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東方道學不行
李 珥
손님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도 왕도로서 세상을 다스린 분이 있었던가?”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문헌이 부족하여 고증하기 어렵다. 다만 상상해 보면 기자(箕子)가 우리 동방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정전(井田)의 제도와 팔조(八條)의 가르침 등이 틀림없이 순수하게 왕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후부터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세 개로 나뉘었다가 고려가 통일하였는데, 그 사업을 고찰해 보면, 오로지 꾀와 힘으로만 하였을 뿐이니 어찌 도학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임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자들도 진지(眞知)와 실천으로써 선왕(先王)의 전통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불학(佛學)에 잘못 빠져 화(禍)와 복(福)에 급급하여 도도한 1,000년 동안에 특출한 이가 없었다. 고려 말엽의 정몽주(鄭夢周)가 유자(儒者)의 기상이 조금 있었으나 그 역시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그가 행한 일을 살펴보면 충신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손님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 수천 년 동안에 한 사람의 진유(眞儒)도 없었다고 하니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닌가?”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물어서 내가 감히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지나치게 이론을 즐기려 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진유란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을 누리게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온 세상에 교화를 베풀어 학자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관직에 나아가 도를 행함이 없고 관직에서 물러나 전할 만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비록 진유라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 기자(箕子)가 오랑캐의 풍속을 바꾼 뒤 더 이상 본받을 만한 선치(善治)가 없었으니 이것은 나아가 도를 행한 자가 없었던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저술에서 의리(義理)에 밝은 자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은퇴한 사람 중에 교화를 베푼 자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어찌 망녕된 말을 하여 백대(百代)의 사람들을 속이겠는가.” 하였다.<栗谷全書 卷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