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門洞 72현’으로 불리는 高麗守節臣에 대한 當代의 記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朝鮮後期 英祖代에 와서야 朝鮮性理學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擧論되기 始作하였고 秘密리 또는 口傳으로 傳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杜門洞이라 하면 72현으로 世上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李朝 헌종 丁未年(1847)에 刊行한 杜門洞 書院誌에 보면 120賢이라 하였는데 開城府 종봉산 아래 東杜門洞 48賢이 있고, 開城府 萬壽山 아래 西杜門洞 72賢이 있어서 합봉 120賢이라 하였다.
世上에는 西 杜門洞 72賢이 원운곡 所藏 書帖에서 먼저 發見되어 所聞이 世上에 알려졌다 한다. 李成桂가 朝鮮王朝를 개창하자 高麗의 조신들은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杜門洞에 隱居하여 杜門不出하였다. 開豊郡誌에 따르면 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開豊郡의 地名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開城 松嶽山 서쪽 자락 萬壽山과 동쪽 寶鳳山에 각각 두 곳의 杜門洞이 있었다.
萬壽山의 西 杜門洞에는 高麗의 文臣 72인이 隱遁했고, 寶鳳山의 東 杜門洞에는 武臣 48인이 숨어 살며, 高麗에 忠誠을 다짐하고 새 왕조에 출사를 拒否하였다. 李成桂가 王使를 보내서 마음을 돌리도록 說得하였으나 그들이 拒否하자 화가 난 李成桂가 王命으로 東, 西 杜門洞을 에워싸고 섶을 쌓은 다음 불을 지르며, ‘너희 中에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보자’하였으나 이들 120인은 불길 속에 안좌하여 모두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참혹한 火刑에 대한 일은 전해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洗身井(같이 죽기로 맹세하면서 몸을 씻었던 우물)이란 것도, 會盟臺( 충성을 맹세하던 장소)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모두 杜門洞 안에 있었다.
1809년(순조 9년)에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杜門洞實記에는 ‘杜門洞은 京畿道 開豊郡 廣德面 廣德山 서쪽 골짜기에 있다. 高麗의 文臣 72인이 끝까지 高麗에 忠誠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不朝峴 이라는 고개에서 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으로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朝鮮王朝는 杜門洞을 包圍하고 高麗忠臣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 해진다’ 는 記錄이 있다. 훗날 性理學의 ‘義理 名分論’이 强化되던 時期인 1751년(英祖 27년)에는 高麗에 節義를 지킨 杜門洞 忠臣을 위해 祭祀를 지내고 杜門洞 碑를 세우게 하였다. 英祖가 1760년 9월에 候陵(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參拜 차 開京(개성) 附近 東南쪽의 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英祖가 地名의 緣由에 대해 묻자 臣下들이 朝鮮 太祖가 卽位한 直後에 高麗의 儒臣들이 開京 東南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拒否하고 이 고개에 朝會 때 쓰는 冠과 朝服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흩어지므로 ‘조회하지 않는 재’라는 뜻으로 不朝峴이라고 稱하며, 不朝峴을 지나면 杜門洞이 있다고 했다.
이에 英祖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不朝峴 碑를 세우게 했다. 杜門洞 72賢의 名單이 72명인 것은 1751년(영조 27년)에 杜門洞 忠臣을 위해 祭祀를 지내고 杜門洞 碑를 세우게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杜門洞 72賢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杜門洞 72賢의 最初 文獻은 高宗 9년(1872년)에 나타난다.
杜門洞 72賢의 한 사람인 騎牛子 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文集 ‘騎牛集 壬申本’이다. 그리고 杜門洞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文獻은 1924년에 강호석이 哲宗 11년(1860)에 刊行된 ’華海師全’의 名單을 參照해 作成한 ‘典故大方’이란 人物誌다. 물론 두 文獻은 名單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人物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選定되어 있다. ‘騎牛集 壬申本’은 鄭夢周를 中心으로 高麗 末 忠臣들을 包括的으로 選定했고, ‘典故大方’은 杜門洞에 들어갔던 時期를 中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正史라고 할 수 있는 奎章閣 忠烈錄 中 ‘杜門洞 諸 先生 實記’에 의하면 ‘高麗 末 忠臣 中 立節死義(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죽은 사람)한 분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山居野處하여 杜門屛跡하였거나, 혹은 벼슬을 주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정절을 지킨 분을 통칭 杜門洞 72賢이라고 하니 대개 그 뜻이 같다고 하여 通稱하였을 뿐이지 반드시 開城 杜門洞에서 함께 은거하였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麗朝 忠烈錄 跋文에도 ‘中國으로 들어가 마친 바를 알지 못하고, 먼 땅에 流配되었다가 宥還되지 못한 분이라도 杜門洞에서 同隱한 諸賢과 같으니 杜門洞에서 隱居한 분이 그 수가 72인에 未滿하여도 通稱 杜門洞 先生이라고 지금까지 전 한다’라고 하였다.
高麗崇義會가 發表한 72賢은 無慮 3백70여현이고 이미 殉節한 忠臣까지 합하면 4백60여현에 이르고 있다. 杜門洞 書院誌와 勝國名流漂傍錄은 그 人員을 1백16인과 1백5인으로 各各 記錄해 놓았다. ‘杜門洞 72賢’이라는 用語의 ‘72현’은 孔子의 弟子를 指稱하는 말에서 由來되었는데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의 弟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六藝에 通達한 弟子는 72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2’라는 숫자는 具體的인 사람의 數를 指稱하기보다는 ‘多數의 賢人’을 指稱하는 말로 理解해야 하겠다.
<두문동 72현 관련 기록연보> 1751년 杜門洞碑. 1760년 不朝峴碑. 1774년 철감록. 1783년 開城 成均館에 표절사 1809년 杜門洞實記刊行. 1860년 화해사전. 1872년 騎牛集. 1923년 麗朝忠烈錄 刊行 1924년 전고대방 간행. 1934년 杜門洞 書院誌. 1934년 開城에 杜門洞書院 創建 1935년 경현사지 刊行 등이 이루어졌다.
高麗 忠烈錄 木活字本 蔡東說 편 高麗末 開京 杜門洞 諸賢들의 史蹟을 모은 册으로 杜門洞은 高麗의 太學이 있던 곳이다.
杜門洞錄 金振根 지음, 1928년 發行, 國立中央圖書館 所藏의 麗朝秉節臣七十二人錄에는 高麗 末期 忠節을 지킨 臣下 72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杜門洞에 隱居하지 않은 사람들도 包含되어 있다.
杜門洞 殉節臣 名單
(●은 東國 名賢要覽錄72人. ■은 杜門洞諸先生實記目錄登載者74人)
姓 名
字. 號
本貫
官 職
備 考
孔 隱
孤山
曲阜
高天祥
二公
濟州
密直
杜門洞 隱居.■
高天祐
齊州
都總制.
天祥의 弟.排祿洞 隱居.■
郭 樞
仰天齊
淸州
諡 文良. ●
具 鴻
松隱
綾城
侍中
頭流山 排祿洞 隱居. ■●
鞠 孺
伏崖
潭陽
●
吉仁迪
海平
杜門洞에 隱居.■
吉 再
冶隱
善山
門下注書
金烏山 隱居. 賜額書院.■●
金光致
洛城
●
兄 上洛伯 得培 尙州 隱居.
金九容
金士廉
梧隱
安東
左司諫.
●
金承吉
光山
金若時
陰村
光山
集賢殿直提學
金光里 隱居.■●
金若恒
惕若齋
興海
判司僕寺事
●
金英庇
熙川
古石山 隱居.●
金五倫
採薇軒
旌善
典法判書
金 煒
光山
排祿洞 隱居.■
金六鹿
占石山 隱居.■
金自粹
純仲.桑村
慶州
大司成.
秋嶺 隱居. 旌閭有.■●
金自進
光山
●
金 鈿
自逋翁
安東
●
金 齊
金 澍
籠巖
善山
正言祭酒
中國隱居.■●
金 俊
頭流山 排祿洞 隱居.■
金振門
金震陽
草屋子
慶州
左常侍
李擴. 趙浚. 鄭道傳.彈劾.●
金沖漢
樹隱
慶州
禮儀判書
杜門洞隱居.■●
羅天瑞
安定
安定伯
●
南乙珍
沙川
宜寧
參知門下事
古沙川 隱居.■●
魯 愼
岳隱
咸豐
都 膺
靑松堂
星州
進士左平士
●
陶東明
雙檜堂
杜門洞隱居.●
都 洵
五鳳山 隱居
柳 珣
釣隱
文化
太學士
五鳳山隱居.■●
柳 藩
僻隱
孟 裕
溫陽
尙書
●
孟好性
龍湖
新昌
杜門洞 隱居.■
孟希道
東蒲
新昌
典敎令
東浦 隱居.●
文益漸
三憂堂
南坪
江城君
鄕里 隱居.●
文中啓
滄洲
閔 普
杜門洞 隱居.■
閔普文
驪興
郡事
排祿洞 隱居
閔安富
農隱
驪興
排祿洞 隱居.■●
閔 楡
思菴
驪興
府院君
通進 鳳翔里 隱居.●
閔由誼
漁逸
驪州
朴門壽
松庵
竹山
頭流山 排祿洞 隱居.■●
朴 諶
海隱
沔川
工曹典書
立巖隱居.■
朴 寧
法村
文義
工曹典書
法峴 隱居.■
朴大始
松溪
歸於故庄.■
朴德公
竹山
都摠制
朴宜中
貞齋
密陽
大司成
歸於農.■
朴 忱
密陽
戶曹典書.
頭流山 排祿洞 隱居.■
朴 翊
松隱
密陽
排祿洞 隱居
朴太始
松溪
朴泰儉
竹山
排祿洞 隱居
裵尙志
栢堂
興海
判事 同僕寺事
頭流山 排祿洞 隱居.■●
范世東
伏崖
琅耶
府尹
●
邊貴壽
長淵
頭流山 排祿洞 隱居.■
邊 斌
草溪
門下評理
邊 肅
慕麗
原州
戶曹典書
鴨山 隱居.■●
邊安烈
卞玉蘭
徐 甄
麗窩
利川
掌令
襟陽 隱居.■●
徐 輔
新畓
利川
工曹典書
積岩 隱居.■
徐仲輔
積巖
利川
奉正大夫
杜門洞 積岩 隱居.■
宣允址
退休堂
寶城
薛 凝
巖谷
淳昌
成 0
排祿洞 隱居
成 溥
眉山
昌寧
刑曹總郞
兵曹判書 追贈.●
成思齊
杜門子
昌寧
寶文閣直提學
杜門洞 隱居.■●
孫 登
密陽
府事
宋 寅
松村
南陽
左侍中
●
宋 柱
洪陽 隱居
宋 晈
睡雲菴
礪山
典書判書
●
孫孝貞
密陽
左尹
申 鑑
平山
集賢殿郞
申 珣
平山
直郞
申德隣
醇隱
高靈
禮儀判書
頭流山 排祿洞에 隱居.■●
申得淸
理猷軒
平山
申 釋
兵部郞
杜門洞에 隱居.■
申 雅
漢川子
平山
申 晏
排綠齋
平山
宗簿寺令
■
申 祐
退齊
鵝州
申 㙖
省事
平山
申翼之
退憂堂
平山
申 彛
愼歸齋
平山
版圖判書
■
申自嶽
平山
釋弟 歸寧海.■
申包翅
壺村
高齡
文科及第
頭流山 排祿洞 隱居.■
沈元符
岳隱
靑松
安省直
光州
太祖省字命名.平壤伯靑白錄.●
安從約
順興
頭流山 排祿洞 隱居.■
嚴 0
排祿洞 隱居
玉斯溫
正隱
宜春
梁 右
黙齊
南原
禹玄寶
養浩堂
丹陽
都評議使司
中國隱居.■
元 寶
原州
元 宣
陽村
原州
元天錫
耘谷
原州
雉嶽山 隱居.■●
尹 珪
杏村
坡平
尹 陸
頭流山 排祿洞 隱居.■
尹忠輔
驪江
茂松
●
李 0
排祿洞 隱居
李 瓊
二憂堂
河濱
牧使
杜門洞隱居.■
李 倫
秘灘歸居
李孟禮
甕津
■
李孟藝
川隱
甕津
戶曹典書
■
李明成
公州
監寧御使知制誥. 伊川 隱居●
李攀桂
慶州
雉嶽山隱居
李思敬
送月堂
全義
司宰監正
肅薪里 牧隱作 松月堂記.■●
李思之
麗隱
碧珍
郞將 ●
父希慶南征後殘賊에害를當함
李 穡
牧隱
韓山
諡號 文靖
■●
李釋之
南谷
永川
寶文提學
龍仁 南谷 隱居.■●
李性仁
安城
密直
李遂生
明仲.尊巖
遂安
成均進士
栗里 隱居.■
李守仁
星州
流遠地.■
李崇仁
陶隱
星州
排祿洞 隱居.■
李 瀹
桃灘에 隱居.■
李陽昭
琴隱
順天
司馬進士
同榜 永川 靑華洞 隱居
李養中
石灘
廣州
左參贊 刑判
廣陵에 隱居.■●
李 涓
連山
●
李 午
茅隱
載寧
李 沃
節制使
李 邕
釣隱
芽山
李 裕
海隱
甕津
典客署令
■
李惟仁
安城
頭流山 排祿洞 隱居.■
李 璘
東岡
原州
李 條
慶州
舍人
李存吾
石灘
慶州
大司成 追贈
恭愍王 9年에 登科監察.●
李鍾學
獜齋
韓山
牧隱穡子.●
李中仁
龍仁
門下侍中
李天驥
李 初
旌善
中郎將
李春啓
尙春
陜川
李 致
漁隱
陜川
李湯休
寧川
翰林
李 行
周道. 騎牛
驪興
羅州
大提學
禮泉洞 隱居.■●
林貴緣
羅州사람.●
林先味
休庵
淳昌
杜門洞 隱居.■●
林 偃
林 隲
杜門洞 隱居.■
林 卓
監務
羅州
錦城 隱居.■
張 0
排祿洞 隱居
長安世
松隱
仁同
德寧府尹
諡號 忠貞.●
田貴生
耒隱
潭陽
左贊成兼平章事.■●
田祖生
耕隱
潭陽
贊成事
排祿洞 隱居.■●
全 信
栢軒
全五倫
採薇軒
旌善
典法判書
瑞雲山 隱居.■
全子壽
晦亭
潭陽
程 廣
巾川
麗朝官侍事知
國亡棄官而農.●
鄭 侊
鄭夢周
圃隱
延日
諡號 文忠.
東方理學의 宗主.●
鄭 溫
愚谷
●
鄭 地
錦城
諡號 景烈
海島元帥太祖威化島回軍贊成●
鄭 樞
淸州
諡號 文簡
鄭熙良
黙隱
河東
進賢冠直提學
圃隱門人.■
趙 胖
趙 狷
松山
生隱於松山.■●
趙承肅
德谷
咸安
著作郞
諡號 文敬.■●
趙安卿
孤竹齋
咸安
戶曹典書
泉山 隱居.■
趙 悅
琴隱
咸安
趙 瑜
虔谷
玉川
●
趙 摘
趙鐵山
中樞院事
松山 㣧子.●
趙 珙
三可
白川
■
曺大運
山狂
昌寧
曺由道
昌寧
提學
曺義生
遠村
昌寧
侍中
杜門洞 隱居.■●
曺希直
正言
狎鷗亭 一生終.●
車 0
排祿洞 隱居
車原覜
雲巖
延安
諡號文節.正言
杜門洞 隱居.■●
蔡貴河
多義堂
仁川
戶曹判書
多義峴 隱居.■●
蔡玉澤
平康
領護軍
●
崔文漢
忠齋
江陵
判軍器時事
忠肅王 駙馬.■●
崔 瀁
晩六堂
全州
寶文閣大提學
■●
崔 原
保勝
水原
崔有江
杜老
慶州
崔允德
遜菴
耽津
崔 邇
遯翁
慶州
崔添老
石溪
慶州
崔七夕
全州
●
崔 瀣
全州
崔 瑚
檜谷
平壤
河 敬
獻納
晉陽
河自宗
目翕
晉州
宰府尙書
●
韓哲中
夢溪
典書 ●
杜門洞隱居死亡後白原山貴葬.
許 錦
埜堂
陽川
典理寺判書
排祿洞 隱居.■
許 徵
陽川
龍津縣令
光州 隱居.●
許 麒
湖隱
金海
玄繼生
義昌
太學生
洪 魯
敬齊
缶溪
洪 載
晩隱
龍山
其他 參考 資料
◐두문동 서원과 72현 두문동서원은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위치하며 고려말 충신들이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林先味의 후손 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말 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