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와 판사
변호사 강동필
벌써 변호사 개업을 한 지 15년이 되어간다.
판사로 근무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1998년 8월 하순에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처음에는 사건이 제법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고 마음도 홀가분했으나, 그 기분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의정부 사건이 터진 후라 법원에서는 판사에 대한 접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면담부를 작성하라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크린도어까지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아직 판사의 물이 덜 빠져서 그런지 판사실에서 사건을 설명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개업 후 첫 번째 추석이 다가왔다. 그해 9월 한 달간 형사사건 10건 정도 선임하였는데, 대부분은 추석특사를 노린 보석 사건이었다. 의뢰인들은 거의 매일같이 내 사무실에 와서 죽치고 앉은 채, 보석이 오늘 나오는지 내일 나오는지 기다렸다. 매일같이 판사에게 부탁을 했는지 다그쳤다. 나는 정말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떤 때는 판사실에 가지 않았는데도 갔다 왔다고 대충 둘러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돈 받아먹은 죄로 대가를 해야지’라고 마음먹고 억지로 판사를 만나러 갔다 오기도 했다.
그럭저럭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2005년 10월에 횡령죄로 구속된 어떤 형사사건을 수임하였다. 오피스텔을 두 사람이 동업으로 건축하였는데, 피고인이 건축비, 모델하우스 경비, 분양대금 등을 수 십 차례에 걸쳐 횡령하였다는 것이었고, 그 금액도 20억 원이 넘었다. 내가 12권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읽고 사건을 파악해 보니, 피고인이 횡령했다는 돈은 대출금, 개인 출자금, 임대료, 분양대금, 광고비 등으로 얽혀 있었고, 통장도 타인 명의를 포함하여 수십 개를 사용하여 자금 흐름을 잘 알 수 없었다. 피고인의 설명으로는 한마디로 아랫돌 빼어 윗돌을 괴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횡령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피고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으나 기억력이 매우 좋았으며, 수사기록을 보지 않고도 자금 흐름을 자세히 설명할 정도였다. 나는 수사기록을 보고 의심나는 점을 메모해서 구치소 접견을 가서 설명을 들었지만, 그 앞에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돌아와 변론서를 작성하다보면 또 다른 의심점이 생겨서 여러 번 접견을 갔다.
나는 끝내 의심점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였고, 재판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피고인의 주장을 조목조목 정리한 후 무죄 주장을 하면서 방대한 분량의 보석 청구서를 제출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내가 그해 연말에 미국에 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어서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재판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사정 설명을 하여 보석 허가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은 “당신이 판사 할 때 이 사건을 담당했다면 보석을 허가 해 주었겠느냐?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횡령 금액이 20억 원이 넘는데 어떻게 보석을 허가하겠느냐?”며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돌아와서 의뢰인에게 보석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렸다. 이 상태에서 나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런데 그 후 들은 소식은 정말 깜짝 놀랄만했다. 내 후임으로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재판장과 선이 닿을 만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고, 그것으로 우리는 사실상 손을 떼었다. 우리의 소개로 새로 선임한 변호사는 변호인선임서만 내고 아무 것도 제출한 것이 없었는데, 내가 미국으로 출국한지 보름 만에 피고인이 보석으로 석방된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내가 사정 설명을 하면서 부탁을 할 때 해 주었어야 하지 그 때는 왜 보석 허가를 해 주지 않았는지 너무나 서운했다.
그 후 그 사건은 근 1년에 걸친 1심 재판 후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았고,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것도 서울고등법원에서 전부 무죄가 선고되어 종료되었다.
법원은 1997년 의정부 사건과 1999년 대전 법조비리 사건을 전후로 재판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노력을 해 왔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위와 같은 사건을 직접 겪다 보니, 의뢰인이 “변호사가 판사와 친분관계가 있으면 유리하게 해 주지?”라고 물었을 때 겉으로는 “그건 과거의 이야기다.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판사와 면담도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건 절대 아니다”라고 단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고시 동기 민경한 변호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고 필력도 좋아서 최근 “동굴속에 갇힌 법조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개인적인 편향성이 없지는 않지만 과거 법조 현실과 요즘의 변화를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2013년 5월호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보에 실린 글을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