주기도, 숨을 쉬게도 하고 마음을 멀리 데리고 가기도 했다. 가끔 창밖의 세상이 창 안의 세상으로 들어와 악수를 하며 웃어주었다. 창은 길이다. -145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 잠 못 자고 읽은 책과 마음으로 글을 되새김질한 시간 속에서 문장이 새로이 생겨난다. 결핍된 문장이 채워지고 지운 문장이 되살아난다. 어둠 속에 두고 물만 주면 자라는 콩나물처럼 문장은 우리의 생각을 먹고 자란다. 술이 익듯이 성숙해지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우리 머릿속, 허공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이나, 종이나 화면 위 톡톡거리는 손가락 아래에서. 아니 우리 영혼 안에서. - 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