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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학(천주교)의 전래
가. 천주교와 서학의 전래
17세기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들을 통해서 서양문물과 서적 등이 전래되었다. 광해군때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했고 소현세자가 천주교 서적을 갖고 귁구했다. 처음에는 학문적 대상으로서 서학이 들어와서 18세기 이후 종교로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정조 7년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고 권철신, 이벽, 정약용 등의 남인계역 학자들과 중인, 상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퍼져갔다.
나,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
정조는 남인 채제공이 요직에 있었고 천주교에 대하여 방관적 자세를 유지했고 불교나 도교같이 엄격히 금지하지 않았다.
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
천주교가 유교윤리를 혼란케 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정조때 소외된 노론 벽파는 천주교 박해를 통해서 남인, 소론, 노론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공세를 위한 수단으로 박해를 하거나 농민항쟁에 대한 경고 목적으로 가혹한 박해를 하였다.
한국 천주교 박해
경신박해(庚申迫害) - 1860년
추조적발사건 | 정조 9년 1785년 | 중인 출신 김범우 집에서 미사를 보다가 발각되었다. |
신해박해(辛亥迫害) | 정조 15년 1791년 |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 신해사옥 ・진산사건(珍山事件).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윤치중의 外弟)이 윤지충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자, 권상연 등이 호남 출신이라는 데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또 공맹(孔孟)의 유교 ・유학을 숭봉하여야 할 사림(士林)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치와 제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것이 큰 문제로 제기되어 논쟁이 벌어졌으며, 그 신도들의 대부분이 당시 집권파였던 남인(南人) 계통에 속하였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번져가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 채제공(蔡濟恭))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 홍의호(洪義浩) ・홍낙안(洪樂安))로 대립하게 되었다. |
을묘박해(乙卯迫害) | 정조 19년 1795년 |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역관 최인길(崔仁吉), 주신부를 모셔온 지황(池璜)과 윤유일(尹有一)도 체포하여 국문 옥사 |
신유박해(辛酉迫害) | 순조 1년 1801년 |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으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 |
을해박해(乙亥迫害) | 순조 15년 1815년 |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종결된 후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돤 후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박해 |
정해박해(丁亥迫害,) | 순조 27년1827년 | 1827년(丁亥年) 전라도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전라도 지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지역에 일어난 박해. |
기해박해(己亥迫害) | 헌종 5년 1839년 |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도 참형에 처하였다. |
경신박해(庚申迫害) | 철종 11년 1860년 |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
병인박해(丙寅迫害) | 고종1년 1864년 | 병인박해 丙寅迫害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사건의 원인(遠因)은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롤 탄압하기로 결심하고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베르누Berneux), 푸르투니에르, 도리, 성 다불뤼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루가, 오페트르 오 qpemf 등)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화를 면한 3명(Ridel, 페롱, 칼레)중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
4. 동학(東學)의 창시
가. 창시
철종 19년 1860년 경주 잔반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시 서학(西學)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동학으로 명칭・창시
나. 교리
⑴ 교리 : 유불선(儒佛仙) 3교의의 장점, 일부 천주교의 교리 및 민간의 무술신앙(巫術信仰), 시천주(侍天主) 및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결합
①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간평등사상).
② 시천주(侍天主) : 한울임을 모시는 것
⑵. 성격 : 현실구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① 인내천(人乃天) : 인간평등사상
② 주술(呪術) :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불로장생(不老長生)
⑶. 시천주(侍天主) 및 궁궁을을(弓弓乙乙) 부적(符籍) 휴대
다. 경전과 포교집
경전 | 서술 | 대상 | 내용 |
동경대전(東經大全) | 한문 | 잔반 | 경전. 인내천의 윤리사상 |
용담유사(龍潭遺詞) | 한글 | 일반국민 | 포교가사집. 현실구복적 성격 |
라. 발전 및 확산
⑴. 인내천, 보국안민(輔國安民), 천지개벽(天地開闢) 사상으로 사회적 계급을 초월하는 인간평등의 사상과 주문외고 산제(山祭)를 지내는 농민들의 전토적인 무술신앙과 상통하여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⑵. 최제우 처형
조정에서 동학의 유행을 위험하게 여겨 최제우를 사람을 미혹하여 어지럽히는 자라 하여 철종 14년 1863년 체포하여 다음해 1864년 대구에서 처형하였다.
⑶ 포접(包接) 교단 및 교도동원 조직
1대 교주 최제우 처형후 2세 교주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에 의해 교세를 확장하고 교단을 조직하였다.
① 접(接) :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어 대접주・도접주・수접주・접주 등의 직책을 둔 교단조직
② 포(包) : 대접주를 포주로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고 교장(敎長)ㆍ교수(敎授)ㆍ교집(敎執)ㆍ교강(敎綱)ㆍ대중(大中)ㆍ중정(中正) 6가지 사무를 분장(分掌, 六任制)하였다. 이밖에 동몽육임제(童蒙六任制)와 편의장제(便義長制), 도찰제(都察制), 교령제(敎領制)가 있었다.
⑷ 육임제(六任制)
① 교장(敎長) : 알차고 덕망 있는 사람은 교장
② 교수(敎授) : 성심 수도하여 가르칠 사람
③ 교집(敎執) :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
④ 교강(敎綱) ;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
⑤ 대중(大中) :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
⑥ 중정(中正) :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ㆍ
천도교서에는 1884년 10월 24일에 공주 가섭사(迦葉寺)에서 강서(降書)로 육임제를 구상하여 육임직을 임명하고 육임소를 설치한 것은 1887년 6월 중순경에 보은 장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5. 19세기 농민 항쟁
가. 농민항쟁의 배경
⑴ 삼정문란으로 인한 농민 부담 가중 ⑵ 농민들의 정치 참여 욕구 증대
나. 농민항재의 전개
⑴ 소극적 저항 : 관아에 시정요구하거나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벽서를 붙이거나 조세납부거부 dsn동을 전개했다.
⑵ 적극적 저항운동 :
① 홍경래 난(1811.12.18~1812.4.23)
순조 11년 1811년 서북인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사용, 홍총각 등 잔반과 광부, 영세농민, 중소상인 참여하여 거병하여 가산동 다복동에서 시작하여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 9읍 점령했으나 정부군의 반격으로 정주성에서 패하여 4월만에 진압되었다.
② 진주농민항쟁(배건당의 난)
철종 13년 1862년 경상우병사 백낙신(白樂莘)과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의 탐학이 원인이 되어 잔반 향임 류계춘(柳繼春), 이계열 등 을 중심으로 머리에 흰두건을 쓰고 초군(樵軍)이라고 부르면서 죽창(竹槍)과 곤봉(棍棒) 등의 무기를 들고 항쟁을 일으켜 수령, 향리, 지주, 고리대금업자를 공격하고 방화와 파괴를 감행하였다. 비록 민란은 진압되었지만 40일만에 익산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농민항쟁운동이 전국적으로 72개로 확산되게 되었고 제주어민반란(1862~1863)도 일어나게 되었다.
다. 의의
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정부 농민 부담 완화 조치
⑵ 농민의식 성장
⑶ 양반중심 사회체제 붕괴하는 요인
⑷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으로 연계
4. 천도교(天道敎)의 발전과 분리
가. 진보회(進步會, 1904년) :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나. 천도교(天道敎) 개명 1905. 12. 1
다. 일진회(一進會, 1904년 8월~1910년 9월) : 이용구(李容九). 일한국사령부 통역 손병준(宋秉畯)
1904.08.18. 유신회(윤시병(尹始炳, 유신회장→일진회장) 조직하여 1904.08.20. 일진회로 개칭. 1904.12.02. 일진회와 진보회 합동.1905.11.06. ‘일진회선언서’ 발표. 1906.12.13. 시천교 창립. 1909.12.04. ‘합방청원서’ 발표. 1910.09.12. 해산.
주요 인물은 윤시병(尹始炳, 유신회장→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부회장 유학주(兪鶴柱) 윤길병(尹吉炳) 홍긍섭(洪肯燮) 김택현(金澤鉉) 총재 송병준(宋秉晙), 13부총회장(일명 十三道地方總會長) 이용구, 지방총장 송병준
라. 시천교(侍天敎) : 1906. 12.13 이용구, 김연국(金演局)이 분리 조직
동학농민운동과 갑오 을미 광무 개혁
1860년 경주 잔반 최제우(崔濟愚), 경주에서 동학(東學) 창시.
1863년 동학 교조 최제우 체포
1864년 최제우 대구에서 처형
1892년 동학교도 제1차 10월 충남 공주에서 서인주 등 남접이, 11월 전북 삼례에서 최시형 등 수청 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공주삼례집회) : 죽은 최제우의 누명을 벗겨 달라는 교조 신원의 복위와 동학 교도의 탄압 중지, 탐관오리의 제거 등을 호소하였으나 실패
1893년 2월 제2차 교조신원운동(서울 광화문 伏閤上疏) : 朴光鎬를 소두(疏頭)로 손병의 손천민 등 40여명의 간부가 서울 궁궐에 모여 교조 신원에 대한 복합상소
1993년 3월 제3차 교조신원운동(보은집회) : 동학교도 2만여 명 충청도 보은군(報恩郡) 장내(帳內)에 모여 척왜척양(斥倭斥洋) 창의(倡儀)의 기치 아래 농성시위 계속.
1893년 11월 동학교도 사발통문(沙鉢通文)
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② 군기창과 화약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아유(阿諛:아첨)하여 인민을 침어(侵漁)한 탐리(貪吏)를 격징(擊懲)할 것,
④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直向)할 것
① 고부성을 점령하여 趙秉甲을 목베어 죽일 것
② 군기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침탈한 貪吏를 업하게 징벌할 것]
④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
1894년 1월 10일 고부민란(古阜民亂) : 全琫準, 최경선, 정익서, 김도삼의 지휘 아래 고부군청 점령하여 조병갑 축출, 무기탈취, 불법징수한 곡식 빈민에게 분배, 만석보(萬石洑) 파괴
1894년 3월 2일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 파견, 고부농민 탄압
1894. 3.13 농민군 해산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 고부 백산(무장 기포지) 제1차 봉기(1894.3~5. 全琫準, 金開男, 孫華中 중심).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농민에게 창의문 산포하고 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
茂長東學倡義文(무장동학창의문, 倡義文, 의병으로 일어날 것을 널리 호소하는 글)
사람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데 가장 귀중한 것은 그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는 인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뒤에라야만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끝이 없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사랑하시며, 정신이 밝고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일 현량(賢良)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堯舜)의 교화(敎化)와 문경(文景)의 정치를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우고 갖은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되게 간하는 선비를 가리켜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고 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만이 많아서, 인민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해 가고 있다.
집에 들어가서는 삶을 즐길 만한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몸뚱이를 보호할 방책이 없다. 사나운 정치가 날로 번져서 원망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지고 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다 무너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퍼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다.
공경(公卿)이하로 방백(方伯),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운 것을 생각지 않고 한갓 제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고, 과거 보는 곳을 돈 주고 바꾸는 저자(市)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허다하게 생기는 뇌물은 나라의 창고로는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삿집에 가득 채워진다. 나라에 쌓이고 쌓인 채무가 있는데도 이것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아 하나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는다.
온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으니, 수재(守宰)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시골집을 건축하여 오직 혼자만 온전하려고 방책에 힘쓰면서 한갓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임금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살고 있으니, 앉아서 위태로워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 창생(億兆蒼生)이 의논을 모아 이제 의기(義氣)를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는 바이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하여 다 함께 승평(昇平 )한 일월(日月)을 빌고, 모두다 성상의 덕화(德化)를 바랐으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1894. 3. 20)
1894. 3 23. 호남창의소
1894. 3.25 백산대회 4대 행동강령
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하였다
1894. 4.7. 황토현(黃土峴) 전투에서 감영군 승리
1894. 4.23.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洪啓薰(홍계훈) 경군에 승리
1894. 4.27 전주성 점령
1894. 4.29 청에 출병 요청
1894. 5.5 청군 葉志超 3000명 아산만 상륙 : 천진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통고
1894. 5.6 일본군 군함 7척, 육군 7000명 인천상륙
1894. 5. 8 전주화약체결 : 전라도 53곳에 執綱所 설치(총본부 大都所, 都執綱 安熹玉).
집강소에 집강, 성찰, 동몽, 진사, 서기 등을 주어 읍정을 처리하였다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2개항 : 전봉준이 1894년 6월의 전주화약(全州和約) 때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폐정개혁에 대한 조목.
① 전운사(轉運司)는 혁파하고 (공물을) 이전대호 읍에서 상납하게 할 것
② 균전어사(均田御史)는 혁파할 것
③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징계하고 축출할 것
④ 각 읍에서 공금을 포탈(逋脫)한 이속(吏屬) 중 포탈액이 천냥인 자는 죽이되 그 가족은 징계치 말 것
⑤ 봄・가을 두 차례에 부과하는 호역전(戶役田)은 고거의 에에 따라 매호 한냥씩 배당할 것
⑥ 각종의 결전(結田)으로 거두는 돈은 공평(公平)・균등(均等)하게 분배하고 함부로 많이 거두지 못하게 할 것
⑦ 각 포구(浦口)에서 사사로이 쌀을 파고 파는 것을 엄금할 것
⑧ 각 읍 수령들이 자기 임지에 있는 산에다 묘(墓)를 쓰거나 전장(田莊)을 사는 것을 엄금할 것. 전장(田莊) : 논과 밭. 장토(莊土)
⑨ 외국 상인들은 각 항구에서 매매를 하되 도성(都城)에 들어가 상점을 설치하거나 각처에 임의로 다니며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할 것
⑩ 행상(行商)・보부상(褓負商)들은 폐단이 많으니 혁파할 것
⑪ 각 읍에서 이속(吏屬)들이 부서 배치를 할 때 뇌물(賂物)을 받지 말고 쓸만한 사람을 택하여 임용할 것
⑫ 간신(奸臣)이 권세를 농간(弄奸)하여 나라의 일이 나날이 잘못되고 있으니 그들의 매관(賣官)하는 일을 징치(懲治)할 것
⑬ 대원군(大院君)이 국정에 관여하는 것이 민심이 바라보는 것임
징치(懲治) : 징계하여 다스림
① 종래 동학교도와 정부 사이에 있던 혐오감을 씻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해 모두 엄벌에 처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벌에 처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계할 것
⑤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릴 것
⑥ 모든 천인들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양립(平壤笠)을 없앨 것
⑦ 젊은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⑧ 규정 이외의 잡세는 없앨 것
⑨ 관리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와 몰래 내통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
⑪ 공사채를 불문하고 이전의 빚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여 경작하도록 할 것 등이다.
1894. 6.1 일본 내정개혁안을 제시하며 내정개혁 요구(老人亭會談)
1894. 6. 11 정부 校正廳 설치하여 일본 요구 거절
1894. 6. 21 일본군 경복궁 습격하여 대원군 내세워 민씨정권 축출
1894. 6. 23 일군 아산만 풍도에서 청군 공격, 청일전쟁 발발(~1895.4.17 시모노세끼(下關)조약)
1894. 25. 일본 1차개혁 추진. 제1차 김홍집내각(대원군, 친일중립내각), 군국기무처 설치. (총재관 김홍집, 유길준 등 17명). 2대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 무장봉기 선포
1894. 8 평양성전투에서 청 축출
1894. 9.18 동학농민군 삼례에서 제2차봉기
1894. 9. 27 이누우에(井上麘) 파견하여 대원군 배제
1894. 10. 16 논산에서 남북접 연합전선(전봉준과 손병희)
1894. 11. 8 공주 우금치(牛禁峙)전투(10. 22~11.10)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퇴
1894. 11. 21 제2차김홍집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박영효 친일내각)
1894. 11. 27 동학농민군 태인에서 해산
1894. 12. 2. 전봉준 전북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1895년 3월 처형)
1894. 12. 17 군국기무처 폐지
1895. 1 대둔산((大芚山) 전투
1895. 4. 17 시모노세끼조약 : 청 일본에 요동반도와 타이완 할양
1895. 4. 23. 삼국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 : 요동반도 반환, 3차 김홍집 내각(
1985. 8. 20 을미사변, 4차 김홍집 내각(대원군). 3차 을미개혁
1896. 2. 11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러내각(이상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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